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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진타오의 기적과 혼란(2003-2012)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후진타오의 임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국내외 많은 관찰자가 이제 중국과 공산당의 미래를 의구심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당내 부패는 너무나 심각하게 만연해 있었고, 군부는 문민 통제에서 점차 이탈해나갈 조짐을 보였으며, 보시라이 사건과 같은 정치적 스캔들은 당의 분열을 암시하면서 중국을 영도하는 조직으로서 공산당의 위신과 신용을 깎아버렸다. 그러나 연해 지방과 내륙 지방의 격차,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발전, 부패로 인한 민심 이반 등의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2의, 제3의 보시라이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급진 마오이즘을 표방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이 성행하면서 공산당 정부를 비판하며 보시라이 처벌의 부당함을 외치고 있었다. 선전부는 성향상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류샤오보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 사이트들을 보이는 족족 폐쇄했지만, 언제까지나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임시방편으로 대응할 수만은 없었다. 중국 공산당이 자랑하는 최고의 장기인 경제 성장에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이다.

2012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7.8%를 기록하여 본격적인 개혁개방 이래 최초로 8%를 하회했다. 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주룽지 총리가 사회안정을 위해 8%의 성장률을 지키자는 ‘바오바(保八)’를 선포한 이래로 최초였다. 그리고 주룽지 총리 이래로 국내외 많은 인사들은 8%의 성장률을 유지해야 중국에서 끓어오르는 사회적 불만을 무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국은 어떻게든 8% 성장률을 유지하도록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내려가는 성장세를 억지로 막는 것은 더욱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2012년에 당국은 대규모 부양책 실시를 단념하고, 바오바 정책을 포기하였는데, 이는 중국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8% 선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7% 성장률(바오치)도 무너지고 6% 성장률(바오류)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로 들렸다.

경제성장률 8%(바오바)는 온갖 사회적 불만을 무마할 수 있는 '마법'의 숫자였다. 그 8%가 붕괴할 조짐이 보이자 위기가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경제성장률 8%를 지키자!(‘바오바’) ‘8’은 온갖 사회적 불만을 무마할 수 있는 ‘마법’의 숫자였다. 그 8%가 붕괴할 조짐이 보이자 위기가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만약 저성장 국면에서 중국이 거대한 농민 출신 이주자에게 추가적인 고용을 제공하지 못하고 연금수령자에게 제대로 사회안전망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공산당의 통치는 지속될 수 있을까? 그리고 금융위기 이후 세계의 가장 큰 성장엔진이 된 중국마저 무너진다면 세계 경제의 미래는 어디로 갈까? 이제 중국 경제에 대한 우려는 세계 경제에 대한 우려와 직결되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2012년 11월에 모습을 드러낸 제5세대 지도부는 13억 인민을 다스리는 최고 지도부에 편입되었다는 기쁨으로 웃고만 있을 수 없었다. 시진핑 총서기와 리커창 총리를 필두로 출범한 지도부는 각종 짐을 얹은 채로 중국과 세계의 우려를 불식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이 느낀 부담감은 아마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 위에서 미국과 세계의 희망을 한 몸에 받고 당선된 오바마가 느껴야 했던 부담감과 비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례적인 권력 승계

18차 당대회 결과물에는 특기할만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어쩌면 지도부를 비롯해 공산당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가졌던 불안감(혹은 희망?)을 반영한 선제적 대응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총서기이자 국가주석인 시진핑이 실질적인 권력의 원천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까지 함께 맡으면서 임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많은 관찰자의 예측을 뒤집는 결과였는데, 전임자들인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쩌민의 경우, 1989년 자오쯔양 총서기가 실각한 뒤 그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중앙군사위주석도 덩샤오핑에게서 넘겨 받았다. 하지만 실질적인 군권은 전설적인 카리스마의 덩샤오핑이 가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1992년 남순강화 때 덩샤오핑은 (기대와 달리) 개혁개방에 소극적으로 나온 장쩌민에게 경고 차원에서 군대를 움직여 총서기를 차오스로 바꿀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허약했던 장쩌민이 완전한 자율성을 갖게 되는 건 집권 2기차가 된 1997년이 되어서나 가능했다. 바로 그 해가 덩샤오핑이 죽은 해였다. 아마 그가 후임인 후진타오에게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넘겨주는 것을 2년 미루었던 것도 자신의 경험을 선례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많은 관찰자들은 후진타오도 장쩌민과 자신의 선례를 이어 받아 시진핑에게 2014년쯤이 되어서야 군권을 물려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예측은 실현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변이라고 했고 다른 이들은 권력 승계 절차가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형태로 정착했다고 평가했다. 무엇으로 평가하든 시진핑은 당 총서기와 국가 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이라는 세 개의 핵심 직책을 한 번에 후진타오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때부터 시진핑의 일인체제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막강한 권한을 받은 시진핑은 반부패 사정으로 수많은 정적을 쳐냈고, 2016년에 영도 핵심 지위를 부여 받으면서, 끝으로 2017년 19차 당대회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사상’을 당장에 삽입함으로써 독재적 권력자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시진핑

삼대파벌의 힘겨루기?

