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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어떤 동네에는 횡단보도 앞에서 꽃과 옥수수를 판매하시는 어떤 노인이 한 분 계셨다. 이 분은 그 동네가 처음 개발되던 시점부터 거의 45년 간 해당 자리에서 영업을 해 왔으며 동네 사람들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이 노인분이 더는 옥수수를 팔지 않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사실이었으며 실제로 이 분은 현재 꽃만 팔고 계신다. 그 이유인 즉슨 옥수수 어르신의 근처에 자리잡은 대형 슈퍼마켓인 A슈퍼가 노상에서의 옥수수 판매 중지 민원을 넣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옥수수를 팔지 못하게 되면서 어르신의 꽃 영업에도 심각한 애로사항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원래 그 분은 옥수수를 찌며 나오는 열기와 증기를 활용하여 판매할 꽃이 얼지 않게 하는 과학적(…) 기법을 통해 겨울에도 꽃을 상당히 많이 판매하셨지만, 옆 슈퍼마켓의 민원으로 인해 이제 겨울에는 꽃을 팔기가 상당히 어렵게 되셨다.

옥수수를 팔지 못하게 되자 꽃을 파는 일도 어려워졌다.
A슈퍼 주인의 민원으로 옥수수를 팔지 못하게 되자 노인은 꽃을 파는 일도 어려워졌다. 옥수수를 찌며 나오는 열기와 증기를 이용해 꽃을 얼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어르신의 옥수수를 사먹지 못하게 된 사람들 중에서는 A슈퍼 주인을 비난하는 사람도 이따금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A슈퍼 주인은 나쁜 사람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다.

드리우는 전운: 슈퍼 vs 슈퍼

때는 지난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A슈퍼마켓의 맞은편에 기업형 슈퍼마켓인 B슈퍼가 평화롭게 영업을 하고 있었던 시절로 되돌아가야 한다. 당시 B슈퍼마켓은 수천 세대에 이르던 근처 아파트 단지의 소매소비 물량을 독점할 수 있는 요지에 있었고 매출도 상당히 높았다. 게다가 B슈퍼는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또 하나의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2013년 개정 이전 유통산업발전기본법에 제시된 농산물 매출액 51% 이상 점포의 영업제한 면제 규정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변 주택가 수요를 독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랬던 독점 구도에 균열이 발생했으니, 바로 횡단보도 맞은편에 A슈퍼마켓이 입점하게 된 것이다. A슈퍼마켓도 배후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었으니 당연히 입점 시에는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A슈퍼는 B슈퍼와의 경쟁에서 계속 깨지기만을 반복했다. 심지어 A슈퍼는 24시간 영업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B슈퍼에게 참패를 거듭해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는 운명을 맞이하기도 했다. 유사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는 바로 소매 클러스터의 유무(‘한번에’ 두루두루 쇼핑)에서 유래했다.

B슈퍼는 기본적으로 주변에 다른 상가들이 존재했던 건물 안에 위치해 있었고, 이 때문에 소비자가 장을 보는 행위를 할 때 ‘병원에서 진료를 본 뒤 세탁소에서 옷을 찾고 슈퍼에서 장을 본 뒤 지하에서 빵을 구입한다’가 가능했지만, A슈퍼는 혼자 떨어져 있던 단독건물에 슈퍼만 입주를 했던지라 길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수요를 전혀 흡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A슈퍼가 배후에 끼고 있던 아파트 단지는 반대편 코너에 또 다른 상가가 있어 애시당초 수요가 분산되어 있던 곳이었다. 그렇게 이 대결은 A슈퍼의 참패로 결론이 나는 듯 하면서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A슈퍼마켓 vs. B슈퍼마켓
A슈퍼마켓 vs. B슈퍼마켓

살려야 한다 : A슈퍼마켓의 분투일기

그러나 세 번째 주인이 A슈퍼를 맡게 되면서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B슈퍼에 비해 애시당초 입지가 상당히 불리했던 것을 알게 된 이 세 번째 주인이 A슈퍼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A슈퍼가 본디 있던 자리는 주민들의 주요 통근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행 지점 하나만이 외롭게 있던 곳이었는데, 때문에 노점이 상당히 번성하던 곳이었다. A슈퍼 주인이 근처 노점상들의 영업에 대해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는 소문이 돈 것이 얼마 전 일이었다.

사실 A슈퍼 사장 입장에서는 속이 터졌을 것이다. 슈퍼에서 멀쩡히 판매하는 물건과 같은 품목을 코앞에서 노점상들이 판매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엄연히 대한민국의 모든 노점은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모든 상행위는 아주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하고는 일정한 규모를 갖춘 실내에서만 영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노점과의 협상 끝에 A슈퍼는 노점들에게 월세의 형식으로 권리금 명목의 돈을 받는 대신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계속하게끔 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자기 땅도 아닌 것을 권리금조로 돈을 준다 해도 문제이지만.

A슈퍼마켓은 주변 노점으로부터 권리금(?) 명목으로 돈을 받기로 합의했다.
A슈퍼마켓은 주변 노점으로부터 권리금(?) 명목으로 돈을 받기로 합의했다.

