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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에르도안이었나: 3. 마을은 4만 개, 전등은 10개

¶. 이 글은 ‘케말이 쏘아 올린 6개의 화살’에서 이어집니다.

 

 

1943년 11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 다섯 명 중 세 명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모였다. 각각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영제국 수상 윈스턴 처칠,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나머지 둘은 일본 제국의 도조 히데키 총리와 독일의 히틀러 총통이었다. 사실상 세계 전체가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지 않은 편과 참석한 편으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었다.

테헤란 회담(1943. 11. 28~12. 1.)

테헤란 회담(1943. 11. 28~12. 1.).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스탈린의 강력한 요청에 의한 ‘제2전선’이었다.

전황은 테헤란에 모인 쪽에 더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추축국의 엄청난 기세에 비하면 놀라운 반전이었다. 폴란드로 시작해 프랑스, 발칸반도를 전광석화처럼 접수한 독일군은 모스크바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중국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진주만을 기습공격 했고, 태평양의 섬들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싹쓸이 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같은 중요한 반격들이 이어지면서 점점 전세는 추축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제2전선은 어디에

테헤란 회담이 열리기 4개월 전인 1943년 7월에는 유럽 전선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를 접수한 것이었다. 서방 연합군은 드디어 유럽 대륙으로 가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사건이 훨씬 중요했다. 쿠르스크로 몰려들어오는 독일군의 대공세를 소련군이 저지해낸 것이다(쿠르스크 전투).

두 전투가 갖는 중요성의 차이는 병력 규모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시칠리아 전투에서 연합군과 추축군은 각각 16만 명과 2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여타 전쟁이었다면 이것도 굉장한 규모였겠지만,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과 소련은 인류 역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병력 80만 명과 전차 2,900대를 쏟아부었다. 이에 맞서는 소련군은 병력 200만 명과 전차 5,100대로 맞섰다.

독일군 제2SS기갑사단 병사들과 티거I 전차.

쿠르스크 전투(또는 성채 작전)을 위해 진군하는 독일군 제2SS기갑사단 병사들과 티거I 전차.

프로호로프카 평야에 세워진 기념비 (출처: Voyagerim, CC BY SA 3.0)

소련군은 프로호로프카 평야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 역사적인 전투를 기억하기 위해 프로호로프카 평야에 세워진 기념비 (출처: Voyagerim, CC BY SA 3.0)

이 두 전투의 차이는 테헤란 회담에서 누가 가장 큰 발언권을 쥐게 될지를 보여주었다. 천만 명의 붉은 군대를 독일 전선에 쏟아붓던 스탈린이었다. 그는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소련이 더는 손실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고 얘기했다.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돌아섰다고 해도 독일군은 여전히 강력했다. 스탈린은 동부전선 반대편에서 독일군을 감당해줄 새로운 전선, 즉 ‘제2전선’을 열망했다. 일부 독일군이 제2전선으로 빠진다면 붉은 군대가 독일군을 상대하는 것도 조금 더 편해질 터였다.

삼거두(三巨頭)는 제2전선의 개시 일자와 장소를 놓고 토론했다. 개시 일자에 대한 합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대략 6개월 후, 그러니까 1944년 6월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장소가 문제였다. 스탈린은 북프랑스에 상륙하여 독일의 가장 중요한 후방지대를 접수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처칠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대영제국의 운명을 생각했던 처칠은 지중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중해 항로는 지브롤터에서 시작해 몰타를 거쳐 수에즈 운하로 이어졌다. 수에즈 운하만 통과하면 곧장 제국의 가장 중요한 영토인 인도로 가는 길이 열렸다. 처칠 입장에서는 제국의 생명선에서 영향권을 재확인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작전은 지중해에서 벌어져야 했다. 처칠은 얼마 전 시칠리아 상륙으로 교두보가 생긴 이탈리아 쪽이 독일의 “부드러운 아랫배”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이 옳았다

스탈린과 처칠의 논쟁이 이어졌다. 스탈린은 “북프랑스 상륙이 1944년에 진행될 작전의 전반적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만약 로마를 해방시키고 거기의 독일군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으로 시작되는 낙관적인 작전계획을 내놓았다.

