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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와 ‘이방인’ 품은 변방의 도시 김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은 시·군 단위로 자급자족이 기본이었다. 군청이나 시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동일 생활권으로 묶여 있었다. 시·군은 그 자체로 일상생활을 충분히 꾸릴 수 있었다. 읍내만 나오면 어지간한 일들은 다 해결이 되었다. 읍내에는 목재소·가구점도 있었고 라디오전파상도 있었고 편물공장도 있었고 술도가도 있었다. 오뎅공장도 과자공장도 아이스케키공장도 국수공장도 통닭튀김가게도 있었다. 양복점과 의상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과자공장과 아이스케키공장은 롯데제과나 해태제과의 대리점이 되었고 목재소와 가구점은 현대가구 등의 대리점이 되었다. 라디오 전파상은 삼성·금성·대우전자의 대리점이 되었다. 편물공장·의상실·양복점 또한 그에 걸맞은 무슨무슨 패션의 대리점으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사실은 이렇게 대리점으로 바뀌지 못한 것들이 더 많았다. 그냥 문을 닫는 수밖에 없었다. 오뎅공장이나 국수공장 같은 것들이 그랬다.

1970년대 들어 시·군 지역에서 자급자족과 일상생활의 완결성이 사라지게 된 것을 두고 어떤 경제학자는 ‘독점자본의 국민경제 장악’이라고 표현했다. 신발, 옷, 라디오, 텔레비전, 냉장고, 녹음기, 과자, 국수, 술, 책장, 옷장 등등 사람들이 일상을 꾸리는 데 필요한 모든 생산을 재벌 대기업들이 독점 또는 과점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 시·군에서는 일자리가 많이 사라졌다. 일자리가 사라지자 거기 매달려 있던 숱한 사람들도 덩달아 사라졌다. 이렇게 사라진 사람들은 서울 또는 부산 같은 대도시에 나타났다. 아니면 창원처럼 독점자본 위주로 새롭게 형성된 신도시에 나타나거나.

김해시 시가지 모습 (1967년, 출처: 김해문화의전당)

김해 시가지 모습 (1967년, 출처: 김해문화의전당)

김해천문대에서 바라본 김해시 (출처: Chul Woo, CC BY, 2010년 모습)

김해천문대에서 바라본 김해시 (201년 모습,  출처: Chul Woo, CC BY)

변방이 된 김해

대도시와 신도시는 대도시나 신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사람을 빨아들였다. 빨대를 꽂아서 빨아대는 것보다 더 센 흡인력이었다. 대도시와 신도시는 넘쳐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지역은 텅텅 비게 되었다. 독점자본이 국민경제를 장악한 결과다. 1970년대 중반 이후로 대부분 지역이 자립할 능력을 잃은 결과다. 지난 40년 남짓한 세월 동안 대도시와 신도시는 더욱더 중심이 되었고 그렇지 않은 지역은 더욱더 변방이 되었다.

그런데 중심이 너무 많이 빨아들였다. 넘칠 지경이 되었다. 좀 거칠게 단순화하면 이렇다. 오래 전부터 중심이었던 부산은 공해 공장이 넘쳐나게 되었다. 새롭게 형성된 중심인 창원은 사람이 넘쳐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김해는 부산과 창원 사이에 있다. 공장과 사람이 부산과 창원에서 김해로 흘러들게 되었다.

김해는 도시 지역인 김해읍의 김해시 승격과 나머지 농촌 지역 읍·면의 김해군 유지로 분리된 적이 있다. 1981년 일이다. 그러다 지방자치제 부활과 그에 따른 지방의원 선거를 앞둔 1995년에 통합 김해시가 되었다. 도농통합 김해시가 등장한 1995년 그 어름에 공장과 사람이 김해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1998년 김해 장유 택지 개발 당시 모습. 경남도민일보 사진.

1998년 김해 장유 택지 개발 당시 모습. 경남도민일보 사진.