그렇다면 후진타오는 도대체 왜 기존 관례를 깨고, 자신이 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시진핑에게 바로 넘겨준 것일까? 자연스럽게 의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시진핑은 대체 누구고 어째서 그는 총서기로 발탁될 수 있었나? 누가 그의 경쟁자였고 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선택되었는가? 그리고 왜, 어떻게 시진핑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던 걸까? 문제는 이런 의문들에 답을 찾으려고 할 때부터 중국 정치라는 ‘대나무 미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점이다.

중국 정치는 생소한 직책과 인명 때문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깊숙히 들어가면 길을 헤메기 일쑤다. 이를테면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나라를 이끈다고 말하지만, 사실 정확히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하는 업무를 딱잘라 정의해서 말하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다. 또한, 당 조직부 부장이나 중앙당건설공작영도소조 조장 같은 직책을 들으면 머리가 아파온다. 이런 직책들은 적당히 이름에서 유추하여 의미를 파악하며 넘길 수 있다 치자. 하지만 1949년 이래로 거미줄 같이 얽히고 섥힌 정치인들 간의 네트워크를 파헤치다보면 ‘죽의 장막’에 들어간 기분을 안 느낄 수가 없다.

특히 이런 혼란은 중국 공산당을 분석할 때 흔히 쓰이는 파벌 개념 때문에 더 복잡해진다. 누구나 태자당, 상해방, 공청단을 말하지만 어떤 자료에서는 태자당인 사람이 어떤 자료에서는 상해방이고 이들이 실체가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시진핑에게 바로 넘긴 이유와 시진핑이 최고지도자 반열에 오르게 된 이유에 대해 답을 찾다보면 모두가 이 파벌과 인맥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기에, 무시할 수도 없다.

파벌 경쟁 그룹 갈등

이 파벌체제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런 식이다. 등소평 사후, 중국 공산당에는 공통의 정치적 배경을 바탕으로 성장한 이들끼리 모인 파벌 구도가 새로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파벌들 간의 알력과 협상, 조정은 구체적인 권력 배분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파벌들은 태자당, 공청단, 상해방인데, 각각을 설명하면 이렇다.

1. 태자당(太子黨)

말 그대로 태자들의 당이라는 뜻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일익을 담당한 건국 원훈들의 자제들끼리 형성한 인맥을 뜻한다. 이들은 부모의 후광을 등에 업어 개혁개방 초기부터 각종 사업 영역과 정치권에 빠르게 진출할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의 양자인 리펑, 시중쉰의 아들인 시진핑, 야오이린의 사위인 왕치산, 보이보의 아들인 보시라이 등이 속해있다.

태자당: 리펑, 시진핑, 왕치산, 시라보이
태자당: 리펑, 시진핑, 왕치산, 보시라이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2. 공청단(共青團)

‘공산주의청년단’의 약자로, 구 소련의 콤소몰과 같은 조직이다. 정치인 중에서 젊었을 적 공산주의청년단 활동을 하며 쌓은 인맥이다. 2003년부터 후진타오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자신의 심복들을 공청단 출신으로 많이 충원하였으며 당내에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다. 후진타오, 리커창, 후춘화, 왕양 등이 속해있다.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파):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파):후진타오, 리커창, 후춘화, 왕양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3. 상하이방(上海帮)

중국의 경제수도 상하이에서 형성된 파벌이다. 상하이 공산당 서기를 지내던 장쩌민이 중앙 정계로 발탁되면서, 상하이 시절부터 같이 일해온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한 것을 그 기원으로 한다. 1995년 베이징 서기를 맡은 천시퉁과 베이징방을 부패혐의로 몰아내면서 전면에 등장했다. 장쩌민, 우방궈, 장더장, 쩡칭훙, 천량위, 왕후닝, 한정 등이 상하이방이라고 평가된다.

