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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7년 9월 25일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가 진행한 서해순 인터뷰(이하 ‘인터뷰’)를 보고 나서 떠오른 어지러운 생각을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리한 글이다. 호칭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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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늘고 푸른 선 

우선 인터뷰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한 ‘전설적인’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에롤 모리스는 1988년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를 세상에 발표한다. 제목은 [가늘고 푸른 선] (The Thin Blue Line). ‘경찰 살해’ 사건을 소재로 했다. 때는 1976년 11월 추수감사절 시즌,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시에서 근무 중이었던 로버트 우드 경사가 권총으로 살해당한다.

살해된 경관
살해된 경관 로버트 우드

경찰은 강력한 용의자로 랜들 아담스(당시 28세)를 구속하고, 승소율 100%의 검사 더글라스 멀더는 아담스를 살인죄로 기소해 법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얻어낸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담스는 사형 집행을 3일 앞두고 종신형으로 겨우 감형돼 죽음을 면한다. 그런데 아담스는 범인이 아니었다! 

경관 살해범으로 체포돼 유죄가 확정된 랜들 아담스
경관 살해범으로 체포돼 유죄가 확정된 랜들 아담스. 하지만 [가늘고 푸른 선]이 공개되고, 재수사를 통해 결국 누명을 쓴 것으로 밝혀졌고, 당연히 석방됐다. 이미 12년을 복역한 뒤였다.
아담스를 유력 용의자로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열할을 한 건 당시 사건 현장에 함께 있던 데이빗 해리스(당시 16세). 해리스는 아담스를 경관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이 증언만을 맹목적으로 신뢰한 경찰은 아담스를 범인으로 ‘믿어버린다’.

하지만 [가늘고 푸른 선]은 목격자 행세를 한 데이빗 해리스가 오히려 살인범이고, 랜들 아담스는 무죄였음을 (말 그대로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해리스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아담스가 억울한 ‘희생양’이며, 자신이 진범이었음을, 직접 자신이 죽였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도록, 고백한다. 참고로 데이빗 해리스는 다른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돼 2004년 사형이 집행된다.

랜들 아담스를 살인범으로 지목한 '목격자' 데이빗 해리스
랜들 아담스를 살인범으로 지목한 ‘목격자’ 데이빗 해리스. 자신이 진범임을 명확하게 밝히진 않았지만, [가늘고 푸른 선]에서 아담스가 억울한 희생양이며, 자신이 진범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다른 살인 사건으로 2004년 사형이 집행됐다.
이 다큐의 가장 뛰어난 점은 해리스와 아담스의 인터뷰를 포함한 수많은 사건 관련자의 인터뷰다. 자신을 ‘감독-탐정'(director-detective)이라고 자칭한 에롤 모리스는 “200명이 넘는 사람과 인터뷰를 나누었고, 그 후 24명의 인터뷰를 찍었으며, 이 중 20명의 인터뷰를 영화에 사용했다.”(‘피디저널’에서 재인용)고 말한다.

반면, 이 영화에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한 ‘극적인 재현’은 논란 대상이 된다. [가늘고 푸른 선]은 당시 (특히 범죄가 벌어지던) 상황을 재현하는데, 최대한 있는 그대로, 건조하게 재현하기보다는 감독의 주관성을 강하게 투영해 과장되고 극적으로 재현한다. 즉, 관계자의 인터뷰를 전하는 방식은 다큐(넌픽션)지만, 적어도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방식은 극영화(픽션)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다큐멘터리의 전범을 제시한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나무위키)는 서술은, 나무위키의 서술이 종종 그런 것처럼, 사실과 다르다. 이 작품은 감탄할만한 노력과 성실함으로 ‘억울한 재소자의 석방’이라는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 표현 방식에서는 상당한 논란을 빚었고, 적어도 관습적 전통에서 보면, 그 방법론에서 한참 멀리 있는 작품이다.