정확하게 말하면 이렇다. 아무 공장 아무 사람이나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악취나 소음·진동이 없어서 부산에 있어도 될 만한 공장은 김해로 오지 않았다. 마찬가지 창원이 땅값이나 물가가 비싸도 거기서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은 김해로 오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반드시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어쨌거나 처음에는 부산이나 창원에서 버티기 어려운 공장과 사람이 먼저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맞는 얘기다. 사람도 공장도 폭발하듯이 늘었다. 김해 인구가 1995년에는 25만 정도였다. 2017년 12월 현재는 53만을 넘겼으니 22년 만에 2배 넘게 많아졌다. 공장도 비슷하다. 1995년 통합 김해시 출범 당시 통계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2001년 5월에 작성된 경남도민일보 기사 ‘김해 지역 공단 태부족’ 기사를 보면 “3,025개가 현재 가동 중”이다. 김해시가 2016년 12월 현재 시점으로 제조업체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7,461개 업체가 8만 2,738명을 고용하고 있다. 16년 만에 업체가 2.5배 가량 늘어난 셈이다.

물론 김해가 언제나 변방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세기 이전 전통시대에는 김해가 내내 중심이었다. 지금 경남을 두고 얘기하면 낙동강 동쪽은 동래와 밀양이 남과 북에서 중심이었고 낙동강 서쪽은 김해와 진주가 동과 서에서 중심이었다.

보기를 들면 이렇다. 1270년대 고려가 원나라에 등을 떠밀려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 그 연합군의 출진 기지가 창원(마산)이었는데, 당시 창원(마산)은 김해 관할 아래에 있었을 뿐 독립된 행정 단위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정벌에서 실패한 뒤(1282년) 고려 조정은 의창현과 회원현이라는 독립 행정 단위를 내려준 적이 있다. 없는 살림에 부족한 노동력으로 배 만들고 곡식 장만하고 짐 나르느라 지역 주민들 고생했다면서 위로·격려 차원에서 선심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지명 따위는 먹을 수도 없고 입을 수도 없고 덮고 잘 수도 없었다. 일반 대중한테 지명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이 의창회원에서 한 글자씩 딴 이름이 지금 창원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태종이 김해를 그냥 ‘부(府)’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지금으로 치면 부는 시(市)에, 도호부는 광역시(廣域市)에 대체로 해당된다. 세조 시절에는 군사 제도로 김해에 진관이 설치되었는데 그 관할 지역이 창원도호부, 함안군, 거제·칠원·진해·고성·웅천현이었다. 지금 시·군으로는 거제·통영·창원시와 함안·고성군이 되는데 말하자면 경남의 4분의1에 해당하는 중부 경남을 호령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은 1890년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산 속까지 들어찬 공장들

1990년대부터 진행된 인구와 공장의 급증은 모두 김해가 대도시 부산과 신도시 창원의 변방이기 때문에 생겨났다. 김해는 중심과 가까이 붙어 있는 변방이다. 변방 가운데는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도 많다. 그런 변방들이 보면 김해는 같은 변방이지만, 어쩌면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경남으로만 한정해 보면 이렇다. 인구가 3만 명도 되지 않는 의령군을 비롯해 군 지역은 인구가 대부분 1960년대와 70년대의 절반 또는 3분의1 수준이다. 변방이라는 말조차 걸맞지 않고 황무지라 해야 마땅한지도 모른다. 사람이 적으면 아무래도 활기가 떨어진다. 이런 까닭에 김해처럼 되고 싶은 시·군들이 없지 않다.

김해는 그런 시·군들에게 반면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 속을 들여다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일단 업체들 규모가 지나치게 조그맣다. 7,461개 업체 가운데 74%에 해당하는 5,500개 남짓이 10인 미만 고용이다. 50명보다 많은 고용은 223개로 3%밖에 안 된다.

김해 한 목재공장에서 불이 난 모습. 경남도민일보 사진.

김해 한 목재공장에서 불이 난 모습. 경남도민일보 사진.

게다가 김해는 공장의 80%가 개별공장이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공업단지에 들어가지 않고 아무 데나 들어서서 개별공장이다. 개별공장은 절대농지 빼고 어디에나 들어갔다. 논·밭이나 과수원은 물론 깊은 산 속 임야나 마을 한가운데 사람 사는 주거지에도 들어섰다. 2016년 8월 기준으로 김해시에 등록된 개별공장은 5715개다. 진례면은 850개를 넘는 사업장 100%가 개별공장이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건축면적 500㎡(150평)가 안 되는 공장은 설립 승인을 별도로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김해는 처음부터 그랬다. 1969년 가장 먼저 한일합섬 방적공장을 받아들인 안동공단도 마찬가지였다. 1981년 흥아타이어공업(넥센) 김해공장과 1991년 부산 사상에서 옮겨온 국제상사(LS네트웍스)를 받아들였지만, 안동공단은 그때는 물론 지금도 정식 공단이 아니다. 개별공장들이 모여서 형성된 ‘공장지대’일 따름이었다. 그래도 평지에 주거지와 구분지어 모였기에 아무 데나 들어서는 다른 개별공장보다는 낫다고 해야겠지만.