상하이방: 장쩌민, 우방궈, 장더장, 쩡칭훙, 천량위, 왕후닝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3ÔÂ15ÈÕ£¬Ê®¶þ½ìÈ«¹úÈË´óÎå´Î»áÒéÔÚ±±¾©ÈËÃñ´ó»áÌñÕÄ»¡£Ï°½üƽ¡¢Àî¿ËÇ¿¡¢ÓáÕýÉù¡¢ÁõÔÆɽ¡¢ÍõáªÉ½¡¢ÕŸßÀöµÈµ³ºÍ¹ú¼ÒÁìµ¼ÈËÔÚÖ÷ϯ̨¾Í×ù¡£ ¡¡¡¡Ð»ªÉç¼ÇÕß À¼ºì¹â Éã
상하이방: 장쩌민, 우방궈, 장더장, 쩡칭훙, 천량위, 왕후닝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중국 정치는 전현직 지도자들 사이의 권력 암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개혁개방 이후로 전례없이 창출된 부와 권력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이전투구다. 그래서 장쩌민은 후진타오를 집권 내내 괴롭히며 상왕 노릇을 한 것이고, 그에 대항해 후진타오는 공청단이라는 자신만의 세력을 만든 것이며, 태자당은 둘 사이의 다툼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득을 봐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올릴 수 있었다는 해석이 흔히 나오는 것이다.

시진핑의 권력 강화도 마찬가지로 설명된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파벌인 공청단의 영향력을 보장받고 장쩌민이 5세대 지도부에서도 상왕 노릇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진핑에게 은혜를 베풀어둔 것이다. 아니면 상하이방의 장쩌민과 태자당의 시진핑이 연합하여 후진타오로 하여금 권력이양을 강요한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후 이어지는 시진핑의 권력 강화는 당연히 자신의 권력욕을 달성하기 위해 전임자들과 경쟁자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한 결과물이다.

반쪽짜리 설명

이처럼 태자당, 공청단, 상해방을 중심으로 한 파벌 체제로 중국의 권력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다. 확실히 파벌구도는 의사결정 과정을 절대 공개하지 않아 오직 단편적인 단서에만 의존해야만 하는 중국 정치를 분석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실제로 그와 같은 파벌 그룹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사실로 보이며, 공산당 핵심 인사들의 주요한 행동 동기가 권력과 이권이라는 것도 꽤 명백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시각이 중국 정치, 나아가 정치 전반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에 근거해 있다고 본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소위 ‘삼당체제'(기존 시각을 편의상 이렇게 부르도록 하겠다)만으로는 후진타오 시대의 정치적 스캔들과 시진핑의 부상, 나아가 권력강화를 충분히 설명해낼 수 없다.

첫째로, 이 파벌들은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며 느슨한 인맥 그룹에 불과하다. 그래서 여러 파벌에 걸친 사람들이 충분히 나올 수 있으며, 파벌 내부에서 통일된 목표를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도 못한다.

물음표

이를테면 건국 원훈의 자제로, 공청단에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상하이에서 주로 활약한 정치인은 어느 파벌에 속하는가? 이런 인사들은 중첩된 소속 파벌 간의 협상과 중재의 다리가 되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파벌 자체가 고정적 실체보다는 느슨하고 유동적인 네트워크에 가까운 이유이기도 하다. 보시라이가 대표적이다. 보시라이는 명백히 태자당이지만, 장쩌민의 심복이었던 저우융캉과의 유대관계 덕에 상하이방에도 친분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경력 상 두 파벌에 겹치는 사람들을 보다 정확하게 분류해낼 다른 기준이 더 필요할 것이다.

무엇이 그렇다면 그 다른 기준이 되어줄 수 있을까? 여기에 내가 조금 더 강조하고 싶은 두 번쨰 이유가 있다. 그를 알기 위해서는 정치인은 권력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전제에 의심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확실히 권력은 정치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며, 정치인의 많은 활동은 결국 궁극적으로 권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삼당체제론으로 바라보는 중국 공산당 내부의 암투는 이런 시각에 기초해있다. 예컨대 공청단이 후진타오 집권 시기에 영향력을 확대해간 과정에 대한 설명이나 장쩌민이 퇴임 이후에도 정치에 개입한 이야기를 보자면 결국 그들의 행동 원인은 권력욕으로 귀결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장쩌민은 퇴임 이후에도 권력의 강렬한 맛을 즐기기 위해 후진타오에 간섭한 것이고, 후진타오는 장쩌민에 대한 자율성(더 큰 권력)을 얻고자 천량위를 숙청한 것이며, 보시라이도 결국 권력경쟁에서 탈락한 자신의 상황에 반전을 기하고자 충칭에서 적극적 행보를 보인 것이다.