참고로, 영화 제목인 ‘가늘고 푸른 선’은 랜들 아담스라는 엉뚱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기소한, 앞서 짧게 언급한 더글라스 멀더라는 ‘전설적인’ 검사의 최후 진술에서 인용한 것이다. 멀더는 법정에서 “경찰의 ‘가늘고 푸른 선’이 사람들을 무질서로부터 막아주고 있다”고 최후진술한다. ‘가늘고 푸른 선’은 사건 현장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이 그리는 푸른색의 경계선을 의미한다. 이 제목은 사법 제도의 한계와 모순 그리고 이를 둘러싼 부조리를 비꼬기 위해 반어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가늘고 푸른 선 (에롤 모리스, 1988)
[가늘고 푸른 선] (에롤 모리스, 1988)
마이클 무어 류의 ‘닥치고 까기’식 다큐멘터리를 다큐의 ‘정석’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어의 다큐멘터리에 관해 말하면, 나는 무어가 다루는 소재와 주제가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인정하지만, 그가 다큐를 만드는 방법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방법은, 좋게 보면 저돌적이고, 나쁘게 보면 양아치스럽다.

흔히 다큐멘터리를 ‘아주 객관적인 무엇’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큐멘터리의 사실은 (감독의 철학과 주관에 의해) ‘선택된 사실’이다. 그 선택으로 인해 다큐멘터리는 아주 주관적일수 있고, 많은 다큐멘터리가 실제로 주관적이다.

가령, 카메라가 향한 방향에 따라 같은 공간을 찍더라도 정반대의 세계관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다큐멘터리다. 가령 시위 현장을 생각해보라. 카메라는 시위대에 무자비한 물대포를 쏘는 경찰을 응시할 수도 있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불법’ 시위대를 감시할 수도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그 세계관에 따라 다큐멘터리는 극영화보다 오히려 더 주관적이고, 과장되며, 왜곡된 세계를 재현할 수도 있다.

다소 길게 [가늘고 푸른 선]을 이야기한 이유는,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진작에 짐작했겠지만, 1988년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이 다큐와 여러모로 비슷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2017년 대한민국에도 ‘드디어’ 도착[footnote]영화 [김광석]은 [일어나, 김광석]이라는 제목으로 2016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출품됐었다.[/footnote]했기 때문이다. 그 영화는 이상호의 [김광석]이다.

김광석

손석희는 인터뷰에서 [김광석]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유는 서해순에 관해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나도, 아쉽지만, [김광석]을 아직 보지 못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상영관이 너무 적고, 그래서 상영관이 너무 멀다. ‘영화’라는 관점에서는 별 기대가 없고, ‘저널리즘의 기록물’로서는 그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footnote]공지영은 “미저리 이후 최고의 스릴러”라고 평했고, 이상호는 이 논평을 자랑처럼 인용하던데, 나는 솔직히 그 평가 자체도 그 취지가 의문이지만, 그걸 자랑삼는 이상호도 의문이다. 왜 굳이 대놓고 극영화(픽션)와 비교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내가 [김광석]을 못봐서 그 깊은 뜻을 모르는 건가 싶기도 하다. (이후 추가) 다큐 ‘김광석’을 봤는데 공지영의 촌평은 어이가 없고, 이상호의 반응은 그런 점에서 더 이해되지 않는다. 이 다큐엔 김광석은 없고, 김광석의 그림자로 자신의 광채를 만들려는 이상호만 있다. (추가 완료: 2019. 9. 9. 오전 7:27) [/footnote]

그리고 그때 [김광석]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에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 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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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직접 증거와 간접 증거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김광석]은 김광석의 죽음에 관한 의혹, 즉 김광석은 자살한 게 아니라 타살당한 것이라는 의심을 공개적으로 ‘다시 한 번’ 제기한 다큐멘터리 영화고, ‘타살’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서해순)를 특정해 공개하며, 다양한 증언을 통해 간접 증거라고 할만한 정황을 제시하지만, ‘스모킹 건’이라고 부르는 핵심 증거나 물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진 못하다는 ‘사실’을 넉넉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선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물적 증거 없는 간접 증거만으로 살인죄를 추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정당한가’일 테다. 우선 결론을 이야기하면, 그럴 수 있다. 물론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즉 간접 증거를 통한 살인죄의 입증은 당연히 직접 증거에 버금가는 형법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

현대의 범죄 수사 기법은 직접 증거에만 집착하는 건 아니다. 오늘날 수사기관은 여러 정황의 결합을 통해서도 범인을 특정하는 진일보한 수사기법을 발전시켜왔다. 수사기법이 발전함에 따라 법원도 형사 재판에서 물적 증거만을 고집하지 않고, 물적 증거와 대등한 형법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면, 정황과 같은 간접 증거를 유죄의 근거로 인정한다. 이는 특히 살인사건의 가장 중요한 물증이라고 할 수 있는 ‘시신’이 없어도 살인사건을 인정할 수 있다는 ‘시신 없는 살인사건’의 판례 이론으로 정립했다.

