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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쳐지지 않는 세상을 이해하기

안희정 무죄 판결 이후 여러 사람들이 이 사태에 관해 쓴 글을 읽었다.

그러다 내 고등학교 시절 일화가 떠올랐다. 남녀공학에, 남녀합반까지 했던 고등학교에 다녔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성 친구들도 있었다.

변태를 봤다고? 

어느 날,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한 친구가 이런 말을 꺼냈다. 우리가 자주 다니는 이 길에서 변태를 목격했다고. 검은 차를 탄 남자가 창문을 내리더니 길을 묻더라고. 그래서 대답해주려고 차 안을 들여다봤고, 차 안에 탄 멀쩡하게 생겼던 남자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고.

2년을 제외하면, 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그 당시까지 같은 동네에 살았다. 친구가 말한 그 길은 내가 수없이 지나갔던 길이다. 대낮에도, 새벽에도 항상 지나다니던 길이었다. 그래서 난 그 친구의 말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바바리맨은 도시전설일 뿐, 지어내지 말라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 같다.

변태 바바리맨

그러자 그 친구는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일 뿐, 여자들은 이런 경험이 다 있다고 했다. 본인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고. 믿기 어려웠다. 같은 길인데, 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을까?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내 앞에는 나타나지 않은 걸까?

확인 

그래서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반 친구들, 후배들, 등등 주변에 알고 있는 여성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냐고.

대답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부터, 엘리베이터 안, 계단 등등. 항상 내가 다니던 그 길에서 그들은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번 어쩌다가 겪는 일도 아니었다. 매우 일상적으로 겪고 있었다. 그때 우리 나이 16살, 17살이었는데.

그제야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전혀 겹쳐지지 않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보다 두 배는 더 살았지만, 아직도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랑 비슷한 나이의 여성은 그때보다 두 배 이상의 경험을 했을 테고.

변태 추행 성추행

같은 세상, 하지만 전혀 겹치지 않는 세상 

이후 살아오면서, 여성들이 이런 변태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차별적인 경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겪은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겪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지만, 전혀 겹쳐지지 않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깨닫게 됐다.

그래서 이번 판결을 보고, 찬성 의견을 던지는 남성 관점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어떤 경험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고, 미디어나 지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듣는다면, 이는 어딘가 상상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고.

왜냐하면, 일어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수없이 비슷한 일을 겪어 왔고, 앞으로도 겪을 것이 자명한, 그런 사람들에게 이번 판결은 현실 그 자체다. 언제든 사회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상황에 놓일 (혹은 이미 놓였던)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잠자코,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왜 판결이 나온 당일 법원 앞으로 가 집회를 열었는지, 또 며칠이 지난 오늘도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지도 이해가 된다.

왜 여성들이 안희정 판결에 분노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세계에서 산다. 그 세계는 두렵고, 불안하다.

왜 여성들이 안희정 판결에 분노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세계에서 산다. 그 세계는 두렵고, 불안하다.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vs. 앞으로도 계속 만날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보면, 그때의 난 내 친구들이 그런 일들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꽤 분노했다. 그들은 어렸고, 그래서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바바리맨을 만나보려고, 그래서 직접 변태를 잡아보려고 다양하게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만날 수가 없었다. 아니,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지나다니던 길에 있던 그 남자들이 내 앞에서는 그냥 어떤 아저씨, 동네 형이었겠지만, 내 친구들에게는 변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도 만날 수가 없을 것이다. 변태도. 안희정도. 그리고 여성들은 앞으로도 계속 만날 것이고.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부터가 현재 한국 여성의 심정을 이해하는 시작점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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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진혁
슬로우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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