문제는 노선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마오이즘의 종말과 함께 정치적 이상을 향한 투신이 끝나고, 암흑의 세계로 들어가 지폐만 쌓아올리는 중국 공산당을 바라보는 최선의 설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설명에 불과하다. 권력은 정치의 근간을 이루지만 권력이 정치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정치인들이 권력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권력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정치인들에게 권력은 목적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견지에서 보면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이는 죽의 장막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가리는 중국의 정치인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정치인들은 권력을 써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흔히 비전이라고 부른다. 나름의 비전이 없는 정치인이란 거의 없다. 우리는 조 단위로 부패를 저지르는 천량위나 저우융캉 같은 이들을 보면서 권력과 돈에 눈이 먼 이들이라고 비판하지만, 심지어 그런 이들에게도 사회와 조직에 대한 자신만의 비전은 존재한다. 그리고 단순한 완력보다도 더 호소력이 높은 비전을 갖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이들이 권력 경쟁에서도 최종적으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인류의 유구한 정치사가 증명해온 바이기도 하다.

후진타오가 조화사회를 외치고 보시라이가 충칭 모델을 만들어낸 것은 권력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자신들이 다스리는 사회를 그런 비전에 따라 재조직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기도 하며, 바로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 밑으로 모이는 것도 그 비전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시진핑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시진핑의 권력 확대 동기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의 정치적 승리에는 ‘중국의 꿈’이라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강렬한 비전이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국 정치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각 정치인들이 중국에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와 비전도 따져봐야 한다. 공산당식 표현을 빌려오자면, 결국 문제는 노선이다. 파벌에만 집중한다면 노선이 갖는 강력한 영향력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노선갈등과 파벌갈등을 겹쳐 보아야만 한다. 그래야 시진핑을, 또 그를 권력자로 만들어준 공산당을 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1980년대로 돌아가자.

시진핑의 정치적 슬로건인 '중국의 꿈'을 청나라 건륭 황제가 절대 권력을 누리며 서방에 복종을 요구한 1793년에 빗대 비판적으로 분석한 이코노미스트(2013년 5월호)
시진핑의 정치적 슬로건 ‘중국의 꿈’을 청나라 건륭 황제가 절대 권력을 누리며 서방에 복종을 요구한 1793년에 빗대 비판적으로 분석한 이코노미스트(2013년 5월호)

개혁개방기의 노선 갈등

진정한 현대 중국은 78년 3중전회부터 시작되었다(1편 참조). 노선 및 파벌 갈등도 마찬가지다. 78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개혁파와 보수파의 노선 갈등이 지금 중국 공산당의 노선 갈등의 직접적인 뿌리라고 할만하다. 천윈, 보이보, 덩리췬 등은 보수파를 이루었고 덩샤오핑, 만리, 후야오방, 자오쯔양, 시중쉰 등은 반대편에서 개혁파를 이끌었다.

이 두 파벌은 그 이전 계획경제 시절과 관련된 모든 유산을 놓고 갈등했다. 개혁파는 집단농장을 사실상 해체하고 개별 농가에 생산과 거래 면에서 자유를 주는 ‘포산도호(包産到戶)’ 정책(중국의 농가생산책임제 중 한 형태)을 시범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놀라운 성공을 거둬 곧바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기존의 집단농장체제는 농촌의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동조합 형태의 기업을 설립하도록 허가하면서 향진기업 체제로 빠르게 전환된다. 광둥성과 푸젠성에는 경제특구가 설립되어 외국자본을 투자 받았고, 정부의 가격통제도 점차적으로 해제되었다.

중국 농촌

보수파는 개혁개방 정책이 가져온 부작용들을 지적하면서 개혁파들을 공격했다. 개혁파들은 중국이 민주적인 시장경제를 갖춘 나라로 변모하기를 원했으나 보수파들에게 개혁개방은 중국의 사회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일시적 후퇴에 불과했다.

그들이 보기에 개혁개방은 너무나 많은 혼란을 가져다주는 정책이었고, 반드시 한계가 설정되어야 했으며 속도는 조절되어야 했다. 경기과열과 인플레이션은 긴축정책으로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몇몇 개혁파들이 옹호하는 정치적 자유화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가 부활할 것이고 통제력을 잃은 중국은 혼란으로 빠져들어 외세에 휘둘릴 것이 틀림 없기 때문이었다.

