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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베의 몸부림’에서 이어집니다.

 

서로 간에 사이는 안 좋았지만, 그럼에도 중국과 일본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대외정책에서 돋보이는 것은 두 국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에서 큰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일본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과정이 같지는 않았다. 19세기 중국은 서양 열강이 군대와 값싼 공산품, 그리고 아편을 들고 온 이래로 외세를 몰아내는 것에 모든 정신을 쏟은 반면, 일본은 자신이 그 외세가 되어 밖으로 나가는 데 국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조 히데키가 대동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했을 때, 과정은 달랐지만 양국이 도달한 결론은 하나로 모아졌다. 미국에 의해 손발이 묶인 일본은 그 위치에 만족하면서 경제개발에 몰두했다. 문을 걸어 잠근 중국 또한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문을 열긴 했지만, 밖으로 나가서 목소리를 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네루의 세 가지 유산: 비동맹, 사회주의, 세속주의

이 점에 있어서는 인도도 같았다. 인도는 일본의 경로보다는 중국의 경로를 많이 따라갔다. 1947년에 독립을 쟁취한 이래로, 인도는 자신들을 수세기 동안 지배하고 착취했던 영국을 위시한 서구 국가들에 다시는 놀아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 중심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제자로 인도의 국부 자리에 오르게 되는 자와할랄 네루가 있었다.

네루와 간디 (1942)
네루와 간디 (1942)

냉전이 시작되며 소련과 미국 사이 긴장이 점차 격화되었을 때, 네루는 인도가 둘 중 어느 하나를 굳이 선택해 갈등 구도로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대신 제3의 비전을 제시했다. 식민지를 겪었던 나라들끼리 서로 뭉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면 누구도 자국의 독립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었다.

네루의 비전은 미국 혹은 소련의 압박에 노출된 다른 민족 지도자들과 공감대를 이루었고, 이들은 여러 논의를 거친 끝에 1955년에 회의를 하나 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각국의 저명한 민족지도자들,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중국의 저우언라이, 그리고 자와할랄 네루가 인도네시아의 반둥에 모였다. 비동맹, 제3세계의 등장을 알린 반둥 회의였다.

1955년 4월 반둥회의. 자와할랄 네루(인도), 크와메 은크루마(가나), 가말 압둘 나세르(이집트), 수카르노(인도네시아), 요시프 티토(유고슬라비아) (왼쪽부터)
1955년 4월 반둥회의. 자와할랄 네루(인도), 크와메 은크루마(가나), 가말 압둘 나세르(이집트), 수카르노(인도네시아), 요시프 티토(유고슬라비아) (왼쪽부터)

네루가 외교적으로 미국과 소련 둘 중 어느 나라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균형을 찾기는 어려웠다. 미국과 소련은 개발모델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신생국 지도자들은 미국식 개발과 소련식 개발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에 일찍부터 감명 받았던 반제국주의자 네루가 선택한 모델이 무엇일지는 자명했다. 네루는 소련이 건설한 거대한 트랙터 공장과 중공업 단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네루는 정부와 관료가 효과적으로 자원을 집중하고 투자를 지속한다면 인도도 소련처럼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네루의 이런 비전은 마을마다 물레를 돌리며 자급자족을 하는 전통 인도의 생활양식으로 회귀하고자 했던 간디의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하지만 간디는 결국 암살당했고, 비통한 네루는 마침내 국가 설계와 건설의 총사령관으로 올라섰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네루의 유산은 짙게 남았다. 민족주의자였던 네루는 인도 국민의 충성의 대상을 명확히 했다. 하지만 모든 인도 민족주의는 결국 “무엇이 인도인가?”라는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인도는 너무나 많은 다양성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 시기부터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갈등이 불거졌었고, 수많은 카스트 간의 위계는 국민 통합을 막았다.

"무엇이 인도인가?"
“무엇이 인도인가?”

이 모든 건 지역 간, 민족 간, 언어 간의 차이와도 겹쳐져 복잡함을 배로, 아니 제곱으로 늘렸다. 어느 근대 국가든 영토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해내기 위해서는 확고부동한 정체성의 기반이 필요했으나 인도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모든 나라와 전통은 발명된 것이라지만, 인도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이 나라는 애초부터 영국이 통일“시켜준” 국가였다.

