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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수의 상징 스칼리아 연방대법관이 텍사스에 사냥하러 갔다가 잠을 자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떴다. 미처 이별의 말을 나누지 못한 가족에게도 충격이겠지만, 미국 정치계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스칼리아는 “최악의 시점을 골라서” 세상을 떴다고까지 할 수 있다. 가뜩이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미국 대선에 또 다른 변수가 생긴 것이다.

안토닌 스칼리아 (Antonin Scalia, 1936.9.~2016.2.)
안토닌 스칼리아 (Antonin Scalia, 1936년 3월 11일 ~ 2016년 2월 13일)

종신직 연방대법관

미국의 대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한 번 임명하면 종신제이기 때문에 각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지향점과 같은 진보, 혹은 보수 성향의 판사를 임명하려는 것은 당연. 따라서 대법관 임명은 그것만으로도 온통 정치뉴스를 도배하는 치열한 싸움이다.

오바마는 임기 중에 벌써 두 명의 대법관을 임명하는 행운을 누렸다. 판사들은 자신과 같은 성향의 대통령 임기 중에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같은 성향의 판사를 대법원에 남기고 떠나려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스칼리아처럼 보수판사가 진보 대통령 재임 중에 사망을 하는 경우, 혹은 그 반대 경우다. 각 진영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의회에서 일전을 벌인다. 절대 곱게 임명동의를 해주지 않는다.

현재 9명의 판사들 중에서 진보 성향은 4명, 보수 성향은 5명으로 보수 쪽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동성결혼 합헌 판결에서 드러난 것처럼 보수에 속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은 종종 진보적인 판결을 내림으로써 일종의 캐스팅 보트가 될 때가 있다. 이념적으로도 가장 온건한 보수다.

연방대법원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학자들이 분석한 바로는 토머스(가장 보수적) → 앨리토 → 스칼리아 → 로버츠 판사 순으로 더 보수적인 의견을 긴즈버그(가장 진보적) → 소토마요르 →  케이건 → 브레이어 순으로 진보적 성향의 의견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케네디 판사는 중도파로 분석됐다.[footnote]Ideology scores are based on voting patterns and developed from the Supreme Court Database by Lee Epstein,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Andrew D. Martin, University of Michigan; and Kevin Quinn,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footnote]

미국 연방대법관(2010년 10월~3016년 2월)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 순으로: 클래런스 토마스(Clarence Thomas), 안토닌 스칼리아(Antonin Scalia) †, 존 로버츠(John Roberts, 연방 대법원장), 앤서니 케네디(Anthony Kennedy),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 순으로: 소냐 소토마이어(Sonia Sotomayor), 스티븐 G. 브레이어(Stephen G. Breyer), 새뮤얼 A. 앨리토(Samuel A. Alito), 엘레나 카간(Elena Kagan).
미국 연방대법관(2010년 10월~2016년 2월)
뒷줄 왼쪽부터: 소니아 소토마요르, 스티븐 브레이어, 새뮤얼 앨리토, 엘리나 케이건.
앞줄 왼쪽부터: 클래런스 토머스, 안토닌 스칼리아 †, 존 로버츠(대법원장), 앤서니 케네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그런 상황에 오바마가 스칼리아의 공석에 진보적 성향의 판사를 앉히려 한다면 워싱턴은 완전히 벌집을 쑤신 상황이 될 것이 분명하다. 현재의 구도가 깨지는 걸 공화당이 허용할 리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재의 연방대법관들(사망한 스칼리아 포함)을 임명한 역대 대통령과 그 연도는 다음과 같다.

  • 로널드 레이건: 안토닌 스칼리아(1986), 앤서니 케네디(1988)
  • 조지 부지: 클래런스 토머스(1991)
  • 빌 클린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93), 스티븐 브레이어(1994)
  • 조지 W. 부시: 존 로버츠(대법원장, 2005), 새뮤얼 앨리토(2006)
  • 버락 오바마: 소니아 소토마요르(2009), 엘리나 케이건(2010)

선거철에 터진 호재 혹은 악재

게다가 오바마는 내년도 예산안을 내놓으면서 임기 말년임에도 레임덕이 될 생각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 예산안 하나만 가지고도 대규모 전투를 벌일 각오를 한 오바마의 손에 핵폭탄이 주어진 셈이다.

미국 대선 미치 DonkeyHotey https://flic.kr/p/dybMoG오바마가 초강세로 나올 것을 짐작한 공화당은 벌써 선수를 쳤다. 상원 다수당(공화당) 원내대표인 미치 맥코널(Mitch McConnell, 캐리커처)이 “스칼리아의 공석은 다음 대통령에게 맡기자”며 임명 보류안을 낸 것. 물론 그건 법적인 강제사항이 아니다. 민주당이 들어준다 해도 호의적인 제스처일 뿐이다. 싫으면 안 들어주면 그만이다. 싸움의 불씨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게다가 대선은 또 어떻게 치를 것인가?