천안문과 그 여파

80년대의 격렬했던 학생시위는 이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당시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 살았던 대학생들은 개혁개방이 낳은 부작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경기가 과열될 때 도시경제는 사실상 혼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가격통제 완화를 미리 알고 있는 이들이 그 차익을 노려 투기 행위로 막대한 이득을 봤고 밀수가 판을 쳤다. 인플레이션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각지의 학생들은 개혁개방이 낳은 문제의 원인을 고위 당원과 그 자제들의 부패와 특권 남용으로 지적했고, 공산당의 개혁과 언론의 자유, 정치적 권리 확대 등을 요구했다. 개혁파 지도자였던 후야오방은 이런 시위에 단호히 대처하지 못했고 천윈과 보이보를 비롯한 보수파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주어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총리였던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의 총서기 지위를 이어받았으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곧바로 더 거센 학생 시위의 물결과 마주해야했다. 후야오방이 죽은 뒤 그를 추모하는 시위가 베이징에서 시작될 때가 절정이었다. 천안문 사태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천안문을 점거하고 마오쩌둥 초상화를 노려보는 ‘민주의 여신상’을 만들어 당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마침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킬 수도 없었다. 보수파는 이를 갈면서 고르바초프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렸고, 개혁파의 거두인 덩샤오핑의 인내심도 바닥나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을 한 치도 의심한 적이 없었고,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유도 공산당의 통치를 일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철부지 학생들’ 때문에 보수파들에 개혁개방의 정당성 자체가 부정당할 위기에 처했으니 덩샤오핑은 시위대를 좋게 볼 수 없었다. 마침내 고르바초프가 돌아가자 보수파는 군 투입을 요청했고 덩샤오핑이 이를 승인하면서 천안문의 학살이 시작됐다. 자오쯔양은 사태 악화의 책임을 물어 실각했고, 가택연금 처지에 놓인다. 개혁파는 그렇게 패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1989)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으로 끝났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1989)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으로 끝났다.

덩샤오핑은 이후 보수파가 득세하면서 개혁개방 정책들이 차츰 후퇴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반전하려면 빠른 대책이 필요했다. 천안문 사태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85세였다. 그러나 그가 후계자로 지목한 이들은 모두 그의 자리를 최종적으로 넘겨받지 못하고 중도에 낙마해야만 했다. 이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지속하려면 다른 종류의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개혁 성향이 너무 강했다. 그들은 보수파의 공격에 쉽사리 대처할 수 없었고, 국가의 위기 상황에 단호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 의심 받았다. 보수파는 이번이 덩샤오핑이 후계자를 지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덩샤오핑이 마지막 반전의 카드로 꺼내든 것이 상하이시 서기로 있던 장쩌민이었다.

‘중도파’ 장쩌민 그리고 태자당의 부상

덩샤오핑 입장에서 장쩌민에게는 여러 장점이 있었다. 첫째로 그는 천안문에서 피를 묻히지 않았다. 곧이어 중국이 세계무대로 다시 복귀해야할 시점에서 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둘째로 그는 천윈과 보이보 같은 보수파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만한 인물이었다. 물론 당내 보수파들은 리펑을 가장 좋아했겠지만, 덩샤오핑은 리펑을 선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학생시위를 비교적 평화적으로 해결한 경험이 있었다. 장쩌민은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처럼 시위대의 꼬임에 역으로 넘어갈 일도, 아니면 리펑처럼 무작정 유혈진압을 명령할 일도 없어보였다. 요컨대 장쩌민은 갈등이 극에 달한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 타협의 산물로 간택된 중도파였다.

후진타오의 손발을 묶은 장쩌민
‘중도파’라서 덩에게 선택된 장쩌민

장쩌민의 부상이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점은 장쩌민의 정치적 지향점이나 이후 행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권력의 흐름을 읽어내는 데 탁월했다. 그래서 장쩌민은 처음부터 덩샤오핑의 의도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도 처음엔 천안문 사태 직후의 분위기와 대세를 따라 보수파 쪽에 상당히 경도됐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대세를 달리 평가했다. 덩은 공산권의 붕괴, 천안문 사태의 여파로 고립된 중국, 걸프전으로 입증된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과 같은 제반 여건을 고려했을 때 하루라도 빨리 전면적 개혁개방을 실시해야 공산당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남순강화를 그래서 시작했고, 덩의 판단은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다시피 이를 계기로 풀려난 중국의 엄청난 에너지는 장쩌민을 압박했고, 장쩌민 역시 종국에는 개혁개방에 기울도록 만들었다.