15세부터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공부하고 들어온 네루는 분명 영국적 해법을 들고 왔다. 그는 ‘인도’라는, 그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국가를 충성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네루가 보기에 힌두교, 이슬람교, 혹은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아니면 힌디어나 텔루구어 사용자는 그 구심점 역할을 하면 안 되었다. 네루의 새로운 기획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이들은 당연히 가장 넓은 저변과 뿌리를 갖고 있던 힌두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이 기획은 네루식 세속주의로 정의되게 된다.

잠 든 코끼리

1964년 네루가 죽자, 마치 덩샤오핑이 그랬던 것처럼, 네루가 남긴 세 가지 유산은 수십년 간 인도가 나아갈 길로 간주되었다.

첫 번째 유산은 대외정책으로, 냉전의 동맹 체제와 국제적 갈등에 참여하지 말고, 대신 반식민주의적 태도만을 견지하라는 ‘비동맹주의’였다. 두 번째 유산은 영국 식민당국이 남겨준 기술관료들과 공무원들을 활용하여 야심차게 설계된 ‘인도식 사회주의 경제정책’이었다. 마지막은 힌두교를 공적 생활과 정체성에서 몰아내고, 추상적인 인도 국가를 구심점으로 삼자는 ‘세속주의’였다.

하지만 네루의 유산에는 덩샤오핑의 유산과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덩샤오핑의 선부론, 집단지도체제, 도광양회를 따라 중국은 도약할 수 있었다. 인도인들도 네루의 유산을 수십년 간 따랐다. 하지만 인도는 도약할 수 없었다.

인도 델리

가장 중요한 것은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도가 뿌리 깊은 빈곤을 끊어내지 못한 데 있었다. 이 점에서 네루는 덩샤오핑보다는 마오쩌둥과 유사했다. 물론 네루가 마오쩌둥과 같은 참사를 일으키진 않았다. 그러나 마오쩌둥보다 낮은 성적을 거둔 것도 많았다. 네루는 마오쩌둥의 (농업집단화로 빛이 바래긴 했지만) 토지 개혁을 결코 완수하지 못했고, 국민교육은 실패했으며 여성교육은 그 중에서도 방치된 상태였다.

이것이 네루만의 책임은 아니었을 수 있었다. 혁명을 통해 사회 깊숙이 들어가 전통을 파괴했던 마오쩌둥과 달리 네루는 그럴 수 없었다. 사실상 식민당국에게서 통치권을 이어받은 것에 불과한 신생 델리 정부는 광대한 인도 곳곳에 살아있는 지방 권력자들과 토호들을 뚫을 수 없던 것이다. 인도라는 코끼리는 독립을 이루면서 깨어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잠이 든 채 꿈만 꾸고 있었던 것이다.

허가의 지배, 왕조의 지배

그리고 이와 같은 중앙 권력의 부재가 국가 주도 사회주의와 만났을 때의 결과는 ‘힌두 성장률’로 드러났다. 절망적일 정도로 빈곤한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항상 3% 언저리에서 오락가락한다는 비웃음이었다. 이 정도 경제성장은 사막에서 물 한 방울 떨어트리는 것만도 못했다.

원인은 네루식 사회주의가 만들어낸 ‘허가의 지배’ 혹은 ‘라이센스 왕국’에 있었다. 투자와 대외무역의 모든 단계에서 중앙 및 지방 공무원들의 통제가 가해졌고, 정부의 동의는 사소한 결정 하나를 내리는 데도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농촌에서는 인구가 폭증했고, 상당수는 영양실조에 걸렸다. 하지만 허가의 지배 덕분에 농촌의 유휴 노동력을 흡수할 도시에서의 제조업 일자리는 창출되지 않았다.

인도 거지 걸인

한편 네루의 유산은 의도치 않게 가장 좋지 않은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바로 네루 왕조의 등장이었다. 네루가 사망한 뒤 잠깐의 권력투쟁을 거치고 그의 딸 인디라 간디가 정권을 잡았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민주주의를 정지시키려 했었던 그는 1984년 시크교도 분리주의자들을 진압하다 시크교 경호원에게 암살당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인디라의 아들 라지브 간디였다. 1991년 라지브 간디마저 암살당하자, 드디어 자와할랄부터 라지브까지 이어지는 35년 삼대에 걸친 통치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 뒤 네루 가문에서 인도 총리가 배출되지는 않았다.[footnote]하지만 네루 왕조가 전적으로 수명을 다하지 않았다. 라지브 사후 그의 이탈리아인 아내 소냐 간디는 국민회의 당의 총재를 맡았다. 라지브와 소냐의 아들인 라훌 간디는 부총재를 맡고 있다가 2017년 12월부로 총재직을 어머니로부터 계승했다.[/footnote] 하지만 네루 왕조는 그 뒤에도 인도 전역을 휘감은 부패 사슬의 중심으로 남게 된다. 왕조의 지배와 허가의 지배는 그렇게 단단히 결합했다.

