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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7년 확진 사건(대법원): 희귀질환 노동자의 산업재해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린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가 걸린 병이 사업장 때문이라는 주장을 할 경우,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법률용어로는 ‘업무상 재해’)를 신청할 수 있다. 산업재해로 인정받으면, 치료비를 받고, 사망한 경우에는 유족연금도 받는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선 두 개의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한다. 하나는 통상의 입증책임이고, 나머지 하나는 희귀질환에 걸렸을 경우에 부여받는 더 어려운 입증책임이다.

희귀질환 노동자의 ‘두 번째 산’

우리 법은 산재 인정으로 노동자가 이득을 보므로 노동자에게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할 책임을 지운다. 물론, 법원은 자연과학에서 요구하는 엄밀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노동자는 사업장에서 질병의 원인으로 규명된 물질이 사용되는지, 그 노출 경로, 노출량과 노출 기간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서 주장할 책임은 있다.

즉,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 노동자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은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관관계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희귀질환에 걸린 경우, 하나의 산을 더 넘어야 한다. 만약 폐질환과 같이 비교적 원인이 명확히 알려진 병에 걸린 경우, 사업장에서 석면 따위를 사용하였는지, 그 노출 경로, 노출량과 기간에 관한 자료를 증거로 제출하면 된다. 정부 조사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런데 질병의 ‘원인’이 불명인 경우, 원인으로 ‘의심’되는 여러 물질들이 사업장에 있는지를 모두 찾아서 주장해봐야 한다. 그리고 ‘원인’ 물질, ‘의심’ 물질이나 단지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어도 모두 찾아서 주장을 하고 설득해야 한다.

고통 기다림 슬픔 출구 손 성희롱 피해자 절규

희귀질환에 걸린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인정받으려면 더 크고 험한 산을 넘어야 한다.

첨단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여기서 두 번째 산에 막힌다. 노동자가 사업장에 관해 대개 불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정부 조사가 불가피하다. 그런데 어떤 물질을 용의선상에 두고 조사할지에 대해서, 정부는 노동자의 의견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반도체나 LCD 제조업 등 첨단산업은 발전 속도가 빠르므로, 사용되는 화학물질도 수시로 바뀌어서 과거의 근무환경과 조사당시의 환경이 상당히 바뀌어있다.

결정적으로 공장에서 사용하는 물질과 작업방식 등이 영업비밀로 보호된다. 그러므로 사업주는 영업비밀 보호를 이유로 조사에 있어서 자료 제출을 거부한다. 심지어 정부기관조차도 조사를 하고나서 영업비밀보호를 이유로 노동자에게 조사보고서의 공개를 거부한다. 노동자가 증명의 책임을 지면서도, 증명에 필요한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없는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희귀질환 노동자의 산업재해 판단 기준 

먼저, 희귀질환 노동자의 산업재해 인정에 관한 기념비적인 판결이 최근 선고됐다(대법원 2017. 11. 14. 선고 2016두1066 판결).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첨단산업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이른바 ‘희귀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 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대법원은 질병의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거나 사업장에 대한 자료가 불충분하더라도, 아래와 같은 사실들을 두루 살펴서 산재 인정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대법원

대법원

1. 통계 자료와 비교 

대법원은 희귀질환의 평균 발병률이나 연령별 평균 발병률보다도, 특정 산업 종사자 군(群)이나 특정 사업장에서 그 질환의 발병률 또는 일정 연령대의 발병률이 높은 등의 통계 자료를 고려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개별 노동자의 산재인정을 판단함에 있어서 통계자료가 유리한 경우 간과해선 안 됨을 밝힌 것이다.

2. 조사 거부 =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또한, 사업주의 협조 거부 또는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 등으로 그 질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작업 환경상 유해 요소들의 종류와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었다는 등의 사정도 고려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사업주가 정부 조사에서 조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노동자에게 유리한 사정이라고 보았다.

3. 불성실한 조사 결과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정부 조사에서 원인 물질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외의 원인들, 즉 발병 의심 물질이나, 질병과 관계없더라도 인체에 유해한 물질 등에 관하여 정부가 밝힐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경우, 그러한 불성실한 조사 결과는 노동자에게 유리한 사정이라고 보았다.