소비에트의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 동지

스탈린은 ‘북프랑스 상륙’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판단은 옳았다.

스탈린은 단호했다. 북프랑스가 먼저, 이탈리아가 나중이었다. 루스벨트는 둘 사이를 중재하느라 진땀을 뺐으나 이미 심정적으로는 스탈린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있던 차였다. 만약 연합군이 북프랑스를 해방시킨다면, 미군이 지원하는 자유프랑스군이 지중해와 남프랑스에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 처칠이 터키를 꺼내들었다. 터키가 군대와 결정적으로 비행장을 제공한다면 이탈리아에서의 작전은 엄청나게 쉬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이 다시 가로막았다.

“그 작전들은 모두 터키가 참전하면 가치 있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제2전선은 북프랑스에 전개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처칠의 패배였다. 그 작전은 이후 “오버로드 작전” 혹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다.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사진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사진

테헤란 회담이 끝난 뒤 처칠과 루스벨트는 카이로로 향했다. 처칠이 터키 대통령인 이스메트 이뇌뉘를 초청해서 카이로에서 회담을 진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처칠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터키는 참전할 생각이 있는가?”

그리고 스탈린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이스메트 이뇌뉘는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할 생각이 없었다.

중립의 이유

사실 터키는 지정학적으로 전쟁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만약 터키가 연합군편으로 참전한다면, 처칠의 말대로 독일은 “부드러운 아랫배”를 노출하게 되는 셈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항공력이 터키에서 출발해 더 깊숙히 독일 각지를 폭격할 수 있었다. 발칸 반도도 위험했다.

반대로 터키가 추축국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국의 지중해 통제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 틀림했다. 거기에 설상 가상으로 캅카스 쪽이 노출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터키로 들어간다면 히틀러가 염원하는 바쿠의 석유도 손쉽게 얻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터키는 어느 편으로도 참전할 개연성이 있었다. 터키는 제1차 세계대전에는 원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줄곧 터키를 괴롭히던 나라였고, 독일은 이 두 나라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연전연승하고 있었다. 만약 터키가 독일을 지원한다면 지중해에서 영향력을 회복하고 튀르크인들이 사는 소련의 아제르바이잔과 중앙아시아도 장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반대로 연합군을 지원할 명분도 있었다. 어쨌든 터키 공화국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과격한 파시즘과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파괴하고자 했던 국제연맹과 더 가까웠다. 그리고 전후 세계에서 미국은 터키에게 상당한 원조를 해줄 수도 있었다.

터키의 지정학적 위상이 아주 중요했다.

터키는 지정학적으로 전쟁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터키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기로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고통을 겪은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또 다른 세계대전에 다시 참가하는 건 과거의 영광을 헛되이 좇는 부질없는 짓일 공산이 컸다. 만약 연합국에 비행장을 지원한다면 발칸 반도를 한 번에 관통해버린 독일군이 아나톨리아로 진격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반대로 추축국에 가담했다면 터키 본토가 연합국 공군에게 쑥대밭이 될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런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터키가 중립을 계속 지킬 것이라고 확언한 것이었다. 터키도 막바지에는 선전포고를 해야만 했다. 전쟁 막바지에 얄타에 다시 모인 연합국 삼거두가 새롭게 창설될 국제연합(UN)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터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끝까지 총 한 번 쏘지 않았다.

이뇌뉘 대통령은 유럽 분쟁에서는 중립을 지키라는 무스타파 케말의 유지를 그럭저럭 잘 이어갈 수 있었다.

무스타파 케말(좌)과 이스메트 이뇌뉘 (우). 

무스타파 케말(좌)과 이스메트 이뇌뉘 (우).

