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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보임’을 전복하다 (상): 올랭피아, 세상의 기원 그리고 로베르티

미술사에서 당대에 파란을 일으켰던 작품 중 [올랭피아]라는 품명이 붙은 것이 있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1863년 작으로 이 작품은 당시 기법이나 표현 등에서 세간에 회자하였다. 물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내용은 대부분(거의 전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난 일색이었다.

마네 올랭피아

마네, 올랭피아(Olympia), 1863년 작 (퍼블릭 도메인)

‘본다’는 행위의 주체성과 시각

당시 이런 비난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어째서 그토록 이 그림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던 것일까? 이 질문은 우리가 ‘본다’는 행위의 주체성과 시각이 형성하는 권력구도에 관해 의미 있는 화두를 제시한다.

‘본다’는 행위로 인간은 ‘자아’를 형성한다. 물론 다른 감각도 이에 기여하나, 시각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직접적이다. 정신분석학적 전통에서 자아의 형성은 타자와 자신을 구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즉, 자아 형성은 주체성 확립과 같은 말이다.

이때 ‘봄’과 ‘보임’ 사이에는 주체성과 객체성이라는 모종의 대립관계가 성립한다. 이 대립관계는 자아와 타자 간의 본질적인 권력 구도를 형성한다. 마네의 [올랭피아]로 돌아가서 좀 더 살펴보자.

[올랭피아] [세상의 기원]이 전복하는 주체와 객체

[올랭피아]는 주체성과 객체성을 전복한다. 당대 여성은 ‘보는 사람’이 아닌 ‘보이는 사람’에 해당했다. 더구나 그림의 모델이 된 실제 여성은 매춘부였다. 성적 소비 대상은 될지언정 소비 주체는 되지 못하였던 셈이다. 시각성의 측면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림 속 올랭피아는 오로지 손님을 기다리며 시각의 객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보일’ 수밖에 없었던 올랭피아는 관객을 민망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것은 도발이다. 지금껏 시각의 객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 그중에서도 특히나 성적으로도 재화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이 주체가 되어 온 관객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시각의 주체는 언제나 남성이었고 관객이었던 것이 순간 뒤집힌다. 익숙해진 관습이 공격받을 때 어깨춤을 추며 좋아할 사람은 없다.

올랭피아

마네, 올랭피아(Olympia) 부분 그림

당시 사람들에게는 묵계와도 같았던 시각 구도의 전복은 윤리적 불쾌감으로 번졌고, 그것이 당시 비난 일색이었던 비평의 원천이라 할 만하다.

[올랭피아]가 그려진 지 불과 3년 뒤인 1866년,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 세상에 나온다. [올랭피아]로 인해 빚어진 파란을 생각하면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제작된 [세상의 기원]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을지는 뻔한 일이다.

쿠르베 세상의 기원

쿠르베, 세상의 기원, 1866년 작 (퍼블릭 도메인)

시각에서의 이러한 권력관계가 150년이 지난 오늘에는 사라지고 없을까? 그렇지 않다. 시각이 본질적으로 자아 형성에 간여하는 기능을 한다면 이것을 성별 구도로 환원해 모두를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부당할지 모르나, 적어도 특정 영역에 한해서는 여전히 시각의 권력관계가 공고하다.

2014년 5월, 로베르티의 퍼포먼스

2014년 5월 말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룩셈부르크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비주얼 아티스트 데보라 드 로베르티의 퍼포먼스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앞에서 자신의 음부를 드러냈다. 관객 중에는 박수를 치는 이들도 있었고, 더러는 당혹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술관 안전요원은 쿠르베의 작품이 전시된 곳을 비울 때까지 로베르티의 앞을 가로막아 관객들이 보지 못하게끔 하기도 했다.

