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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꾸고 깼다. 새벽 네시 반. 결국 아이가 하나 꿈에 나왔다. 나는 알겠다고 잠결에 중얼거리다 내 자신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지난주부터 4월 16일 이후 기사들을 다시 본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이야기하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궁금했다. 날짜순으로 기사를 나열하고, 기사를 추리고 주제를 뽑았다. 오늘도 저녁 내내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 악몽을 꿨다. 전에도 세월호와 관련해서 꿈을 꾼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이런 ‘무서운’ 꿈은 아니었다. 단지 눈을 떴는데 천천히 방 안에 물이 차오르는 꿈이었다. 눈을 뜨니 어스름하니 새벽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고, 그 빛이 푸른 색이라 소름이 돋기는 했다. 그때는 그냥 모든 게 허무해서 가만히 누워있었다.

오늘은 꿈에서 깨 울었다. 아이가 내게 뭔가를 부탁했고, 나는 알겠다고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중얼거렸다. 그리고 무서워 전등을 켰다. 아이는 날 흔들어깨우곤 노래를 꺼달라고 했다. 무슨 노래였더라. 아이들이 장기자랑을 위해 연습했다던 노래였나.

지난 주 후지TV는 고등학생 두 명의 증언을 토대로 세월호 참사를 재구성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냈다. 윤아(가명)가 함께 장기자랑을 준비했던 친구들 얘기를 했다. 절친이었던 세 친구. 그 중 두 명은 윤아와 함께 살아나오지 못했다. 아마 날 흔들어 깨우고 “노래 좀 꺼줘”라고 했던 그 아이는 돌아오지 못한 아이 중 하나였을 것이다.

Courtney Carmody, CC BY SA
Courtney Carmody, CC BY SA

세월호 참사 이후 시간이 흐르고 점점 감정과 꿈의 형태가 달라졌다. 처음엔 허무했고, 안타까웠고, 내게도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며 막연히 불안했다. 방 안에서 조용히 물 속에 잠겨가던 4월의 악몽은 그런 감정의 반영이었다. 분노하고 절망하던 여름엔 꿈도 별로 꾸지 않았다. 잠들기가 어려웠을 뿐이었다. 이젠 무서운 감정이 가장 먼저 앞선다. 죄책감으로 공포가 찾아온다. 우리는 다같이 죄짓고 있다. 그래서 무섭다.

우리는 길을 잃었다. 분명히 제대로 길을 찾으려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가장 어려운 길목에서 조타 방향을 순식간에 틀었다. 그리고 그 안에 실린 수많은 탐욕의 무게가 배를 기울게 했다. 곧 벌어질 상황은 뻔하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구해야할 뿐이다.

4월, 언론은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 

배가 침몰하는 것을 모두가 생중계로 봤다. 그게 4월이었다. 그 때 우리는 왜 구하지 못하냐고 물었다. 배를 튼 사람이 누구냐고, 선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언론은 말해야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 세월호 선내방송만도 못하다며 욕을 먹었다. 막내기자들은 울었고 보도국장은 윗사람을 탓했다. 잔인하고 슬픈 4월이었다.

5월, 희망을 보고 싶었다… 유족의 자살 시도가 줄을 이었다 

5월엔 지쳐가는 팽목항을 봤다. 그래도 그 안에서 희망을 보고 싶었다. 감동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그래도 아직 우리 서로 토닥일 힘은 있다며 자위했다. 이제라도 단디 챙기자며 구명조끼를 찾아 입었다. 사회 곳곳에서 ‘안전’을 되찾자는 목소리가 넘쳤다.

버스에서 서서 가지 말자. 지하철 사고를 점검하자.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자. 그런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아이들이,엄마들이,대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 괜찮아질 것 같았다. 야당도, 대통령도 금방이라도 우릴 구해줄 것처럼 고무보트를 가까이 댔다. 그러나 그들은 주변을 맴돌다 그냥 떠났다. 유족들 자살 시도 소식이 줄을 이었다

6월, 선거가 있었고 대통령은 ‘분열’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6월엔 선거가 있었다. 선거는 금방 끝났다. 세월호 이후 한달, 다들 세월호 때문에 굶어죽겠다며 ‘민생’이 본격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대통령은 분열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5월부터 시작된 집회 과잉대응은 점점 심해졌다. 반상회를 열어도 유병언을 잡을 수가 없었다.

7월, 여당은 뻔뻔했고 야당은 무능했으며 대통령이 7시간 동안 사라졌다고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7월, 국회가 시끄러웠다. 대학에 특례입학을 하네마네 지원이 몇 가지네 떠들자 사람들은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여당은 뻔뻔해서 욕을 먹고 야당은 무능하다 욕을 먹었다.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어디 있었냐, 검찰은 뭘 했길래 유병언 시체만 들고 왔느냐, 댓거리를 하다 참사 후 100일을 맞았다.

8월, 유민아빠는 점점 더 말라갔고 교황이 왔다갔다   

8월엔 유민아빠가 말라갔다. 금속노조 김영오, 통진당원이었던 김영오 주치의. 잡설에 사람들은 마음이 혹했다. 아빠라는 이름을 지우려고 혈안이 돼서 벌건 칠을 덕지덕지 했다. 교황이 왔다. 다들 광장으로 교황을 보러 나왔다. 마음이 누그러진 사람들은 잠시 ‘화합’을 말했다. 그리고 교황은 떠났다. 다시 제자리로.

유가족들은 여전히 광화문에 있었지만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살갑지 않았다. 누군가는 농성장에 소변을 누고 도망갔고, 추모 현수막을 찢거나 노란 리본을 뜯어내는 테러도 벌어졌다. 조롱이 본격화했다. 유가족들은 십자가를 지고 팽목항까지 걸었다. 단원고 생존 학생들도 시민들과 함께 걸었다. 걷고 또 걷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몸으로 풀어내기 위해 계속 걸었다.

9월, 대통령은 모욕당했다고 윽박지르고 일베는 치킨을 뜯었다 

9월. 450만 서명을 들고 삼보일배를 했다. 유가족이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해도 그 자리에서 아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모욕을 당했다고 말했고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며 세월호에서 발을 뺐다. 일베는 미쳐서 치킨을 뜯고 초코바를 뜯었다.

이쯤 되니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국회의원과 유가족이 대리기사를 폭행했다는 사건이 접수됐다. 이젠 누가 뭘 잘못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앞으로 대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누구 편을 들지, 그 명분은 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방황하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봐야 한다. 어디서부터 방향을 잘못 틀었는지, 우리가 똑바로 가고 있었던 때는 언제인지. 나라를 못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다.

다들 길을 잃고 죄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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