냉전의 폭풍 속으로

좀 더 본격적인 대외적 도전은 오히려 전쟁이 끝난 후에야 쏟아져나왔다. 사실 문제의 본질 자체는 어찌보면 굉장히 전통적인 것이었다. 200여년 가까이 터키를 괴롭혀온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다시 유럽의 초강대국으로 귀환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파죽지세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발칸 반도를 다시 접수했다. 전쟁 수행을 원활히하기 위해 전쟁과는 전혀 상관 없던 이란 북부도 소련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사실 바로 그게 테헤란에서 회담이 열렸던 이유기도 했다. 터키가 보기에 스탈린은 과거 남하정책을 열렬히 펼치던 러시아 제국의 차르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에 상당히 부합했다.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에서 보스포러스, 다르다넬스 해협을 다시금 국제통제 하에 두고 소련군 요새를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술 더 떠서 러시아 혁명 때 상실한 영토인 동부 카르스아르다한도 다시 돌려받아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이 지역들은 본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가 스탈린이 태어난 해에 러시아 제국이 가져간 영토였다. 스탈린은 젊었을 적 이 지역들에서 은행강도 활동을 벌였었으니 자연스럽게 수복해야만 하는 러시아 영토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아제르인, 쿠르드인이 주로 살던 이 지역들은 스탈린이 보기에는 소련에 들어오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터키의 아르다한 주와 카르스 시

터키의 아르다한 주와 카르스 시

이는 무려 ‘독립 전쟁’을 통해 국가를 재건한 터키 입장에서는 경악할만한 노릇이었다. 터키 영토의 주권은 단 한치라도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 없었다. 그게 전통적인 주적이었던 러시아라면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인접국인 그리스에서도 공산주의 반란군이 정국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물론 스탈린은 그리스를 영국에 넘겨주기로 이미 합의하고 있었다).

터키는 국제질서가 새로운 국면, 즉 냉전에 돌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의 ‘야욕’을 막기 위해서라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미국이었다. 스탈린을 의심하던 신임 트루먼 대통령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는 1947년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정권을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으로 돕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렇게 이뇌뉘는 제2차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도전을 나름대로 처리하면서 아타튀르크가 물려준 나라를 지켰다. 사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그런 곤경 속에서도 대외환경은 터키에게 비교적 우호적으로 돌아간 편이었다고 하겠다. 이뇌뉘가 아니었더라도 상식적 판단력을 가진 지도자라면 누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을, 냉전에서는 친미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도전이 점차 수그러들자 곧바로 국내 문제에서 도전이 정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스메트가 왔고, 기회는 꺾였다”
“Geldi Ismet, kesildi kısmet” 

제2차 세계대전은 진정 비상사태였다. 따라서 국내에서 불만을 가진 세력이 있더라도 함부로 정부에 도전할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빈틈을 보이면 언제 연합국이나 추축국 같은 외세에 개입할 빌미를 쥐여줄 수 있었다. 터키 정부도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세상이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불만 폭발을 미룰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국내의 불만이 수면 위로 떠 오른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불만을 가진 사람은 당연하게도, 케말리즘에 의해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인구 80%를 차지하는 농촌의 소농이 그 주역이었다.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지 거의 30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국민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어떤 발전과 향상도 누릴 수 없었다. 근대화의 다양한 지표들은 농촌이 사실상 체계적으로 방치되었음을 보여준다. 1953년, 터키에는 4만 개의 농촌 마을이 있었다. 그 중에서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은 단 10개에 불과했다. 1923년부터 1943년까지 터키의 전력 생산이 10배나 증가했는데도 그랬다. 전력 생산량의 80%가량은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의 3대 도시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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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터키. 40,000개의 농촌 마을. 전구가 들어오는 마을 수는 단 10개.