개별공장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은 1980년대 후반이다. 사상공단 등 부산에 있던 제조업체들이 싸고 넓은 터를 찾아 김해로 몰려왔다. 창원에서도 국가산업단지가 잘 돌아가면서 2~4차 협력업체들이 많이 유입되기도 했다. 1990~2000년대 조선·자동차·기계산업은 꾸준하게 성장했고, 김해는 부품·소재를 공급하는 중소기업이 들어서기 안성맞춤이었다.

김해에 개별공장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조성되어 있는 공단이 별로 여유가 없기 때문이 하나고 공단보다 논·밭·과수원·임야가 땅값이 싸기 때문이 다른 하나다. 하지만 이것이 근본 이유는 되지 않는다. 지역 발전에 필요하다면서 김해시청 당국이 마구잡이로 허가를 내주었던 것이다. 김해시에 상동·생림·한림면을 중심으로 1,000개 넘는 공장이 ‘깊은 산 속 나홀로’ 처지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김해가 난개발의 전형”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노 대통령의 고향이 김해다. 2005년 12월 7일 제5회 지역방송의 날 간담회에서 수도권 규제 완화 관련해 견해를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도권 규제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은 총량을 규제했을 뿐 질적으로 규제가 잘 안 되어 난개발로 퍼져 간다는 것이다. 난개발의 전형적인 예는 오히려 김해를 보면 알 수 있다. 김해라는 고장 하나가 작은 공장으로 가득 차 버렸다. 상동·생림면 등은 참으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인데도 다른 데가 전부 규제가 되어 있으니까 산골짝에 (공장들이) 들어가 그야말로 아름다운 자연이 다 망가져 버렸다.”

공장이 곳곳에 흩어져 있으면 진입로나 공업용수 확보 또는 화재 대비 등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제대로 갖추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식수원 오염이나 소음·진동 발생, 교통사고 위험이 높아지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다. 이에 더해 깊은 산 속 나홀로 공장은 집중호우나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붕괴·매몰 같은 사고를 당할 개연성도 크다.

외국인노동자, 변방에서 변방으로

2017년 11월 1일 행정안전부가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을 발표했다. 해마다 한 번씩 하는데 기준은 2016년 11월 1일이다. 여기에서 김해는 외국인 주민이 2만 5,957명이었다. 남자는 1만 8,088명이고 여자는 7,869명이다. 김해 전체 인구 53만 2,912명의 4.9%에 해당한다. 김해가 외국인 주민이 경남에서 가장 많다. 두 번째인 창원은 2만 4,881명(2.4%)이고 세 번째인 거제는 1만 4,340명(5.5%)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김해는 경기도 안산시(7만 9,757명)와 서울 영등포구(5만 5,427명) 등등에 이어 열네 번째로 많다.

김해 외국인 주민 가운데 1만 3,599명이 외국인 노동자(창원 8,990명, 거제 6,364명)다. 결혼이민자는 1,642명, 유학생은 352명, 외국 국적 동포 2337명이고 기타 노동자 4497명, 한국 국적 취득자 1372명, 외국인 주민 자녀 2,158명이다. 김해에서 외국인노동자가 1000명 넘는 지역은 한림면(2564명), 진영읍(2088명), 주촌면(1927명), 진례면(1738명), 상동면(1058명) 다섯이다.

이들 지역에는 중소·영세 규모 공장들이 특히 밀집해 있다. 중소·영세 규모 공장들은 대규모 공장들보다 외국인노동자들이 더 필요하다. 작은 공장에는 대체로 한국 사람들이 더럽고 어렵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꺼리는 작업이 많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런 데서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작업을 한다. 그런데도 또는 그렇기 때문에 받는 월급은 잘해봐야 법정 최저임금 수준에 머무르고 어떤 경우는 더 내려간다.