로베르티

로베르티의 퍼포먼스를 가로막은 오르세 미술관 직원

우리나라에서도 소식을 접한 이들은 적지 않다. 소셜 서비스상으로 공유되기도 했으니 찾아보기도 어렵지 않다. 그중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이 예술가의 퍼포먼스에 찬사를 보내기보다 당황스러움이나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으리라. 터부라곤 눈곱만치도 없다는 소릴 듣는 내 주변 사람들만 해도 당장 “그래도 그건 좀 아니”라고 말할 정도니까.

이 퍼포먼스에 대한 당황스러움 내지는 불쾌감의 정체는 바로 앞서 말한 시각의 권력 구도와 관계가 있다.

주어진 주체성 vs. 획득한 주체성

로베르티의 퍼포먼스가 보여주는 의미를 알기 위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은 아마도 “왜 그는 쿠르베의 그림 앞에서 그랬을까?”일 것이다. 이 질문을 검토함으로써 로베르티의 퍼포먼스가 지니는 의미를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진 여성의 음부와 실제로 보이는 여성의 음부, 무엇이 그 차이일까?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쿠르베의 그림과 성인물에서 보이는 음부 간의 차이이다. 성인물에서 보이는 것은 분명 ‘보이기 위해’ ‘찍힌’ 대상이요, ‘본다’는 행위의 주체에게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완전한 수동태를 띠고 있다. 이와 달리, 시대는 다르나, 쿠르베의 그림에 나오는 음부는 숨어있던 여성의 신체 부위가 쿠르베에 의해 ‘발표’됨으로써 ‘일정한 주체성’을 획득한다.

‘일정한 주체성’이란 온전한 주체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지점이 바로 로베르티의 퍼포먼스와 쿠르베의 그림 사이에 놓인 차이가 발생하는 곳이다. 쿠르베가 비록 숨어있던 여성의 음부를 자기 작품에 담음으로써 주체성을 부여했다고는 하나, 이 그림 속 음부의 주체성은 ‘주어진’ 주체성일 뿐 그것이 온전할 것은 아니다.

숨어야 했던 객체가 주체를 획득하다

다시 말해 쿠르베에 ‘의해’ 이 음부는 일정 정도의 주체성만을 획득하는 것이다. 배경지식이 없는 한 그림만으로는 그것이 누구의 음부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실제로 미술비평에서 [세상의 기원]은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작품으로 다뤄지곤 한다. 이러고 보면 그림 속 음부가 공공의 영역에 그 얼굴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보이는’ 위치에 놓였다 할 수 있다.

반면에 로베르티는 철저하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음부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보이길’ 기다릴 줄만 알았던 것이 세상을 향해 스스로 드러나며 시선의 주체에서 객체가 된다. 공공의 영역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늘 숨어있는, 관습적 윤리에서는 숨어야만 했던 것이 스스로 자신을 내보이는 순간 사람들은 순식간에 시각적 전복을 경험한다.

이것이 로베르티의 퍼포먼스로부터 일부(라기엔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당혹감 내지는 불쾌감의 정체랄 수 있다. 요컨대 로베르티는 자신의 음부를 세상에 내보임으로써, 음부를 통해 세상을 보는 주체가 된다고 말함직하다.

우리의 시각적 ‘대상’은 마땅히 ‘객체’인가?

예술 영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당연하게도) 직접적인 메시지보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가져봄이 어떠한가 하고 넌지시 묻는 방식을 취한다. 로베르티가 이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그래서 ‘다들 아래를 벗고 다니자’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비아냥이라도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비웃어 줄 의무는 충분하다.

로베르티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 우리가 암묵적으로 판단하는 ‘시각적 대상물’이 정말 ‘대상’에 그쳐야 하는지 의심해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로베르티가 쿠르베의 그림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인 이유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우리가 ‘시각의 객체가 된 것들은 정말 객체로 됨이 마땅한지’를 묻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예술가의 퍼포먼스가 보여주는 다른 하나는 그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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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윤
초대필자. 대중예술인

전산과 전산수학을 공부했다. 만화로 전향한 뒤 카툰과 웹 일러스트레이션, 게임 원화 등을 하며 여러 분야에 촉수를 두고 독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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