네루의 외동딸이자 인도 유일의 여성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왼쪽, 1917년 11월 19일~1984년 10월 31일)와 아들 라지브 간디(1944년 8월 20일 ~ 1991년 5월 21일,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둘 다 암살로 유명을 달리했다.
네루의 외동딸이자 인도 유일의 여성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왼쪽, 1917년~1984년)와 아들 라지브 간디(1944년~1991년,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둘 다 암살로 유명을 달리했다. 참고로 간디는 인디라의 남편 성을 따른 것으로 ‘마하트마 간디’ 가문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왕조 이후: 라오와 바지파이

네루 왕조 말기부터 서서히 변화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인디라는 인도이며 인도는 인디라다”라는 말까지 했던 인디라 간디는 네루의 유산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라지브가 정권을 맡게 되었을 때, 40년에 걸쳐 누적된 인도의 낙후성과 빈곤은 너무나 명백했다. 네루의 유산은 실패했다. 라지브 간디는 그렇게 허가의 지배를 개혁하겠다고 나섰다. 인도에서 덩샤오핑 식의 개혁개방이 공식화된 순간이었다.

비록 그 개혁이 실패하긴 했어도 일단 논의가 시작되자 점차 세를 불려나가는 데는 성공했다. 후임자이자 최초의 네루 가문 바깥의 지도자 나라시마 라오는 1991년부터 본격적인 경제개방을 선언했다. 라오는 5년 간 재무장관 만모한 싱, 통상장관 치담바람과 함께 인도에 시장을 도입했다. 소비에트 연방과 공산주의 유산의 붕괴, 그리고 그와 현저히 대비되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눈부신 성장은 인도 사회주의의 미래 또한 결정했다. 나라시마 라오는 “동방을 보자(Look East)” 정책을 발표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해 나가겠다고 한 선언은 그래서 상징적이었다.

나라시마 라오 (출처: Dh ronak, CC BY SA 4.0)
나라시마 라오 (출처: Dh ronak, CC BY SA 4.0)

또 다른 단명 총리로 남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라오는 5년 간 집권하며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그렇게 국민회의당은 자신들에게 요구되어 온 유연함을 그제서야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실패, 그리고 그 유산의 퇴조는 국민의회당이 그간 독점하던 정치적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였고, 이어지는 선거에서 그 결과는 바로 드러난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의 인도인민당(BJP, Bharatiya Janata Party)이 소냐 간디를 누르고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임기: 1998년 3월 19일~2004년 5월 22일)
인도인민당의 초대 당수이자 인도의 제10대 총리를 역임한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임기: 1998년 3월 19일~2004년 5월 22일)

바지파이는 전임자에게서 바통을 받아 경제개혁을 밀고 나갔고, 인도는 힌두 성장률을 탈출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경제 바깥에서도 인도에 중대한 변화가 찾아왔다는 증거였다. 비록 사회주의를 어쩔 수 없이 버리긴 했어도, 국민의회당에게 있어서 네루의 나머지 유산은 앞으로도 인도가 나아갈 지향점이었다. 하지만 인도인민당은 국민의회당이 아니었다. 인도인민당은 네루의 또 다른 유산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이제 사회주의가 사라져가는 인도에서는 세속주의도 흔들렸다.

“누가 힌두인가?”

분명 네루의 세속주의는 거대한 인도 아대륙을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묶어놓는 데 큰 공헌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네루의 세속주의는 근본적으로 영국과 강한 연을 맺은 도시 엘리트의 기획일 수밖에 없었다. 네루 스스로도 본인은 “인도를 다스린 마지막 영국 총리”라고 자조할 정도였다. 네루의 세속주의나 카스트 폐지 정책은 광대한 힌두스탄 평야나 데칸 고원의 현실에서 무기력해졌다. 델리의 의지는 지방 토호들과 마주쳤을 때 무력해지거나 썩어버렸다.