동상시장을 찾은 외국인들. 노동자도 있고 결혼이주여성도 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동상시장을 찾은 외국인들. 노동자도 있고 결혼이주여성도 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김해는 변방이다. 공장은 허름했고, 하는 일은 고달팠다. 1차 하청은커녕 재하청 또는 재재하청 협력공장으로 먹이사슬의 밑바닥에 놓여 있다. 높은 부가가치는 기대를 하는 자체가 사치이고 현상 유지만 해도 감지덕지다. 김해에 들어선 공장이 대체로 그렇다. 이런 김해의 공장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외국인노동자가 몰려들었다. 외국인노동자의 고국 또한 대체로 변방이다. 변방이라서 변방을 불러들였다. 변방은 변방이 알아보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하나. 외국인노동자는 잠재적 범죄자일까, 아닐까? 외국인노동자라 해서 유별나게 착하지도 않지만, 유별나게 나쁘지도 않다. 외국인이 없었던 옛날에는 당연히 외국인 범죄도 없었다. 지금 외국인 범죄는 한국에 외국인이 들어와 있기에 당연히 생기는 것이다. 그이들 범죄율은 한국 사람보다 크게 낮다. 경찰청 자료를 보면 2016년 범죄율한국인은 3.9%인 반면 외국인은 2.1%에 머물렀다. 형사정책연구원이 분석한 2011~2015년 10만 명당 범죄발생률도 한국인이 외국인보다 높았다. 심지어 외국인이 가장 높았던 2011년에도 10만 명당 검거인원지수는 한국인이 3,524명으로 외국인의 1,591명보다 2.2배 높았다. 2012~2015년 검거인원지수는 한국인이 외국인보다 당연히 2배 넘게 높았다.

그런데도 외국인노동자는 우리한테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2017년 11월 24일 자 경향신문 보도는 이렇다. “지난해 IOM이민정책연구원이 ‘외국인노동자가 늘어나면 범죄율도 올라간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사람 46.7%가 ‘그렇다’고 답했다.” 외국인노동자는 이미 우리 풍경 속에 들어와 있다. 외국인노동자뿐 아니라 결혼이주민과 외국인유학생, 외국국적동포가 모두 익숙한 이웃이 되어 있다. 색안경을 벗어던질 때가 되었다. 편견과 오해는 그릇된 차별과 배제를 불러일으킨다.

동상시장과 외국인거리

외국인주민이 3만 가까이 되다 보니 김해에는 외국인거리가 있다. 옛 도심인 동상동·서상동 일대다. 옷가게·휴대폰판매점·환전소 따위 가게 간판은 여러 나라 문자로 표기되어 있고, 노래방에 가면 노래 목록이 나라별로 따로 있을 정도다. 베트남 쌀국수 가게를 비롯해 인도네시아·중국·태국·몽골·베트남·캄보디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 전문 음식점들도 수십 군데 있으며 아시아마트도 여럿이다. 올해 들어서는 주말마다 외국인노동자가 하루 3,000명가량 찾는다고 한다. 한 해 전인 2017년보다 1,000명 정도 늘어났다.

여기에 외국인거리가 들어선 원인은 동상시장에 있지 싶다. 조선 말기부터 2일·7일에 열렸던 읍내장에서 비롯되었다. 구색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데다 가격까지 싼 편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국수거리(칼국수타운)는 그 자체로 명물이다. 주머니 가벼운 외국인노동자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게 된 원인이다. 여기에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가까운 창원·부산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들까지 걸음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아케이드 사업을 벌여 언제든지 눈비 맞지 않고 일을 볼 수 있게 되었고, 2000년대에는 조명을 밝게 바꾸어 어둡고 칙칙한 이미지를 털어냈다. 2017년에는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예산으로 다문화 홍보관과 쉼터를 꾸몄다. 홍보관은 외국인노동자나 결혼이주민으로 와 있는 이들의 조국이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는지 일러준다. 쉼터는 말 그대로 탁자와 의자, 텔레비전과 정수기 등을 갖췄다. 시장이나 가게에서 튀김·족발·떡·김밥 또는 출신 나라 전통음식을 장만해 와서 함께 먹고 마시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여러 나라 전통의상을 갖춘 포토존은 덤이다.

동상동주민자치센터 외벽에 그려진 네팔 출신 결혼이주여성의 모습. 앞에 서 있는 헨드릭 바이키르히(독일)의 작품이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동상동주민자치센터 외벽에 그려진 네팔 출신 결혼이주여성의 모습. 앞에 서 있는 헨드릭 바이키르히(독일)의 작품이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외국인거리 서쪽에 있는 수로왕릉·왕릉공원·수릉원도 외국인노동자들의 발길이 잦다. 수로왕릉의 주인은 가락국 초대 임금 김수로왕이다. 이미 2,000년 전에 멀리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황옥과 국제결혼을 한 인물이다. 색다른 외국인거리와 토속적인 한국전통시장, 그리고 독특한 사연을 품은 문화재가 한 데 어울리는 드문 자리다. 이렇게 바탕이 다른 것들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데가 바로 변방이다.