그 밖의 다양한 사회집단들이 정부에 대한 불만을 외치기 시작했다. 농민 다음은 노동자였다. 터키의 산업 발전이 미약했기 때문에 노동자 수도 적었지만, 터키가 근대화를 향해 나아갈수록 계속 성장할 계층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국제무역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힘겨운 생활조건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여전히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실행할 기본적인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전쟁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정부가 무리하게 군대를 증강했기 때문에 경제 전체에 무리가 가고 있었다. 정부는 부족한 예산으로 군사비를 지탱하고자 화폐를 찍어댔고. 이후 터키를 수십년 간 괴롭힐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되었다. 이로써 케말주의 정부의 중요 지지그룹이었던 공무원도 지지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정부에 수입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그들인만큼 통화가치 하락과 구매력 감소는 특히 치명적이었다. 정부는 토지개혁을 다시 입안하고 농산물 세금을 인상하면서 대지주에게도 불만을 샀다.

다당제 민주주의를 향하여

1945년에 이스메트 이뇌뉘는 전국적으로 불만이 팽배하고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걸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국민적 불만을 잘못 관리했다가 혁명을 초래하는 사태를 결코 원치 않았다. 만약 그런 비상사태가 벌어진다면 소련에 개입할 명분을 주는 꼴이 될 것이었다. 터키에 필요한 것은 불만을 흡수할 적절한 개혁조치였다. 그리고 확고히 ‘자유진영’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으니만큼 터키가 택할 개혁조치도 명백했다.

사태는 급전진되었다. 발단은 1945년에 5월에 의회에서 논의된 토지개혁법이었다. 정부는 대지주의 토지 과점을 제한하고 소농에 더 많은 토지를 제공해서 불만을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제 세계대전도 끝나가는 와중에 공화인민당 당내에 진출한 대지주들이 참고만 있을 이유도 사라졌다. 그 자신이 아이든의 지주였던 아드난 멘데레스가 반대파를 조직했다. 그는 토지개혁이 농업을 잘게 쪼개서 비효율만 양산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정부가 너무 권위주의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비판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 법안은 어쨌든 통과되었다. 아직까지 공화인민당 체제는 굳건했다. 그러나 불만을 품은 멘데레스는 내친김에 정부 구조를 좀 더 민주적으로 개편할 요구안들을 제출했다. 아드난 멘데레스, 젤랄 바야르, 레피크 코랄탄, 푸아드 쾨프릴뤼의 사인방이 그 주역이었기에 이는 ‘4인 제안서(Dortlu Takrir)’로 불렸다. 요구안들은 부결되었지만, 이뇌뉘 대통령은 국내에 팽배한 반발심과 대외적 위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터키 정부는 이후 치러질 1947년 선거는 다당제 자유선거가 될 것임을 명시했다. 민주주의로 가는 여정에 착수한 것이다.

조화 시민 정치 칭찬 응원 사람들 협동 시민 남자 여자 여성 남성 민주주의

민주당의 부상

야당이 허용된다는 소식을 듣고 4인 제안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공화인민당을 떠나 1946년 1월에 민주당을 창당했다. 공화인민당은 처음에는 민주당 창당을 환영했지만, 곧이어 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얻은 열정적 지지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공화인민당은 1947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총선을 1946년 7월로 앞당겨 열었다. 공화인민당은 민주당이 제대로 조직력을 갖추기 전에 선거에서 우위를 잡아야 한다고 여겼다.

터키 민주당(터키어: Demokrat Parti, DP) 로고. 1946년 1월~1961년 9월까지 존속.

터키 민주당(터키어: Demokrat Parti, DP) 로고. 1946년 1월~1961년 9월까지 존속했다.

민주당은 반년 밖에 주어지지 않은 짧은 준비기간에 반발했다. 이미 20년 가까이 집권정당의 인프라를 구축해놓은 공화인민당의 조직력에 반년 밖에 안 된 신생정당이 맞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선거에 참여한 민주당은 465석 중 62석만 확보했다. 게다가 각 지방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공화인민당은 체계적으로 부정선거를 저질렀었다. 민주당으로서는 과연 공화인민당 체제를 돌파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62석이나 확보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희망적이었다.