대법원
대법원

살인죄 등과 같이 법정형이 무거운 범죄의 경우에도 직접증거 없이 간접증거만에 의하여 유죄를 인정할 수 있고, 살해의 방법이나 피해자의 사망경위에 관한 중요한 단서인 피해자의 사체가 멸실된 경우라 하더라도 간접증거를 상호 관련하에서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살인죄의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이 경우 범행 전체를 부인하는 피고인에 대하여 살인죄의 죄책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사망이 살해의사를 가진 피고인의 행위로 인한 것임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어야 한다(대법원 1999. 10. 22. 선고 99도3273 판결, 대법원 2008. 3. 13. 선고 2007도10754 판결 등 참조).

여기서 합리적 의심이라 함은 모든 의문, 불신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경험칙에 의하여 요증사실과 양립할 수 없는 사실의 개연성에 대한 합리성 있는 의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황에 대한 이성적 추론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관념적인 의심이나 추상적인 가능성에 기초한 의심은 합리적 의심에 포함된다고 할 수 없다(대법원 2004. 6. 25. 선고 2004도2221 판결 등 참조).”

– 대법원 2012. 9. 27. 선고 2012도2658 판결 중에서

하지만 법원은 ‘간접 증거’를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그 한계도 명확하게 정한다. 그것은,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심지어) 살인죄에서도 직접 증거 없이 간접 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있다. (심지어) 시신이 없는 살인사건인 때에도 마찬가지다.
  2.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피해자의 사망이 피고인의 행위로 인한 것임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어야 한다.
  3. 합리적인 의심은 논리와 경험칙에 의하여 증명을 필요로 하는 사실(= 요증사실)과 양립할 수 없는 사실의 개연성에 대한 합리성 있는 의문을 의미한다.

영화 [김광석] 이후, 공소시효가 완성된 범죄더라도 다시 재수사해 기소할 수 있도록 하는 소위 ‘김광석법’ 논의가 활발하다. 나는 원칙론에서 김광석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인간이 악인이든 선인이든, 유명한 사람이든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든, 한 공동체가 최후까지 책임져야 하는 문제이고, 거기에는 어떤 의심도 남겨두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삶은 우리에게 공평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

김광석이라는 유명인의 죽음, 사랑받았고, 여전히 사랑받는 대중 예술인의 죽임이라서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죽음도 거기에 의혹이 있다면, 그 죽음에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죽음은 공동체 성원 전부가 근심하고, 고민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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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두에게 미움받는 자(Hated In the Nation)

잠깐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자. [블랙 미러]는 근미래의 미디어 디스토피아를 놀랄만한 상상력과 싸늘하기 짝이 없는 사회비판적 시각으로 그려내는 걸작 드라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그 완성도와 깊이를 더해가는 [블랙 미러] 시즌 3 중 마지막인 여섯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은 ‘모두에게(국가적으로) 미움받는 자'(Hated In the Nation). 이 에피소드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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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 3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 ‘모두에게 미움받는 자(Hated In the Nation)에 관한 줄거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염려하는 독자는 이 박스 글을 피해주세요. (편집자)

블랙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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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카린 파크는 청문회에 출석해 ‘그날의 끔찍한 사건’에 관해 하나씩 증언한다.

첫 번째 미움 받는 자, ‘장애인을 비하한 기자’ 

근미래 영국. 멸종한 꿀벌을 대신해 꿀벌 드론이 세상을 날아다니며 활동한 지 2년째다. 자살한 장애인 활동가를 비아냥거린 기자가 트위터에서 거센 비난을 받고, 그날 밤 시신으로 발견된다.

디지털 포렌식 요원 출신 블루 콜슨 형사가 부사수로 사건 수사에 합류한다. 콜슨은 기자에게 쏟아진 트위터의 증오 패턴이 사건과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 미움 받는 자, ‘아이에게 혹평한 가수’

TV쇼에서 인기 가수의 춤을 흉내낸 아홉살 꼬마에게 정작 해당 가수는 가혹한 혹평을 쏟아내고, 그 가수에게 트위터에선 거센 비난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 가수도, 기자가 죽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죽는다.