대신 새로이 떠오르는 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적 구심점이 부상하고 있었다. 힌두교. 그냥 힌두교가 아닌 고도로 정치적인 새로운 힌두교 운동인 ‘힌두트바(Hindutva; 힌두 우파 민족주의, 인도인민당의 이념적 정체성)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footnote]”힌두뜨와는 힌두(Hindu)와 따뜨와(Tattva)의 합성어이다. 따뜨와란 본질, 원리 등을 뜻한다. 즉 힌두뜨와는 힌두 원리, 힌두성(性)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병한, “감옥에 가느니 차라리 군대에 입대하라!”, [유라시아 견문] 힌두뜨와: 정치적 힌두교, 프레시안, 2016. 5. 3. 중에서) [/footnote]

힌두트바는 1923년에 독립운동가이자 변호사인 사바르카르가 [힌두트바, 누가 힌두인가?]라는 저서를 쓴 것으로 시작되었다. “베다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네루식 세속주의에도 반대했고, 특히 이슬람교는 배척해야할 외국의 종교로 규정되었다.

사바르카르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사바르카르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힌두트바는 이후 1925년에 만들어진 ‘민족봉사단(RSS)’의 지도 이념으로 부상했고, 민족봉사단이 전국 조직으로 확대되면서 힌두트바도 함께 확산되었다. 이후 힌두트바 운동과 민족봉사단은 간디 암살에 연루되면서 활동금지 명령을 받았고, 이후 1975년 인디라 간디의 비상계엄 때 다시 정부의 철퇴를 맞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네루식 세속주의와 평등주의에 대한 반발을 유지하면서 물 밑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요디아의 폐허 위에서

1980년 인도인민당이 창설되어 마침내 힌두트바 운동은 공식적인 정치 무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후 80년대에 아요디아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며 인도인민당는 각지의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끌어모은다.

문제의 발단은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아요디아 시에 있는 ‘바브리 마스지드’라는 모스크였다. 민족봉사단 대원을 비롯한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원래 이 사원이 있던 자리에 힌두교의 신인 라마를 모시던 힌두 사원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무굴 제국의 무슬림 통치자들이 라마 사원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모스크를 건립했다는 것이다(‘바브리’는 무굴 제국 건국자 바부르를 뜻한다).

진위와 상관 없이 인도인민당 당원들과 민족봉사단 대원들은 80년대 중반부터 아요디아에서 라마 사원 건립 운동을 시작했다. 건립보다는 파괴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바브리 마스지드의 향방이었다. 1529년부터 무려 500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모스크는 인도의 영혼을 바로 세울 대의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파괴되어야 했다.

네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이슬람과 힌두의 갈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갈등은 그저 냉동고에 얼어 있던 것일 뿐이었다. 네루 왕조가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가자, 결국 그 갈등은 해동되었고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끝내 1992년에는 힌두트바 운동원들이 아요디아 사원 앞에 운집했고 사원으로 몰려들어갔다. 그렇게 바브리 마스지드는 채 다섯 시간만에 돌더미로 변했다.

힌두 광신도들은 망치, 몽둥이, 도끼 등 온갖 무기를 동원해 모스크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들이 모스크의 세 돔을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다섯 시간이었다.
힌두트바 운동원이 바브리 마스지드의  세 돔을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다섯 시간이었다.

사원의 파괴는 종교 갈등의 기폭제가 되었다. 전국적인 폭력 소요 사태가 발생하였고, 복수극 끝에 수천 명이 갈등의 여파로 사망했다. 말이 복수극이었다고 하나 인도에서는 결국 무슬림이 약자이자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피비린내 나는 유혈극과 문화 파괴 위에서 인도인민당은 전 인도 힌두 민족주의자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90년대 내내 세력을 확대해간 인도인민당은 국민의회당의 50년에 걸친 지배를 종결시킬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 나라시마 라오가 물러간 뒤 2년에 걸친 엎치락 뒤치락 끝에, 인도인민당 내에서도 온건파인 바지파이는 드디어 국민의회당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새로운 의회당의 마하라자, 그러나…

바지파이의 통치는 2004년 다시 국민의회당이 선거에서 승리함에 따라 끝났다. 그러나 네루 왕조가 재개되는 일은 없었다. 의회당 총재인 소냐 간디는 본인이 총리에 오르는 대신 유능한 관료로 평가 받던 만모한 싱을 총리로 지명했다. 싱은 이후 2014년까지 10년 동안 인도를 다스렸다. 개혁 총리였던 나라시마 라오 밑에서 재무장관을 맡았던 싱 총리는 라오, 그리고 인민당 바지파이의 노선을 이어나갔다.