1947년을 거치면서 처음의 우호적인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고 양당의 분위기는 점차 험악하게 변해갔다. 양당은 때로는 서로 공산주의에 우호적이라고 비난했고, 때로는 예산 문제를 두고 충돌했다. 총리를 맡았던 공화인민당의 레제프 페케르는 민주당에 특히 적대적이었고, 민주당과의 협치를 거의 전면적으로 거부했다. 민주당은 공화인민당이 말뿐인 민주주의를 시행하려고 한다면서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여전히 몇몇 법은 여당인 공화인민당에 지나칠 정도로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또 이들은 실패한 경제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심지어 민주당 지도자인 멘데레스는 아타튀르크의 국가개입주의가 파시즘과 다를 바가 뭐냐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이제 경제 개발을 위해서 사기업의 힘을 이용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양한 사회집단의 압력이 활발해진 것도 여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예컨대 1947년에 결성된 이스탄불 상인협회는 민주당을 전격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운명의 1950년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던 이뇌뉘는 격해진 의회의 충돌을 중재하기 위해 개입했다. 민주주의, 경제 자유화 정책은 미국 정부와 IMF, 세계은행이 선호하는 정책이었다. 이런 은근한 대외적 압력에 정부가 완전히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북쪽에는 여전히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레제프 페케르는 이뇌뉘의 압력에 사임했고, 좀 더 온건한 성향의 하산 사카가 총리직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공화인민당은 민주당의 경제자유화 정책에 협조하고,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하는 등 다소 호의적인 태도로 변했다. 새롭게 채택된 경제개발계획은 이뇌뉘 정부가 아타튀르크 노선으로부터 후퇴했음을 보여주었다. 정부는 중공업 우선주의에서 경공업, 소비재, 농촌기업을 지원하는 것으로 선회했다.

이와 같은 진전에 민주당은 점차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1950년 5월에 다가올 선거를 바쁘게 준비했다. 이번 선거는 30년에 걸친 공화인민당 일당지배를 끝낼 수 있는 역사적인 선거가 될 수도 있었다. 국민들이 느끼는 염증을 정확히 파악한 민주당은 그에 걸맞는 선거 구호도 만들었다. 특히 유명한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이제 됐어, 목소리는 국민의 것이다!”
“Yeter, soz Milletindir!”

물론 이스메트 이뇌뉘도 나름 준비해온 것이 있었다. 그는 세계대전 이후 국민의 불만을 감지했었고, 민주당과 협조해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었다. 터키 경제도 그에 화답하듯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좀 더 유연하게 변하기 시작한 공화인민당에 지지를 보내는 것도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그래도 선거 결과는 결국 민주당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38년부터 1945년이라는 ‘비상시기’에 봉직했던 이뇌뉘는 아무리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전시를 떠올리게 하는 지도자였다. 사람들은 이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원했다.

국민이 원하는 새로운 분위기는 득표율에 즉각 반영됐다. 민주당은 53.4%를 득표한 반면 ‘아타튀르크의 정당’인 공화인민당은 39.8%만을 득표했다. 대통령과 총리 자리는 각각 젤랄 바야르와 아드난 멘데레스가 넘겨받았다.

젤랄 바야르(좌),

젤랄 바야르 대통령(좌),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우)

의회 의석은 결과를 더 더욱 극적으로 드러냈다. 민주당은 408석을 말 그대로 쓸어갔고, 공화인민당은 69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심지어 공화인민당은 전통적 지지기반이었던 발전한 서부에서도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공화인민당은 동부 산간지대에서나 미약한 승리를 거두었을 따름이었다. 이 지역들은 너무나 낙후했기 때문에 지역 유지들이 공화인민당에 여전히 지지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대중적 지지와 상관 없이 승패를 결정해버렸기 때문이다.