덩샤오핑 남순강화 (1992)
덩샤오핑 남순강화 (1992)

그렇게 장쩌민과 그의 측근 그룹인 상하이방이 걷기 시작한 노선은 이후 중국의 국가적 합의로 자리잡았다. 장쩌민의 노선은 어느 정도 자오쯔양이 주창한 ‘신권위주의론’을 계승한 것이었는데, 신권위주의론은 경제적인 면에서 자유화를 도입하고 정치적 통제를 유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노선을 뜻했다. 어떤 면에서 신권위주의는 정치적 자유화에도 어느 정도 유화적이었던 자오쯔양 본인보다는 당의 통제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장쩌민에게 더 어울렸다. 그리고 공산당의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하고 공산당이 허용한 선에서만 사회적,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사회계약은 나름 성공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인민은 경제성장의 과실을 불균등하게나마 누릴 수 있었고, 미래를 낙관할 자유가 허용되었다.

당도 통치 정당성을 제고(提高)하면서, 또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구보다 먼저 누리면서 이익을 봤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개혁개방의 초창기에 정권을 잡아 중요 요직에 두루두루 인사를 배치할 수 있던 상하이방이 가장 큰 승자였다. 그리고 정치적 연줄을 이용하여 연해 지역에서 경력을 시작할 수 있던 고위직 2세들(태자당)도 이에 만족했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뿌리 때문에라도 공산당 지배체제를 부정할 유인이 없었으며, 이미 그 체제에 편승해 막대한 이권을 쌓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이후 태자당을 이루게 된다.

상하이방과 태자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국영기업과 관련된 직책에 진출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했다. 장쩌민은 주룽지와 함께 국영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하면서 무려 3천만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을 해고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국영기업이 국가 경제를 주도해야 한다는 믿음은 고수했다. 장쩌민은 1950년대 창춘의 제1자동차공장에서 전기기술자로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재능을 인정 받아 모스크바로 기술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사회주의 전성기로 여겨지는 이 시기의 경험은 장쩌민에게 평생 동안 국영기업에 대한 우호적 시각을 견지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이후 석유 국영기업에서 커리어를 쌓은 저우융캉 같은 이들과의 친분으로 이어지게 된다.

상하이방은 80년대에 중도파로 시작했지만, 남순강화로 기존 보수파가 설 자리가 사라진 뒤에는 어느새 그들이 보수파의 자리를 차지했다.

단파(团派): 내륙에서 불어오는 바람

장쩌민과 태자당은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밑에서 성장한 정치 엘리트들은 여전히 당내에 잠복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후진타오와 함께 당내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한 공청단 세력이 그들이었다. 단파(团派; 퇀파이)라고 불리우는 이들 세력은 후진타오의 후원을 받으며 착실히 승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모로 상하이방이나 태자당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중국 정치의 기준에서지만, 단파에 속한 정치인은 정치적 자유화와 시장 주도 경제개혁을 지지했다. 이들은 대체로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내륙지방에서 경력을 쌓았고, 몇몇 핵심 지도자는 개혁파 거두인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과 강한 인연을 쌓기도 했었다.

단파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후진타오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중국의 최고 낙후지역인 간쑤성에서 시작해서 능력을 인정 받아 공청단 서기를 맡았고 이후 구이저우성 당 서기로 승진한다. 여기에는 후야오방의 아들인 후더핑과의 인연이 매우 중요했다. 후더핑의 소개로 후야오방과 독대할 수 있던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의 눈에 들어 능력을 인정 받으면서 고속승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파(团派)의 수장 후진타오
단파(团派)의 수장 후진타오

후야오방이 실각한 뒤, 정치적 생명을 보장받고자 많은 이들이 후야오방을 비판했지만, 후진타오는 이런 인연으로 인해 비판 행렬에 동참하지 않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이를 눈여겨 봤고 티베트에서의 소요을 진압한 과단성을 높이 사 장쩌민 이후의 후계자로 후진타오를 격대지정했다.

공청단을 통해 경력을 쌓은 인물은 아니지만 후진타오와 함께 지도부를 구성한 원자바오 전 총리도 유사한 배경과 성향을 가진다. 후진타오처럼 내륙 간쑤성에서 경력을 시작한 그는 후진타오와 함께 간쑤성 당서기인 쑹핑의 눈에 들어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1985년에는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행정적으로 보좌하는 중앙 판공청에 들어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밑에서 일했다. 천안문에서 학생들을 달래며 해산을 호소하는 자오쯔양 옆에 서 있는 사진은 가장 유명한 원자바오의 사진일 것이다.

천안문 무력 진압 직전인 1989년 5월 19일 확성기를 들고 시위대의 해산을 호소하는 자오쯔양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원자바오.
천안문 무력 진압 직전인 1989년 5월 19일 확성기를 들고 시위대의 해산을 호소하는 자오쯔양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원자바오.