트위터에서 비난받는 사람을 표적으로 삼는 연쇄살인. 피해자의 머리 속에서 꿀벌 드론이 발견되면서 사망 원인도 밝혀진다. 하지만 누가 꿀벌 드론을 조종(해킹)해 피해자를 정하고 죽이는 걸까.

‘인과의 게임’ #deathTo

트위터에선 #deathTo라는 해쉬태그가 유행한다. 이는 ‘인과의 게임(Game of Consequences)’의 일부. 죽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붙여 해쉬태그를 달면 그날 가장 많은 득표 수를 얻은 인물이 죽는 게임이다.

'인과의 게임'의 규칙. 1. 타켓을 정한다. 2. 그 타켓의 이름과 사진을 '#deathto'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올린다. 3. 매일 오후 5시에 가장 많은 투표를 얻은 타켓은 제거된다. 4. 매일 자정에 게임이 리셋된다.
‘인과의 게임’의 규칙. 1. 타켓을 정한다. 2. 그 타켓의 이름과 사진을 ‘#deathto’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올린다. 3. 매일 오후 5시에 가장 많은 투표를 얻은 타켓은 제거된다. 4. 매일 자정에 게임이 리셋된다.

세 번째 미움 받는 자, 밉상 사진 올린 여자 

꿀벌 드론을 살인 무기로 한 연쇄살인의 세 번째 타켓은 ‘밉상 사진'[footnote]위인의 동상에 남자처럼 오줌싸는 시늉을 한 사진[/footnote]을 트위터에 올린 여자다. 수사관들은 세 번째 타켓을 찾아내고, 안전가옥으로 옮긴다. 하지만 수많은 꿀벌 드론이 안전가옥을 공격하고, 결국 세 번째 ‘미움 받은 자’도 죽는다.

장난으로 동상에 남자처럼 서서 오줌누는 시늉을 한 사진을 올린 여자는 트위터러에게 '밉상'으로 찍혀서 세 번째 희생자가 된다.
장난으로 동상에 남자처럼 서서 오줌누는 시늉을 한 사진을 올린 여자는 트위터러에게 ‘밉상’으로 찍혀서 세 번째 희생자가 된다.

이제 사람들은 이게 장난이 아닌 걸 안다 

이제 사람들은 ‘죽음의 해시태그’가 그날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를 결정하는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살인의 결과에는 책임지려 하지 않고, 죽음의 해쉬태그는 점점 더 그 열기를 더한다. 그리고 결국 총리가 ‘미움 받는 자’ 1위 후보에 오른다.

좁혀지는 용의자 

파크와 콜슨은 드론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을 추적하던 중, 인터넷 따돌림으로 자살을 시도한 드론 회사 전 직원을 찾는다. 그리고 그녀를 자살 시도로부터 구해준 하숙집 동료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한편 살인 도구로 이용된 꿀벌 드론에서 발견된 성명서를 실마리로 은신처를 급습하지만, 범인을 검거하는 데는 실패한다.

국민 감시 수단

범인의 디지털 성명서에는 꿀벌 드론이 국민 감시 장치로 악용됐다는 비판 내용이 있었다. 정부 요원은 국가의 전 국민 감시 수단으로 드론이 이용됐다는 걸 시인하고, 이 기능이 드론의 피해자 식별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게임은 ‘미끼’였을 뿐… 

수사진은 드론 제작사로 향한다. 정부 요원은 시스템을 셧다운할 수 있는 키보드를 눌러 모든 드론의 작동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파크 형사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결국 이것은 범인의 함정. 정부 요원이 키보드의 엔터 키를 누르자 모든 꿀벌 드론은 통제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휴대폰 번호를 표식으로 삼아 타겟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대학살 

공격 대상은 #deathTo 태그를 사용한 모든 대중들. 그것이 ‘인과의 게임’을 만든 범인의 진짜 목적이었던 것. 꿀벌 드론은 #deathTo 태그를 무책임하게 사용한 대중을 공격하고, 총 387,036명이 이 ‘대량 학살 사건’으로 사망한다.

