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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cap font=”arial” fontsize=”44″]‘성장’[/dropcap]이라는 것은 인류가 자본주의에 생존을 맡긴 이래 단 한 번도 최우선의 화두를 놓친 적이 없는 개념일 것이다. 경제성장(또는 발전)에 대해 수많은 이론들이 명멸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성장이 무엇이며, 성장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이어가고 있다. 아마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것 역시 성장이라는 개념이 보유한 긍정적 의미로 인해 이름지어졌을 것이다.

'성장'이라는 강력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성장’이라는 강력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7월 고용쇼크[footnote]통계청이 발표한 ‘7월 고용동향'(2018)에 따르면 취업자 증가폭(전년 대비 5,000명 증가) 8년 6개월만에 최저치를 기록함.[/footnote] 이후로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두고 이러한 논란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지나친 긴축과 최저임금 인상을 멈추고 이제 성장에 힘을 쏟아야 할 때라고 모두 한목소리로 외친다. 사실 흠 잡을 데 없는 논리다. 많은 사회 문제는 경제 성장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국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은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플랫폼을 무기로 하는 2010년대 후반의 신경제는 제조업 중심의 경제와는 달리 그 그림자가 길고도 깊다. 산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괴적 혁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멋진 껍데기를 보여 주지만, 그 뒤로는 기존 산업과의 경쟁 증가로 인한 고용 불안정과 소득 감소를 유발할 수 있다. 우버 이야기를 계속 하지만, 택시는 타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모는 사람들도 노동자다.

택시 우버

누군가는 통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통일이 되었을 때 과연 구 북한 거주민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2등 시민’ 또는 ‘값싼 노동력’ 이상의 동등한 그 무엇으로 대하기는 할지 의심스럽다. 현재 독일의 극우(AfD)·극좌파(좌파당) 득세는 근본적으로 구 동독 지역의 서독 지역과의 심각한 소득 격차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구 동독은 소련식 공산주의이기나 했지, 일개인을 ‘최고 존엄’ 으로 모시는 나라와의 융합은 몇 배로 힘이 들 것이다.

누군가는 SOC(사회간접자본), 토건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토건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성장 정책이 아니라 이제 국가를 관리하기 위해, 또는 경기 변동성을 축소하기 위해 운용하는 관리적 정책이다. 고정자산투자로 경제 성장을 이끌어 나가려 들다간, 그 고정자산이 자리를 잡고 난 후 발생하게 될 어마어마한 감가상각비와 유지·보수 비용은 토건을 외친 사람들의 자녀들이 세금으로 감당하게 될 것이다. 또한, 토건 비용의 상당수는 원주민에 대한 토지보상비로 지급되기 때문에 공평한 자본 배분 상에서도 조심해서 써야 한다.

누군가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가뜩이나 저임금으로 유지되던 사회에 적절한 사회 안전망 없이 노동시장부터 유연화시키면 대한민국은 마찰적 실업자[footnote]마찰적 실업(摩擦的失業, frictional unemployment): 노동자들이 직업을 구하거나,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에서 비롯되는 실업. (위키백과)[/footnote]로 넘쳐 흐르게 될 것이다. 빚을 내서 집을 사는 나라에서 잦은 실업은 곧 부채 상환의 불능으로 인한 홈리스로 연결될 것이고, 홈리스와 실업자가 많은 나라에 필연적으로 뒤따라 오는 것은 도시 슬럼화다. 도시 슬럼화는 대책없는 범죄의 증가를 가져온다.

가난

또 누군가는 관광 산업의 발전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가 소위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표되는 새마을 운동식 개발로 관광 자원을 상당수 소멸시켰다는 것은 둘째치고, 관광 산업의 발전이라는 것은 내수의 구멍을 관광객으로 메우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환율의 약세가 어느 정도 필요하며 이는 내국인 물가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내수를 해외로 이전할 경우, 2016년 사드 사태에서 다들 배우셨겠지만 오히려 경제의 리스크 요인이 증가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가 이야기하는 성장의 담론이라는 것은 결국 어느 한쪽의 입장만 대변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성장 정책이라는 것은 이제 없다. 한계 성장 제로 시대의 정책은 결국 이해관계 충돌의 조정을 필연적으로 동반해 가면서 시행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스운 것은, 최저임금의 70% 에도 못 미치던 금액으로 노동을 해 본 사람으로써, 지금 뭇 사람들이 자영업자들에게 바치는 관심의 1% 라도 생활임금은녕 최저임금 미만 노동을 하는 청년들에게 바쳤었는지 궁금하다.

결국, 우리가 정말로 고민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정책들의 칵테일을 만들 때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이다. 최저임금 올린다고 정부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5시간을 일해도 삼겹살 일 인분 사 먹기 어려웠던 청년들도 수두룩하다. 서울 시내에 부동산을 보유한 중산층 이상 전문직·대기업 종사자가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담론은 앞으로 점점 힘이 감소할 것이다. 성장에 집착하기보다는 갈등의 해소에 관심을 보여야 하는 이유다.

https://flic.kr/p/aoUsU Martin Playing With Pixels, CC BY SA
Martin Playing With Pixels, CC BY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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