70년 라이벌의 탄생

비록 전국적인 지지세로 승리를 얻었다고 해도 민주당의 등장은 터키 정치에서 이전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과거 탄지마트와 청년튀르크당의 시대에 떠오른 그룹인 관료(구 제국 서기관)와 군인은 이후 공화인민당의 기둥이 되었다. 이 둘은 세속주의 엘리트를 형성하여 내륙 수도인 앙카라와 서부 해안지대에 자리잡았다. 1950년까지 오직 이들만이 터키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민주당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었던 기업인, 상인, 그리고 중소 농민들을 대변하겠다고 나섰고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1950년의 선거는 단순한 다당제 민주주의의 도입 그 이상이었다. 어차피 터키는 그 이전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의회 정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다당제 민주주의 자체는 자연스러운 역사적 귀결일 수 있었다. 그래서 1950년 선거의 진정한 유산은 전후 터키 정치의 양대 세력이 마침내 모두 전열을 갖춘 순간이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제 두 세력은 약 70여년 간 서로 경쟁하게 될 운명이었다.

1950년 선거의 직접적 유산은 아니라고 해도, 이후 터키 정치에 꾸준히 따라올 망령도 이 때 고개를 들었다. 몇몇 군부 주요 인사들이 이뇌뉘에게 선거 불복을 선언하고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종용했다. 이뇌뉘는 선거 패배로 비통해했지만, 그 제안을 수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가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군이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를 그다지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그런 군과 관료제를 신뢰하지 않는 것은 새로 권력을 획득한 민주당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왕 체스

이슬람 그리고 경제

그리고 전국적 인기와 함께 민주당의 촉망받는 지도자로 떠오른 멘데레스는 어떻게 해야 공화인민당의 적수들을 제압할지 알고 있었다. 결국, 핵심은 다수파 연합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고, 터키에서 다수는 곧 내륙 농민을 뜻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이슬람과 경제라는 두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었다.

먼저 이슬람은 이들에게 연해 지역의 도시 엘리트에게 무시 받아온 30년의 세월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정치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경제는 이슬람 문제보다 더 까다로웠다. 민주당은 경제를 자유화하고 사기업을 활성화시키면 국가 경제에 활력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륙 소농들의 소득을 높이기 위해 농업을 지원해야 했고, 터키 농민을 세계 시장과 연결시켜줄 내륙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해야했다. 이런 전국적인 현대화 사업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할 터였다. 그리고 터키는 자체적으로 대규모 개발을 시행할 능력이 없었다.

터키 여자 할머니 농부 농촌

스탈린이 내려준 기회

민주당은 운이 좋았다. 당선되자마자 얼마 안 되어 경제는 물론이고, 안보 문제까지도 한 번에 같이 해결해줄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제 완전히 드리워진 철의 장막 속에서 스탈린이 다시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스탈린이 낸 카드는 다르다넬스 해협이나 동부 터키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발칸 반도나 베를린 같은 유럽 문제도 아니었다.

이뇌뉘는 패배의 쓰라림을 견디고 멘데레스는 승리의 달콤함을 만끽하던 1950년 5월 16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북경발 평양행 기차를 타고 북한으로 귀환했다. 그들은 이미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차였다. 이번 여행에서 김일성은 남침을 최종적으로 승인 받고 구체적인 시행 계획안을 스탈린, 마오쩌둥과 논의했다.

김일성, 마오, 스탈린 (출처 미상)

김일성, 마오, 스탈린 (출처 미상)

평양에서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단과 함께 6월 말에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7월에 개전한다면 남한 측에 정보가 새어나가고 또 장마가 시작되어 공격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제 전차로 무장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었다.

그리고 대륙 반대편에서 전쟁의 전개를 바라보던 멘데레스 정부는 이 전쟁을 터키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해봐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참고 문헌: 

  • Erik Zurcher, [Turkey: A Moder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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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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