끝까지 범인을 쫓는 형사들

묘연해진 범인의 행적. 파크 형사는 청문회에서 콜슨 형사의 근황을 묻는 의원 질문에 자살했을 것이라고 답한다. 파크는 청문회를 마친 뒤 ‘범인을 찾았다’는 콜슨의 메시지를 받는다. 두 형사는 계속해서 범인을 추적해왔던 것. 범인을 미행하는 콜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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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굴곡마다 대한민국을 진창에서 길러 올린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우리는 현명하고 위대하다. 하지만 동시에 매스미디어의 수용자로서 우리는 자주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대중이 되곤 한다.

중요한 건 누구나 특정한 조건 속에서 대중심리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이 배워서, 훌륭한 인격자라서, 경험이 풍부해서 ‘나는 빼줘’라고 할 수 있을까. 언감생심이다. 누구나, 적어도 나 자신을 스스로 관찰하면, 나는 자주 대중심리에 빠진다. 흔히 맹목적이고, 감정적이며, 정의를 명분삼아 과도한 폭력성을 띠기도 하는 그 대중심리는 나와 항상 공존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다.

나는 손석희 – 서해순 인터뷰가 끝난 뒤 그 소식을 ‘받아쓰기’하는 수많은 기사와 그 기사에 남긴 독자들의 댓글을 읽었다. 그 댓글 상당수는 서해순을 김광석을 죽인 살인자로 단정하고 있더라. 나는 그 댓글을 이성적으로 비판하는 나와 감정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나를 발견했다.

서해순은 김광석을 죽였는지도 모른다. 서해순은 딸을 죽도록 방치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머리로는 그런 성급한 단정을 경계하고, 그런 판단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마음은, 내 감정은 이미 그녀를 범인이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그렇게 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내가 [블랙 미러]에서 죽음의 해시태그를 남기고, 결국 스스로 희생자가 되는 387,036명 중 한 명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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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해순 인터뷰 

“이 인터뷰는 저희가 지난주에 고 김광석 씨 가족 측 변호인과 인터뷰한 뒤에 서해순 씨가 혹시 반론이 있다면 저희 뉴스룸에서 담아드리겠다고 말씀드렸고, 바로 서해순 씨께서 반론권을 신청하셨기 때문에 오늘 인터뷰는 이뤄지게 됐습니다.” (손석희)

서해순의 반론권을 위한 것이라는 손석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인터뷰는 본질에서 ‘누가 김광석을 죽였나’ 혹은 ‘누가 김광석의 딸을 죽였나’ 또는 ‘누가 김광석의 딸의 죽음을 방치했나’라는 질문의 연장선에 있다. 그게 이 인터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혹은 ‘관극틀’이다. 더군다나 검찰 수사를 앞둔 시점이다. 누가 인터뷰하든 어떤 매체에서 인터뷰하든 서해순을 ‘취조’하는 모양새를 결코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으로, 아니 불가능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손석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저널리스트다. 그는 당연히 노련하고 능숙한 인터뷰어다. 하지만 그런 손석희라도 앞서 말한 ‘취조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고 판단한다. 손석희 자신, 인터뷰 도중에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지금 서해순 씨 모시고 조사를 하거나 취조를 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저하고 나눈 말씀이 어차피 검찰에서 다 할 거니까 아마 같은 질문들이 많이 나올 테고요.”

‘범죄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혐의자나 죄인을 조사함’. 취조의 사전적인 의미다. 검찰에서 “같은 질문들”을 한다면, 손석희가 하는 질문만 취조가 아니고 검찰 수사관이 하는 질문은 취조가 되는 것일까. 같은 질문이라더라도 그 목적이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같은 질문인데, 어떻게 어떤 질문은 ‘반론과 해명’을 위한 질문이 되고, 어떤 질문은 ‘범죄 사실을 밝히기 위한’ 질문인 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서해순 손석희

각설하고, 인터뷰는 서해순이 적어도 보통 사람이 ‘상식’으로 생각하는 기준에서는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 같다. 횡설수설과 동문서답, 무의미한 동어반복으로 점철된 서해순의 답변은 보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그야말로 난삽하기 짝이 없는 답변. 특히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말투는 자신의 딸을 마치 남 이야기하듯 설명하는 부분. 가령 다음과 같은 답변.