다만 옥수수 어르신의 경우 본디 매출이 A슈퍼의 주인이 요구한 만큼의 금액을 모두 주기에는 상당히 영세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때문에 옥수수 어르신은 A슈퍼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A슈퍼의 요구에 따라 어르신은 옥수수 판매를 포기하고 꽃 판매만 하게 되었다. 최근 기온이 급강하하였던 등의 이유로 한동안 영업을 하시지 못 하셨을 것임에 분명하다. 이 때 마침 길 건너편 B슈퍼가 농산물 매출액 비중이 2013년 개정 기준 법정 55% 를 하회했는지 월 2회 주말 휴무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A슈퍼에게 드디어 살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들: 경쟁이 가져다 준 효익

그렇다면 이렇게 몇 년을 이어 온 슈퍼 대전이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일까? 당연하겠지만 주변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효익이 상당히 증대했다. 처음에는 A슈퍼가 갈팡질팡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사람들이 A슈퍼에 갈 만한 이유가 없었지만, 새로 나타난 사장이 B슈퍼의 품목을 철저히 분석을 한 모양인지 일부 품목의 가격을 계절에 맞춰 B슈퍼보다 전략적으로 낮게 유지하기 시작했으며, 할인 행사도 타이밍 좋게 시시때때로 실시하면서 경쟁력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현 A슈퍼 사장은 거의 3년째 안정적으로 슈퍼를 운영 중이다.

전체적으로 주변 시민의 유익은 증대했다.
전체적으로 주변 주민의 유익은 증대했다.

그렇다면 과연 감소한 효익은 없을까? 있다. A슈퍼에서 파는 옥수수가 어르신이 팔던 옥수수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옥수수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A슈퍼와 B슈퍼가 시장의 노이즈를 배제하고 경쟁할수록 근처 주민의 효익의 총량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사실 안타깝지만, 옥수수 어르신의 영업은 애시당초 불법이었으며, 소득세를 다대하게 납부하실 만큼 매출이 좋았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세금도 45년 간 한 푼도 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반면 A슈퍼는 고용만 4~5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옥수수 가격은 올랐고, 꽃과 옥수수 파는 어르신은 피해(?)를 봤다.
옥수수 가격은 올랐고, 꽃과 옥수수 파는 어르신은 피해(?)를 봤다.

사실 감수성만 갖고 생각한다면야 A슈퍼 주인은 갈 곳 없는 노점상 어르신에게서 옥수수 판매권마저 빼앗아 간 비정한 대형 소상공인일 수 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A슈퍼 주인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신이 고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줘야 하는 사장의 입장이다. 동시에 불리한 입지 조건을 딛고 바로 길 건너에 있는 대기업 유통점포와도 맞붙어야만 한다. 게다가 A슈퍼는 정부 규제로 인한 틈을 메꾸는 역할도 한다. 대형마트 영업규제로 인한 신선농산물 조달 규모 축소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골목 전쟁, 슈퍼 대전의 교훈 

실제로 2015년 10월 한국 농촌경제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영업규제 이후 대형마트의 농산물 매입액이 연간 5~9%가량 감소하였으며[footnote]

농촌경제연구원

[/footnote], 이에 더해 주말 영업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주 후반부의 구매량을 보수적으로 책정함으로써 산지유통조직의 48.1%가 발주량이 감소하였고, 9.1%가 납품단가 인하 요구를 받았으며, 1.1%는 납품단가가 실제로 낮아졌다(김동환, 2013).[footnote]김동환·류상모, 2013. “대형 유통업체 영업 규제가 농수산업에 미치는 영향” p. 23. ‘2013년 한국유통학회 동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한국유통학회.[/footnote] 그러나 A슈퍼는 대기업 소속이 아닌지라 유통산업발전법상 주말 영업규제 대상이 아니고, 이러한 슈퍼들이 주말에 대비한 농산물 주문을 함으로써 결국 주말 영업규제로 발행한 ‘시장의 에러’를 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슈퍼 대전과 옥수수 파는 어르신의 이야기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큰 것은 나쁘다’ 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칙과 어긋나는 이념은 결국 시장에 에러만을 발생시키며, 단순히 감수성의 문제로 시장의 문제에 접근하게 되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문제가 훨씬 더 많아짐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서촌 임대료 사태나 우장창창 사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니 오해하지 말자.) 실제로 우리가 나쁘게 보는 사람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더 많은 효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대형마트 규제 이후 가장 반사이익을 본 곳은 전통시장이 아니라 농협 하나로마트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농협 하나로마트는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있어 꼼꼼하게도 반사이익을 얻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농협의 특성상 하나로마트의 농산물 판매 비율은 70%가 넘기 때문이다. 2013년 개정 법안의 농산물 매출 비율 한도가 55% 였으니 사실상 대형마트 규제는 하나로마트만 이득을 보고 이를 남은 마트들이 보전해 주는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재밌는 사실은 대형마트 규제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곳이 하나로마트라는 사실이다.
대형마트 규제로 가장 큰 반사이익을 본 곳은 전통시장이 아니라 하나로마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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