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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정치인인 울산 택시기사 김창현 님은 하루하루 겪은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연재합니다. 이 택시 일기를 필자와의 협의를 거쳐 슬로우뉴스에도 연재합니다. 택시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 만난 우리 이웃의 이야기들은 때론 유쾌하게, 때론 담담하게, 또 때론 깊은 감동으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 이야기들을 거울삼아 우리는 삶을 돌아봅니다. 그 삶의 풍경을 매주 조금씩 공들여 담아볼까 싶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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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의 택시일기

매곡 혹은 아진 등 택시 승차장의 콜 대기 장소는 일반 승객이 거의 없다. 택시기사가 아주 미묘한 심리갈등을 일으키는 때가 있다. 갑자기 손님이 나타나 아주 가까운 곳을 가자고 할 때이다. 일반적으로 기본요금 손님은 택시기사들의 경원대상이 아니다. 쉬지 않고 계속 기본요금 손님만 많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오래 기다려 태운 기본요금 손님

콜 대기 중 여러 대의 앞번호를 보내고 막상 자기 순서가 되었는데 갑자기 일반손님이 나타나 가까운 곳을 가자고 하면 표정이 좋아질 리가 없다. 매곡에서 가장 앞번호가 되어 콜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찰라,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차에 올라탄다.

“신천 버스정류장으로 가주세요.”

그러면 그렇지.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매곡 바로 앞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 그곳에서 실제 목적지의 버스를 타려는 것이다. 택시로 목적지까지 가긴 너무 금액이 많으니 나름 돈을 아끼는 서민들의 지혜라고 할 것이다.

“많이 덥죠?”
“예. 서울은 여기보다 더 더워요.”
“서울에서 학교 다니다 방학이 되어 내려왔나 보지요? 곧 개학인데 다시 올라가겠네요.”
“예.”

워낙 짧은 거리인지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신천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이때 학생이 “아저씨, 버스가 막 출발하네요. 그럼 오토밸리 도로를 따라 마이더스 고등학교 앞에까지 가주세요.” 한다.

서울에서 온 법대생

“원래 목적지가 어딘데?”
“울산대학교 병원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는 거리가 늘어나면 버스를 도중에 타도 아낄 수 있는 금액이 줄어들텐데… 물론 나야 좋지만. ”
“제가 늦어서 그런데요. 뭐.”
“그래. 서울에서 어느 대학에 다니세요?”
“연세대학교입니다.”
“와. 명문대네요. 전공은?”
“법학입니다.”
“미래의 법관을 태웠네요.”
“뭘요. 사시에 붙어야지요.”
“사시를 준비하고 있나 보지요? 요즘은 로스쿨로 많이 뽑지 않나요?”
“2017년까지 사시와 로스쿨이 공존하다가 사시는 완전히 폐지될 겁니다. 마지막 사시 세대라고 봐야지요.”
“원래 로스쿨을 만든 것은 많은 변호사와 판검사를 배출, 소수의 특권층화되어 있는 법조계를 개혁하고 보다 민주적인 법률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정신 아니었나요? 사시와 로스쿨의 차이는 어떻게 봐야 할까?”

자연스럽게 나는 말을 놓았다.

사시와 로스쿨의 차이

“제가 사시를 준비하고 있어 그런지 몰라도 사시가 훨씬 많은 공부를 하는 것 같아요. 로스쿨은 3년 동안 충분할 것 같지 않아요. 특히 우리나라는 영미법과 달리 성문법 중심이라 법조문 암기와 해석을 둘러싼 공부가 영미식 판례연구보다 선행되어야 하거든요.”
“로스쿨은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말씀?”
“제 선입견일 수 있어요. 그리고 로스쿨은 학비가 엄청 비싸잖아요? 부잣집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사시 준비하는 우리로서 위화감도 들어요. 일종의 기득권층의 전유물 같은 생각이 들어요.”
“과연 그럴까? 일반적으로 많은 국민들이 학생의 말에 동의할까? 사실 우리 눈에는 명문대의 법대생도 상당히 기득권층의 한 일원으로 보이거든.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전부 옛말이 되어 버렸잖아.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명문대에 가려면 어린 시절부터 고액과외, 해외여행 등 투자가 많이 되잖아. 요즘 싸이가 ‘강남 스타일’을 노래하던데 강남출신 명문대생이 거의 절반을 차지할걸? 대학이 계층상승의 한 기회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부자는 부가 세습되고 서민들에게 가난이 세습되는 현상이 분명 있잖아. 그러니 학생의 말은 달리 들으면 기득권층 내부의 다툼으로 들릴 수 있거든.”
“참 일리 있는 말씀이시네요. 전혀 생각도 못했네요.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에서도 서울출신들은 고교 시절 외국유학파가 참 많아요. 영어만 능통해도 막 뽑거든요. 그런 것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힘이기도 하고요. 아저씨는 목소리도 그렇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보통 기사분이 아니신 것 같아요.”
“허허 보통기사 특별기사가 따로 있나? ”

대화가 점점 무르익기 시작하는데 원래 내려야 할 곳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학생은 “아저씨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동구 울산대학병원까지 가주세요.” 한다. 아마 나하고 보다 대화를 하고 싶어진 탓일 게다.