대규모 건축과 대규모 발굴

김해는 창원과 부산에서 사람도 받아들여야 했다. 김해 옛 시가지는 원래 좁기도 했거니와 대부분 문화재보호지역이라 개발이 어려웠다. 옛 시가지와 김해시청 서쪽에는 해반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해반천 서쪽 내외동이 지금은 높다란 아파트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원래는 대부분이 습지였다. 1990년대 아파트용 택지로 58만 평이 조성되기 전에는 미나리꽝이 전부였다. 내외동 가까이 연지공원 옆 구산개발지구는 2006년부터 6,000세대 목표로 경남개발공사가 조성했는데 2012년 즈음에 계획대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동김해 지역은 내외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금 앞서 개발되었다. 김해 남산에서 동쪽으로 삼정동·활천동에서 시작해 어방동~삼안동~지내동으로 이어진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면서 김해에서 가장 먼저 신도시로 탈바꿈했다. 우신그린피아 1997년 325세대, 어방시영 1992년 318세대, 어방화인 1996년 727세대, 대우유토피아 1994년 2,041세대 아파트 등이 그 일부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장유면이다. 1990년대 장유신도시 개발과 2000년대 율하신도시 개발을 통해 2012년 8월 현재 인구 13만 406명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가 되었다. 면 단위로는 전국 최다 인구였다. 2017년 경남 군 단위 인구 최다가 함안군 6만 8,580명이다. 장유면은 이미 5년 전에 이보다 6만 명이 더 많았고, 11만~12만 수준인 밀양시·사천시 전체 인구보다 많았다. 장유면은 2013년 7월 장유1·2·3동 셋으로 쪼개지면서 동 지역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장유에 있는 율하리 고인돌 유적. 대규모 개발 때문에 발굴된 유물이다.

장유에 있는 율하리 고인돌 유적. 대규모 개발 때문에 발굴된 유물이다.

대규모 아파트 개발은 대규모 문화재 발굴로 이어졌다. 1970년대 개발독재 시절이었으면 그냥 그대로 싹 밀어버릴 수 있었지만 1990년대에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일정 규모 이상 개발은 반드시 문화재 발굴 조사를 하도록 바뀌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김해 곳곳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문화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김해 지역에서는 산비탈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왜 계통 토기가 숱하게 출토되었다. 수로왕 등장 이전인 2500년 전에 이미 김해가 일본과 교류하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구산지구에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무게가 350톤 이상으로 지금으로서는 덮개돌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12년 구산동지석묘라 이름을 붙이고 경상남도기념물 제280호로 지정해서 도로 묻어 버린 다음 표지판을 세웠다. 연지공원 근처 연지2교 사거리와 이진캐스빌1단지아파트 사이 녹지에 해당된다.

장유면은 개발도 대규모였고 발굴도 대규모였다. 먼저 1500년 전 항구 유적으로 선착장과 건물터, 도로 자리가 발굴되었다. 지금 관동유적공원으로 남았는데 선착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두 번째로 크고작은 다양한 고인돌도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 공동묘지라 할 수 있는 일대에는 지금 율하유적공원(A)과 유적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370m가량 떨어진 데(율하동 1350-2)에서는 솟대 유적도 나왔다. 솟대 유적 발굴은 우리나라에서 여기가 유일하다. 옛날 신성불가침 영역을 나타내는 표지인데 죽은 이들을 위한 무덤 영역과 산 사람들을 위한 주거지를 가르는 표식으로 여겨진다. 아파트 사이에 옹졸하게 남았는데 율하유적공원(B)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 번째로 관동고분공원도 유적이 발굴된 자리다. 2000년 전 우물과 고상가옥터, 공공건물터 등이 나왔다. 이들은 모두 장유3동 구역에 들어 있다.