만모한 싱(임기: 2004년 5월 22일~2014년 5월 26일)
만모한 싱 (임기: 2004년 5월 22일~2014년 5월 26일,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3.0)

그렇게 2000년대 내내 네루의 유산은 인도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다시 네루의 후계자들이 국가의 수뇌부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세속주의는 발흥하는 힌두 민족주의자들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회주의 폐기는 곧 대세가 되었고, 남은 건 기존의 관료 기득권을 어떻게 몰아내느냐의 힘 싸움 문제였다.

비동맹은 아직 폐기되지는 않았지만, 사실 폐기할 것도 없었다. 비동맹주의는 냉전의 양대 동맹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노선이었다. 냉전 자체가 끝난 이상, 인도가 굳이 비동맹을 외칠 필요는 사라졌다. 대신 이제 탈냉전의 변화한 국제무대에서 어떻게 인도의 국익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만모한 싱은 브릭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국제기구에서 개발도상국을 대표하며 인도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만모한 싱 집권 후반기에는 고질적인 ‘힌두 성장률’의 망령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소냐 간디는 네루의 유지를 잇겠다는 듯 농민 부채 탕감 정책을 들고 왔으나 유권자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인도인들은 이제 성장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똑같이 거대했고 똑같이 가난했던 중국과 비교했을 때의 격차는 선명하게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성장에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네루의 유산이 아니었다. 인도 경제는 추가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고, 정부는 권력을 더 효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었어야 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유학 시절 라지브 간디와 만나 1968년에 결혼한 소냐 간디. 시어머니(인디라 간디)와 남편의 잇따른 암살('84년, '91년)로 은둔 생활을 했지만, '98년 정계에 입문해 국민회의당 총재로 선출됐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유학 시절 라지브 간디와 만나 1968년에 결혼한 소냐 간디. 시어머니(인디라 간디)와 남편의 잇따른 암살(’84년, ’91년)로 은둔 생활을 했지만, ’98년 정계에 입문해 국민회의당 총재로 선출됐다.

한편으로 해외 자본에 더 적극적으로 문을 열어야 했고, 복잡한 규제는 그 공정성은 유지하되 가능한 한 간소화해야 했다. 국민회의당은 개혁 초반에는 이런 과제를 해결해갈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억압되어 있던 인도 경제는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개혁’을 더 강력한 추진력을 갖고 밀어붙일 의지가 있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국민회의당에는 바로 그 의지가 부족했다. 네루의 유산은 여전히 당의 손발을 묶고 있었고, 델리의 개혁 프로그램은 지방에 내려가자마자 이권의 거미줄 속에서 길을 잃곤 했다.

구자라트의 야누스, 나렌드라 모디

인도의 성장률이 추락하고, 만모한 싱과 소냐 간디가 부패 스캔들로 홍역을 치루고 있을 무렵, 인도인민당에서 새로운 정치적 도전자가 등장했다. 바로 2014년 이래로 지금까지 인도 총리로 재직 중인 나렌드라 모디다. 그는 10대 시절 노점에서 인도식 홍차인 짜이를 팔던 가난한 소년에서 시작해서 열혈 민족봉사단 대원이자 힌두트바 운동가로 활동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제15대 총리 (임기: 2014년 5월 26일 ~ 현재,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2.0)
나렌드라 모디 인도 제15대 총리 (임기: 2014년 5월 26일 ~ 현재,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2.0)

구자라트 지역 인도 인민당의 당원이던 모디는 2001년에는 구자라트 주지사 자리에 올라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이듬해 구자라트에서 씻을 수 없는 비극이 발생했다. 아요디아에서 성지 순례를 마치고 구자라트의 주도 아흐메다바드로 돌아오던 열차가 고드라 역에 정차했을 때 화재가 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 화재로 열차에서 59명의 승객이 사망했는데, 마침 열차가 정차한 지역은 구자라트의 무슬림 거주 지역이었다. 힌두교도들 사이에서 무슬림들이 열차에 방화를 저지른 것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소문은 금새 폭동으로 번져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폭동과 소요사태로 인해 공식적으로 750명이 학살당했다고 집계되었지만, 비공식 추산은 1,200명, 때로 2,000명까지 올라간다. 민족봉사단 대원들은 무슬림들 거주지에 들어가 집단강간을 자행하기도 했다.