4. 영업비밀 공개거부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그리고 위 정부 조사를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5. 유해물질의 ‘복합적·누적적’ 작용 

그리고 질병 원인으로 밝혀지지 않은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유해물질이나 유해 요소가 존재하는 경우 개별 유해인자들이 특정 질환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퇴사 7년 뒤 확진’ 노동자의 산재 인정 

이 글에서 다루는 사건 판결도 앞서 살핀 대법원 판결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광장에 나온 판결: 

  • 대법원 2017. 11. 14. 선고 2016두1066 판결 
  • 대법관 이기택(재판장) 박보영(주심) 김창석 김재형

판결의 의미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무 종료와 발병 사이에 상당한 기간이 있더라도 산재 인정 가능하다.” 

망인이 입사한 뒤에 뇌종양 진단을 받기까지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 1997년에 19세의 나이로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
  • ’97년~2003년까지 고온테스트 공정에서 6년간 근무.
  • 2003년 7월 15일에 퇴사하여 결혼하고 두 아이 출산.
  • 2010년 5월 5일에 뇌종양(교모세포종) 진단.
  • 2012년 5월 7일에 사망, 망인의 유족이 산재 신청.

환자

대법원은 망인이 1) 이 사건 사업장에서 측정된 발암물질의 수치가 노출 기준 범위 안에 있더라도 장기간 노출될 경우 건강 장애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2) 그리고 여러 유해인자에 복합 노출될 경우의 상승작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3) 또한, 4조 3교대, 3조 3교대 근무, 바쁠 경우 1일 12시간 근무로 신체주기가 불규칙한 사정도 고려하였다.

4) 아울러 정부 조사에서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에 대한 노출 수준이 측정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망인과 동료들이 고온테스트 공정 이후 ‘검댕’이 날렸고, ‘고무타는 냄새’가 났으며, ‘유해한 연기와 화학물질에 노출’되었다고 진술하였음에도, 정부가 이에 관하여 조사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물질에 노출되었는지를 규명할 수 없었다고 보았다. 5) 또한, 망인이 우리나라 평균 발병연령보다 이른 만 30세에 뇌종양이 발병하였다는 사정에도 주목하였다. 6) 그리고 망인이 걸린 교모세포종은 성장이 빠르고 예후가 좋지 않지만, 이는 발암물질에 노출되어 발병하는 시간이 짧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망인이 퇴사한 이후 7년이 경과하여 확진을 받았더라도 업무와의 관계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대법원은 보았다.

그동안 쌓여왔던 운동의 힘

이 판결을 대리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는 판결의 의미를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동안 쌓여왔던 운동의 힘”

2007년부터 사회 각층의 노력이 모여 선행판결과 대상판결이 나올 수 있었다. 노동자와 유가족, 반올림은 탐정이 되어야 했고, 수년간 법정다툼을 하였다. 회사인 삼성전자뿐만이 아니라 근로복지공단, 산업안전보건공단, 지방노동청과 같은 정부기관과도 싸웠다. 그 와중에 시간이 흐르고, 사업장은 개선되지 않은 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시위 현장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시위 현장 모습.

삼성반도체 산업재해 사건을 소재로 다룬 [또 하나의 약속]에서 아버지의 약속이 결과를 맺기까지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의 역할이 컸다. 극중 이 노무사 역할로 나오는 김규리(오른쪽)는 흥분하지 않고 묵묵히 싸움을 해 나가는 이 노무사를 잘 연기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숨진 고 황유미 씨의 이야기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 (2013) 중 한 장면. 아버지의 약속이 결과를 맺기까지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의 역할이 컸다. 극중 이 노무사 역할로 나오는 김규리(오른쪽)와 아버지를 연기한 김철민(왼쪽).

사업주는 은폐했고 정부는 의도적으로 눈감았다. 법원은 이제 그런 방식은 안통한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산재은폐로 인하여 무재해사업장으로 지정될 경우의 보험료 감면액을 뛰어넘는 액수의 징벌적 손해배상이 필요하다.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 사용되는지에 관한 정부의 조사권이 강화되어야한다. 정부조사단계에서 노동자의 참여권이 보장되어야한다. 재발방지야말로 노동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이 글은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의 기획 연재 ‘광장에 나온 판결’ 중 하나로, 필자는 손익찬 변호사(변호사,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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