부산과 창원에서 사람들을 받아들이려면 김해는 대규모로 아파트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아파트를 짓지 않았으면 계속 땅 속에 묻혀 있었을 문화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지금 김해가 변방이 아니었다면 김해는 지금처럼 풍성한 고대사의 물증들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변방의 정치인

2009년 5월 23일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 그이는 그야말로 변방의 정치인이었다. 먼저 고등학교까지만 마치고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1988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변방을 돌았다. 1990년 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통일민주당의 3당합당 국면에서는 야합이라고 비판하며 동참을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으로 남았다. 그 뒤로도 노무현은 정치의 변방이던 부산에서 줄창 떨어지는 선거를 했다. 1996년 딱 한 번 서울 종로에 나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으나 3위로 떨어졌으며 4년 뒤에는 당선이 유력하다는 서울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와 선거에 나서 또 떨어졌다.

노무현, "이의 있습니다!" (출처: 민주화기념사업회) http://www.kdemo.or.kr/blog/location/post/791

노무현, “이의 있습니다!” (출처: 민주화기념사업회)

2008년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도 노무현의 선택은 변방이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4월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로 달아났고, 독재자 박정희는 대통령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윤보선과 최규하는 물론 전두환과 노태우를 지나 김영삼과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17대 대통령 이명박과 18대 대통령 박근혜도 마찬가지다. 자택에 있느냐 아니면 감옥에 있느냐 정도가 다를 뿐이다.

노무현은 고향에서 고향 사람들과 어울렸다. 봉화산과 화포천과 봉하들녘과 같은 고향산천을 고향 사람들과 더불어 가꾸고 돌보았다. 덕분에 고향이 아름다워지고 깨끗해졌다. 그런 영향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환경부는 화포천을 지난해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고, 올해는 생태관광지역도 겸하도록 했다. 봉하들녘에서는 노무현이 시도했던 친환경농법이 여태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은 지금 봉하마을에 조성된 묘역의 너럭바위 아래에서 영면하고 있다. 너럭바위는 고인돌을 닮았지만, 고인돌처럼 무겁지는 않다. 여기 너럭바위는 두드러져 보이지도 않으며 어깨에 힘을 넣고 위세를 떨치는 품새도 아니다.

문재인과 노무현 (출처: 사람사는세상)

문재인과 노무현 (출처: 사람사는세상)

‘한림면’으로 바뀐 ‘이북면’

이북면이 한림면으로 바뀐 것도 김해가 변방이기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한림면사무소 홈페이지를 보면 한림면이 한림면이 된 과정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부터 하북면으로 명명되어 왔었다. 이후 조선 말기 1896년에 상북면(上北面)과 하북면(下北面)으로 분리되었다. 1914년 다시 병합되면서 이북면(二北面)이 되었다. 이북면은 북쪽에 위치한 두 개의 면이 합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북’이란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여 1987년에 한림면(翰林面)으로 개칭하였다. ‘한림’이란 명칭은 중심 마을인 한림정에서 따왔다.”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방면’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중북(中北)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다. 하북(下北)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다.” 한림면사무소 홈페이지의 상북·하북이 중북·하북으로 다를 뿐 북이 두 개인 것은 마찬가지다.

김해 한림정역

김해 한림정역

이북면이 족보도 없는 한림면으로 바뀐 까닭이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여’란다. 왜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했을까? 사실 발음은 자연스러웠으나 듣기가 거북해서 바뀌었다. 옛날에는 북한을 이북이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북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북 사람이 되었다. 상대방이 혹시 기분이 나빠지면 ‘이북 자식들’ 또는 ‘이북 새끼들’이라고도 했겠지.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다 보니 북쪽은 일단 적대시하고 경멸하는 풍조가 퍼져 있는 상황에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일 수도 있다. 남북대결과 상대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이 불러온 결과라고나 할까. 휴전선에서 340~350km 떨어진 남쪽 고장 작은 변방에서 3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지금 이북면의 자취가 남아 있는 데는 하나뿐이지 싶다. 이름이 바뀐 1987년에 열 살 스무 살이던 이들은 애써 이북면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보다 젊은 축은 한림면이 예전에는 이북면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다만 이북초등학교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이북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열었다. 올해 2월 배출된 88회 졸업생은 여학생 5명과 남학생 8명 등 모두 13명이다. 이북초등학교 졸업생과 재학생은 그 이북이 왜 이북인지 혹시 알고 있을까.

이북초등학교

이북초등학교

이 글은 ‘두 도시 이야기:기억의 서사적 아카이브전’(김해 문화의 전당 윤슬미술관, ~3월 29일)에 김해 소개글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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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훤주
초대필자. 경남도민일보 기자

경남도민일보 기자.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대표. 1963년 출생. →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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