“10년 전 얘기고, 장애우가 죽은 부분이라서 참 힘듭니다. 장애우 키워보셨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장애우 엄마 마음들은 뭐 꼭 그래서가 아니고. 예, 예. 지금 얘가 그렇게 되고 하니까. 예, 예.” (서해순, 인터뷰 동영상 19:18 이후)

자기 딸을 ‘장애우’라고 부르는 ‘유체이탈’ 화법, 인터뷰 내내 보여준 과도한 손 동작, 딸의 죽음에 관해 말하면서도 싱글벙글 웃는 듯한 얼굴 표정은 엽기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개인적으론 좀 무서웠다. 그렇다고 서해순의 횡설수설에 무슨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특히나 횡설수설하거나 엽기적인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살인범이 되거나 유기치사범이 되는 건 아니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낯선 환경에서의 인터뷰라는 점을 고려하면 서해순의 횡설수설이나 어색한 제스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은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인터뷰는 논평할 가치를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 책임 대부분은 반론권을 확보하기 위해 인터뷰를 자청하고도 제대로 된 답변을 하나도 하지 못한 서해순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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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죽음의 신 

“수천 개의 태양이 하늘에서 한 번에 폭발한다면, 그 빛은 전능한 자의 광채와도 같으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footnote]”If the radiance of a thousand suns were to burst at once into the sky, that would be like the splendor of the mighty one…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footnote]

–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바가바드 기타] 11장 12절과 32절을 인용하며[footnote] 오펜하이머가 [바가바드 기타] 11장의 12절인 “만약 하늘에 천 개의 태양 빛이 동시에 떠올라 있다면 저 위대한 자아의 빛이 (바로) 그와 같을 것입니다.”라는 문장과 32절인 “거룩하신 존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무르익은 시간으로서 세계를 파괴하는 자라오. 여기에서 세계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오. 그대가 없더라도 적들 가운데 정렬되어 있는 전사는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중에서 일부를 함께 이어서 변주된 형태로 인용한 것.[/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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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는 회한 가득한 표정으로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며, “나는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읊조린다.

[블랙 미러]에서 387,036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학살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죽음을 결정하는 일에 게임하듯 참여하는 대중을 ‘징벌’한다. 물론 그 학살자를, 그 대량학살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대량학살은 어떤 식으로든 용납할 수 없고,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387,036명의 죽음은 드라마 속 픽션이고, 상징이지만,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블랙 미러]는 번역하면 ‘검정색 거울’이다. 그 검정색 거울은 TV(매스미디어)와 스마트폰(소셜미디어)의 꺼진 화면을 뜻한다. 그것은 동시에 미디어의 부정적인 속성, 그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한다. 자기 스스로 피해자가 되어버린 드라마 속 387,036명. 30분짜리 인터뷰만으로 서해순을 악마로, 살인자라고 손쉽게 단정하고, 예언하는 누구든, [블랙 미러]의 세계에서 ‘인과의 덫’에 빠진 387,036명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인간의 욕망과 분노, 슬픔과 희망은 뉴스 상품의 광고 가치를 높이는 윤활유로 전락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원자폭탄은 성찰하지 않고, 대화하지 않는 독선의 미디어다. 그 미디어는 인간의 슬픔과 분노와 욕망과 절망의 감정을 ‘대중심리’라는 용광로에서 한데 녹여 하나의 거대한 괴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죽음의 신이 되어버렸다.

인터뷰를 통해 본 서해순의 모습은 이상하다. 비상식적이다. 때론 엽기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곧바로 서해순을 악마로, 살인자로 단정할 수 있을까. 그건 ‘정의감’에 바탕한 분노의 표출이겠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더라도 너무 성급하다. 너무 경솔하다. 우리는 사안의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질 때까지 조금 더 침착해질 필요가 있다.

인터뷰에서 서해순은 이상하고, 비상식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곧바로 서해순을 악마로 살인자로 단정하는 건 곤란하지 않을까. 그것이 '정의감'에 바탕한 분노의 표출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너무 성급하다. 좀 더 찬찬히 사안의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질 때까지 조금만 더 침착할 필요가 있다.
서해순 인터뷰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서

김현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에 대해 경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 [footnote]김현, [행복한 책읽기] 중에서 [/footnote]한 가수의 죽음에 관해 그 죽음이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을 붙잡고, 거기에 더해 그 가수가 세상에 유일하게 남긴 핏줄의 허망한 죽음에 관해 그 죽음이 혹여 품고 있을지 모를 슬픔을, 상처를 우리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궁금해 한다. 그 마음은, 그 호기심은 마땅히 상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호기심이 제대로 된 질문과 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경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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