당시 주지사였던 모디는 구자라트 학살을 방조 내지는 조장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미국에서는 이 혐의 때문에 입국까지 금지됐다.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모디의 부상은 그 자체로 힌두 민족주의와 종교의 정치화라는 불길한 그림자를 인도에 드리우고 있었다.

2002년 2월, 차량을 불태우며 구자라트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힌두 광신도들의 모습 (출처: AP Photo/Manish Swarup)
2002년 2월, 차량을 불태우며 구자라트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힌두 광신도 (출처: AP Photo/Manish Swarup)

그러나 모디가 학살에 연루된 잔인한 범죄자라는 혐의만 가지고 있었다면 인도 총리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학살자’ 모디는 재임 기간 구자라트를 인도 최대의 성장 지역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런 모디를 믿고 표를 준 것이기도 했다. 구자라트는 마치 광둥성과도 같았다. 그리고 구자라트 주지사가 인도의 총리가 된다면 변화는 아대륙 전체로 확산될 수 있을 것이었다.

구자라트에서 모디는 낙후 인프라 개선과 투명하고 간소한 정부라는 간단하고도 핵심적인 과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인프라는 인도의 제조업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었다. 전기는 시시때때로 끊기는 것이 일상이었고, 기차는 절대 제 시간에 도착하는 일이 없었다. 이는 중국과 특히 비교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도 제조업의 부진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면 인도인들은 첸나이에 등장하는 아웃소싱 콜센터들을 얘기하면서 응수하곤 했다. 요컨대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면, 인도는 영어 구사 능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사무실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절망적으로 가난한 대국이 저임금을 우위로 삼는 제조업 바깥에서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디는 구자라트의 투자 요건을 간소화하고, 인프라 확충에 힘을 쏟았다. 효과는 금세 드러났다. 2008년 인도의 최대 재벌 타타그룹이 초저가 경차 모델 ‘나노’의 공장 부지를 고민 끝에 구자라트로 정한 것은 모디의 승리를 예시해준 사건이었다. 구자라트는 모디 시절 내내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며 인도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전 세계 최저가(약 2,000달러) 차량으로 화제를 모았던 '나노'. 사진은 나노를 소개하는 타타 회장의 모습. (출처: AP Photo/Gautam Singh)
전 세계 최저가(약 2,000달러, 기본형) 차량으로 화제를 모았던 ‘나노’. 사진은 나노를 소개하는 타타그룹의 라탄 타타 회장. (출처: AP Photo/Gautam Singh)

Make in Hindu

약화된 만모한 싱과 의회당의 리더십을 돌파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인도인민당을 이끌게 된 모디는 어머니 소냐 아래에서 위축되어 보이는 라훌 간디를 누르고 집권에 성공한다. 모디는 이제 세간에 ‘모디노믹스’라고 알려진, 자신이 구자라트에서 효과를 봤던 그 정책을 인도 전역에 적용할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Make in India”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와 인도의 제조업을 부흥시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공약했다.

바지파이와 만모한 싱을 거쳐가며 서서히 침식되던 네루의 유산은 모디의 등장으로 급물살을 타며 퇴장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와 관료 집행자들은 이제 ‘적폐’였다. 대신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인도 기업인들이 투자할 기회를 찾으며 인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들 사업가와 중산층들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독실한 힌두교도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충성의 대상은 영국이 기틀을 닦고 네루가 세운 ‘인도 공화국’이 아니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인도라는 개념은 이제 더 이상 와닿지 않았다. 그들은 수십년 간 표출이 억압되었던 힌두교 전통을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 전통은 힌두교 의식뿐만 아니라 무슬림과 하층 카스트에 대한 멸시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Make_In_India

모디 정부는 7%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며 경제개혁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동시에 힌두교에서 성스럽게 여기는 소를 도축하고 먹는다는 이유로 무슬림들을 습격하는 사건들이 폭증했다.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세속주의도 인도에서는 퇴조할 위기에 놓였다. 아마 모디의 슬로건은 “Make in India”보다는 ‘Make in Hindu’로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힌두 민족주의의 등장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그림이다. 히말라야 산맥 너머에 이미 비슷한 류의 사람들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결부된 정도는 약하지만, 전투적 대중 민족주의자들의 등장은 중국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다. 이들은 중국 정부로 하여금 강경한 대외정책을 고수하도록 압박했고, 자국만의 에너지와 자원 공급망을 확보해야 했던 중국 공산당은 바깥으로 나가며 자신의 야심과 민족주의자들의 열망도 채워주고 있었다.