하나의 당, 두 개의 파벌

단파는 이처럼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개혁파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올랐지만, 상황이 80년대와 비교해서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기 때문에 이들의 성향도 일정 부분 바뀌었다. 본디 성장 속도를 6% 정도로 조절하며 개혁개방의 부작용을 관리해야한다는 경제정책 기조는 80년대 보수파의 것이었고,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10%대 고속성장론을 주장하며 이에 반대했었다.

그러나 이제 성장지상주의는 새로운 보수파로 떠오른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주도하게 되었다. 연해지방에 자리잡은 이들은 이미 잘 나가는 연해지방을 중심으로 한 성장론에서 이득을 얻을 것이 더 많아졌다. 그들이 보기에 여전히 덩샤오핑의 선부론은 유용했다. 반면 낙후된 내륙지역에서 올라와 농촌과 내륙 도시의 사정을 잘 아는 단파는 성장지상주의를 일정부분 접어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농촌과 도시, 연해지방과 내륙지방의 불균형한 발전을 해소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차이는 지도부가 선호했던 간부 유형에서 잘 드러났다. 장쩌민은 경제성장을 위해서 대학에서 이공계 학문을 전공한 기술관료들을 적극 기용했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한, 대중 친화적이고 도덕성을 갖춘 일반 간부(generalist cadre)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두 노선의 대립 지점은 본질적인 곳에서는 바뀌지 않았다.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주축이 된 보수파는 국영기업을 통해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당의 정치적 통제력에는 한치의 의심과 흔들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즉,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하던 데로 하면 된다’는 게 보수파의 논지였다.

하지만 단파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개혁개방과 폭발적 경제성장이 낳은 부작용은 사회불안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단파가 보기에 중국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국영기업 중심의 수출일변도 경제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었다. 그 대신 혁신을 촉진하고, 민영기업의 효율성이 견인하는 경제로 탈바꿈함과 동시에 내수를 키워야 했다.

성장을 민간영역이 견인하게 되면 경제성장에 쏟아붓던 국가 역량을 다른 쪽으로도 조정할 공간이 생긴다. 이들은 국가의 역할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개혁개방을 주도하는 국가가 아닌 개혁개방의 부작용을 관리하는 국가가 되어야 했다. ‘조화사회건설’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몇몇은 금기시 되던 단어인 정치개혁을 공공연히 논하기도 했다.

조화사회 (출처: 신화사)
출처: 신화사

상하이방(장쩌민)과 태자당(리펑) = 엘리트주의 그룹 

브루킹스 연구소의 중국 센터 소장인 리청 교수는 이를 ‘일당양파'(One Party Two Coalitons system)라고 표현했다. 리청 교수에 따르면 한쪽에는 경제발전에 집중하고 정치개혁은 아직 논할 시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연해지역을 기반으로 한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있었다. 이들은 ‘엘리트주의 그룹’을 이루었다.

단파(후진타오) = 대중주의 그룹 

그 반대편에는 내륙지방을 기반으로 개혁개방이 가져온 각종 사회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균형 정책과 구조조정, 시장자유화와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단파가 있었다. 이들은 “대중주의 그룹”을 이루었다. 각 파벌은 서로 다른 정책 사고와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논쟁을 하거나 때로는 협력을 했다. 엘리트주의 그룹과 대중주의 그룹은 각자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 그룹은 경제, 금융, 대외무역 영역에서 쌓아온 인적네트워크와 관리역량이 뛰어났다. 중국의 당면한 최대 문제인 경제문제에 대해서 그들이 20여년 동안 쌓아온 전문성은 이미 여러 번 입증된 것이었다. 어쩌면 주룽지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증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태생적으로 부패문제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공정한 규칙과 투명한 감시가 없는 상태에서 너무나 많은 이권이 오가는 자리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대중주의 그룹은 하부 단위에서 인민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능했다. 또한 각종 사회, 환경문제 등을 관리하는 데 능했으며 부패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는 경제 분야의 요직에서 전문성을 축적할 기회가 마땅치 못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후진타오의 조용한 공세