영미법과 성문법, 배심원 제도

“아까 영미법과 우리나라 성문법 중심의 차이를 설명해 줄래?”

나도 대화에 점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영미법은 주로 판례를 중심으로 연구해요. 판례가 하나의 새로운 법이 되거든요. 우리는 판례도 연구하고 서로 사례로 들지만 결정적이지 않거든요. 같은 사안에 다양한 판단을 할 수 있어요.”
“그럴까? 소신 있게 판결하면 찍힐 텐데?”
“그런 측면도 있어요. 하지만 점점 소신 있는 소장파 판사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배심원제도에 대해서 알고 싶네. 사실 법률적 상식이 부족한 일반 시민들이 배심원을 하면서 유무죄를 결정 짓은 미국드라마를 볼 때마다 과연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더라고…”
“도리어 그 반대로 저는 생각해요. 판사는 법률문구를 많이 알고 있으나 사회경험이 짧잖아요? 반면 많은 배심원은 다양한 사회의 문제를 다 겪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경험도 많고 당연히 어떤 판단을 할 때 여러 요소가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지요.”
“아. 그런 측면이 있네. 다만 훈련이 안 된 측면과 감정에 치우칠 수 있는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을까? 대단히 아름다운 여성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피고석에 앉아 있는 경우와 우락부락한 전과자 남자가 피고석에 앉아 있는 경우 과연 배심원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또 아주 유능한 변호사가 여러 가지로 감성을 자극하면서 배심원들을 흔들어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선거 때 이성적인 공약 검증보다 당시의 흐름, 감성적 판단이 상당히 작용하듯이 말이지.”
“물론 그런 측면이 존재해요. 그래서 형사사건만 배심원을 채택하지요. 그런데 저는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요. 설령 일정 그런 위험이 존재하더라도 다수 시민이 건강하게 판단하고 법률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방식 아닐까요?”
“민주주의라. 법률의 주인으로. 야 정말 좋은 말이네. 학생이 점점 멋있게 보이네요.”

군림하지 않고 사랑받는 법관이 되길

“별말씀을 다 하세요. 사실 사법계는 무척 권위적이고 독재지요. 대법원장이 혼자 인사권을 다 가진 구조잖아요?”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다면 대법원장도 국민들이 선출해야지. 그러면 아마 법원은 엄청나게 변화를 겪게 될 거야.”
“맞아요. 군림하는 사법이 아니라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민의 사랑받는 법원이 될 겁니다.”

“의기투합이 되는군. 또 한가지! 얼마 전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이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으로 판결받고 정규직 채용의 길이 열렸는데 해고된 채 자그마치 7년을 고생했거든. 그런데 그와 같은 조건의 노동자가 수천 명이 있는데 이들은 또 똑같은 방식으로 재판을 해야 하는 상황이야. 하나의 판결이 동일 선상의 사람들을 재판 없이 살릴 수는 없을까?”
“그건 어려울 거예요.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어도 재판 없이 모두 적용되게 하는 건 다른 나라에도 없을 거예요. 내가 오랫동안 담배를 피워 폐암에 걸려 죽게 되었다. 그래서 소송을 걸어 승소했다고 해도 담배를 오래 피워 폐암 걸린 모두에게 돈을 지급하지는 않거든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집단소송이 필요하겠네요.”
“물론 지금 집단소송 중이지. 그런데 상식의 세상에서 보면 너무 억울하잖아. 불법파견임을 이미 법적으로 판명받았는데 계속 그 상태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말이지. 회사에서 알아서 이 정도 되면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이 맞겠지. 최근 현자 회사에서 그런 움직임도 보이고 노동조합도 법률소송 전에 교섭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아.”
“그래요. 사실 법보다 상식이 먼저 통용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지요. 그건 상식의 세상 같네요.”

결국, 이 친구는 18,000원의 거액을 내고 울산대 병원까지 나와 대화를 나누며 갔다. 기본요금 거리까지 택시를 타고 나머지는 버스를 타려던 계획은 나와 대화 때문에 깨져 버렸다. 택시비를 깎아 주지 못했다. 카드를 내밀기에 그냥 긁었다. 다만 이 친구와 더욱 더 알고 지내고 싶어 내 소개를 하였다. 서로 전화번호를 알아 카카오톡 친구로 등록하였다. 다음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카카오스토리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민주적 소양을 갖춘 잘 생긴 법대생. 좋은 법관이 되길 소망한다.

2012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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