용의 올가미

이제 인도도 비슷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도는 적극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행동을 시작해야 했고, 그로써 국내의 지지기반을 단단히 다져야 했다. 차츰 잠을 깨던 코끼리는 이제 완전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코끼리는 자신들보다 수십년 더 전에 잠에서 깬 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자국을 둘러싼 포위망을 뚫으려는 베이징의 시도는 자연스럽게 인도양 지역에서의 팽창으로 이어졌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스리랑카, 이란, 케냐, 인도네시아 전역이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가까워졌다.

인도는 점차 중국의 공격적인 팽창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설령 중국이 인도에게 적대할 의사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미 중국의 행보는 남아시아에서 갖는 인도의 주도권을 명백히 침해할만한 수준이었다. 중국은 인도양의 항구들을 차지하는 자신의 구상을 ‘진주 목걸이 전략’이라고 불렀다. 중국이 투자를 시작한 항만들을 지도에서 엮으면 나오는 모양이 마치 목걸이 같아서 생긴 별칭이었다.

하지만 인도 입장에서 볼 때 진주 목걸이는 명백히 ‘진주 올가미’였다. 올가미를 끊고자 하는 인도의 계획이 시작되었다.

왜소한 코끼리

그러나 인도의 국력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곤 하지만, 중국에 비해 너무 역부족이었다. 마오쩌둥과 네루 모두 경제발전이라는 면에서는 시간을 크게 낭비했다. 공통점은 거기까지였다. 마오쩌둥과 네루가 축적해놓은 국가적 역량의 차이는 컸다. 철도망, 문해율, 기대수명 등 인간개발의 모든 면에서 중국은 인도를 앞질렀다(공정을 기하기 위해 네루 왕조 시절 인도에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없었다는 점도 언급해둔다). 그리고 네루 ‘왕조’는 일개인인 마오쩌둥보다 오래 갔다. 자연스레 덩샤오핑의 중국은 나라시마 라오의 인도보다 15년 먼저 일찍 문을 열었다. 80년대 중국에서 벌어진 개혁파와 보수파의 논쟁을 인도는 2000년대까지 끌고 갔다.

시간의 차이는 GDP의 차이로 이어졌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할 무렵, 중국과 인도의 GDP는 모두 2천억 달러를 넘지 못했고, 그 차이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200억 달러가 안 되었다. 하지만 2017년이 되자 결과는 확실해졌다. 두 나라는 모두 13억의 인구 대국이었지만, 중국의 GDP는 11조 달러였고, 인도의 GDP는 2조 4천억 달러였다. 경쟁한다는 말 자체가 통하지 않았다. 모디는 인프라를 확충하고자 했지만, 자금과 기술은 여전히 부족했다. 그러나 중국은 대륙 전체에 고속철을 놓고 있었다(그러다 사고가 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중국 앞에선 작아지는 인도
중국 앞에선 작아지는 인도

이제는 행동(Act)에 나설 때

모디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20년 전에도 나라시마 라오 총리가 “Look East”를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의회당 총리인 라오는 네루의 유산에 어쨌든 묶여 있었다. 국민의회 바깥에서 등장한 모디는 네루에게 진 빚이 없었다. 비동맹주의를 읊을 시간에 동맹을 찾아야 했다.

모디는 앞으로는 동쪽에서 ‘행동’하기로 선언했다. “Act East”로의 전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동쪽의 태평양으로 다가가는 인도가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중국 남쪽에서 인도는 이제 막 중국과 부딪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동쪽에서는 이미 부딪히고 있는 나라가 있었다. 일본이었다.

센카쿠와 라다크는 그렇게 만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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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오래된 미래 

  1. ‘라다크’에서의 패싸움
  2. 헬싱키의 함정 
  3. 누가 인도양의 주인이 되는가
  4. 아베의 몸부림
  5. 힌두 민족주의가 삼킨 네루의 유산 
  6. 21세기 ‘그레이트 게임’
  7. 한국, 자기부정과 과대망상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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