이번 대선이 유독 중요한 이유가 차기 대통령은 많게는 세 명의 대법관을 임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바마가 그럴 가능성이 있는 대법관들 중 하나를 퇴임 전에 (이제까지 임명한 두 명 외에) 임명하게 된 것이다. 만약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고 보수 성향의 대법관 중 두 명만 물러나거나 사망해서 교체될 경우가 생기면 최대 6대 3으로 진보의 우세가 될 수도 있고, 대법관들의 나이를 봤을 때 그런 구도는 앞으로 20~30년 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보수 3인방' 이 중 스칼리아는 유명을 달리했다. (DonkeyHotey, SCOTUS, CC BY) https://flic.kr/p/vbMQuK
미국 연방대법원의 ‘보수 3인방’ 스칼리아, 앨리토, 토머스. 이 중 스칼리아는 유명을 달리했다. (DonkeyHotey, SCOTUS, CC BY)

오바마가 진보 성향 판사를 스칼리아의 공석에 앉히려고 하면 가장 길길이 뛸 사람은 테드 크루즈이다. 크루즈는 맥코널이 가장 싫어하는 후보지만, 오바마의 진보 대법관 임명 시도는 그 둘을 비롯해 공화당 주류와 비주류를 아우르는 보수진영의 대결집을 이끌어내는 기회가 될 가능성도 있다.

거기에 대항하는 진보진영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그럴 경우 나머지 다른 이슈들을 덮을 만한 악재로 커질 가능성도 있다.

오바마 입장에서는 공화당의 부탁을 들어줘서 다음번 대통령이 3명을 임명하게 순순히 지켜보고 있을까? 만약 (현재 철저하게 오바마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다면 모를까, 만약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에 뽑혀 본선 승리를 장담 못 하게 된다면 3명의 대법관을 고스란히 공화당에 넘겨주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이는 자신이 임기 내에 애써 쌓았던 진보적인 법안과 정책이 다음 대통령 때 대법원에서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상황을 누가 한 줄로 완벽하게 묘사했다:

“이거, ‘하우스오브카드’ 보다 재미있다.” (This shit is better than House of Cards.)

오바마의 정면돌파

미치 맥코널, 테드 크루즈, 마르코 루비오가 연달아 임명보류안을 내놓자, 오바마는 즉시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그의 표현에 눈길이 간다:

“(대통령인) 내게 헌법이 준 의무를 다할 것.”

오바마는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 시카고대학교에서 헌법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한때는 정치인답지 못하고 지나치게 교수 같다는 비판을 들었을 만큼 법, 특히 헌법에 기반한 사고와 논리를 펴는 사람이다. 게다가 대법관을 임명하는 건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의무이자 권리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오바마가 헌법을 이야기한 것은 공화당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지난 화요일 기자회견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대법관 임명에 대해 질문한 기자에게 오바마는 헌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문구 그대로 해석하라고 그렇게 강조하던 보수진영이 헌법을 따르지 않고 임명을 연기하라고 한다면서,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으니 다음번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하도록 미뤄야 한다는 말이 헌법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했다.

적어도 당장은 칼자루는 오바마가 쥔 셈이다.

Don Relyea, CC BY https://flic.kr/p/7zDV2K
Don Relyea, CC BY

공화당의 딜레마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오바마가 임명을 강행하면 아예 인사청문회도 하지 않겠다고 배수진을 쳤지만, 이번 11월의 선거는 대통령만 뽑는 게 아니다. 만약 오바마가 온건 진보 정도로 양보해서 임명을 하는데도 공화당 의원들이 반대해서 청문회가 열리지 못하면, 그것을 주도한 의원, 혹은 공화당은 무조건 반대만 하는 사람(obstructionist)으로 낙인이 찍혀 의원 선거는 물론, 대선에도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의 주장대로 오바마가 임명을 연기하거나, 오바마가 임명한 대법관을 비준해주지 않아서 다음 대통령에게 임명권이 넘어가도 문제다. 대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만약 민주당 대통령이, 그것도 집권 초기에 가장 힘이 막강한 시점에 대법관을 임명한다면 이념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판사를 임명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화당 일각에서는 어쨌거나 불리한 시점이니 타협을 거부하지 말고 오바마와 타협을 통해 온건 보수의 대법관을 얻어내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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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항상 정말 감사하게 보고 있어요! 미국 대선도 대선이지만, 다른 미국 정치이야기들도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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