후진타오 집권 1기에는 이런 노선 갈등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마 중앙군사위주석 직을 2년 간 더 할 정도로 막강했던 장쩌민의 권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중앙군사위주석을 받게 되는 2004년부터 독자 행보를 점차 시작한다. 이 때부터 그는 조화사회건설을 내세웠고 선부론(先富論)을 공부론(共富論)으로 전환하자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이 2005년에 후야오방 탄생 90주년을 기념하기로 결정한 것은 좀 더 적극적 신호였다. 후진타오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을 복권시킬 가능성을 조심스레 타진해본 것이다. 후진타오 집권기에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후야오방 복권 시도는 그가 장쩌민이나 여타 태자당 간부들과는 다르게 활동할 조짐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2006년 상하이시 서기 천량위 숙청은 정치세력으로서 단파가 반대파에 타격을 입힐 정도로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연해지역의 경기과열을 조절하고 숨을 고르는 거시경제 조정책을 들고왔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하고 빠르게 바뀌고 발전하던 상하이의 지도자인 천량위에게 긴축이란 곧 시간낭비였다. 그가 임기를 맡을 동안 최대한 상하이를 발전시켜 놓아야 최고지도부에 여유롭게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천량위는 장쩌민의 후원을 믿고 엘리트주의 그룹을 대변해서 후진타오-원자바오 지도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는 전에 확인한 대로였다. 천량위는 부패 감사에서 덜미가 잡혀 숙청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천량위 숙청을 제외하고 지도부 내의 분열이나 노선갈등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상하이방(上海幇)의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고 후진타오의 권력에 노골적으로 도전한 천량위. 그는 중앙당의 긴축정책에 극렬하게 반발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결국 '비리' 혐의로 숙청됐다.
상하이방(上海幇)의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고 후진타오의 권력에 노골적으로 도전한 천량위. 그는 중앙당의 긴축정책에 극렬하게 반발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결국 2006년 ‘비리’ 혐의로 18년형을 선고받고 권력에서 밀려난다.

경제의 대지진

좀 더 본격적인 지도부 내의 갈등은 후진타오 2기부터 본격화되었다. 집권 2기가 시작되는 2008년은 여러모로 분수령이었다. 이 해에는 쓰촨 대지진과 베이징 올림픽, 멜라민 분유 사건 같이 중국 사회를 뒤흔든 굵직한 일들이 있었다. 한편으로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을 때 보다 자기 색깔을 강하게 드러내듯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또한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8년이 분수령인 진짜 이유는 중국 바깥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이 해 미국발 서브프라임 위기가 세계를 강타했다. 미국의 수요에 의존하여 수출을 하고 경제를 발전시켜온 중국 입장에서도 금융위기는 확실한 재앙이었다. 광둥성에서만 7천 개가 넘는 수출기업이 파산하면서 연쇄도산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 경제 위기의 상징이 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출처: Helge V. Keitel, Lehman Brothers, CC BY) https://flic.kr/p/apdfwv
2008년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상징이 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출처: Helge V. Keitel, “Lehman Brothers”, CC BY)

위기의 쓰나미가 닥쳐오자 지도부 내의 갈등도 점차 격화될 조짐을 보였다. 우선 긴급한 경기부양책이 시급해보였다. 중국은 이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경제성장에 이어 역사상 가장 거대한 경기부양책을 시도하고 있었다. 2008년 11월에 무려 4조 위안(한화로 약 800조 원)의 자금이 편성되어 중국 경제 곳곳으로 투입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거대한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선부론자들은 연해지역과 도시에 우선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금융위기 이전 경제가 원활히 성장할 동안에는 선부론자들도 공부론자들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위기를 맞닦드린 선부론자들 입장에서 공부론은 안일한 이상주의에 불과했다. 당장 가장 효율적인 수출지역에 전략적 지원을 투입해야할 시점에서, 자원을 집중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줏대없이 배분하는 것은 모두가 파멸로 가는 길이라 해석했다.

반면 공청단의 공부론자들은 이럴 때일수록 그동안 소외되었던 내륙지방과 농촌에 비중을 두고 자금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 파벌을 지지하는 언론들끼리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경기부양 자금은 2009년 3월이 되어서야 집행된다. 어느 한 쪽의 주장을 전적으로 따르기 보다는 두 방침을 혼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광둥모델의 등장: 새장을 비워 새를 바꾼다

하지만 총론에서 두 파벌의 의견차가 어느 정도 봉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당 서기를 위시한 일선 현장에서는 계속해서 이견과 잡음이 나왔다. 이 경향은 후진타오 집단지도체제의 지도력 약화와 맞물려서 점차 가속화되고 있었다. 가장 발전한 연해지역인 광둥성의 수장을 맡고 있는 왕양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왕양은 경제 분야에서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단파 중에서는 리커창과 함께 이례적으로 경제통으로 평가 받는 인물이었다. 그가 중국 경제의 영원한 대부로 여겨질 주룽지 총리 밑에서 컸기 때문이었다. 남순강화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덩샤오핑이 주룽지를 만나 “안후이(왕양의 고향)에 젊은 왕양이라는 친구, 양성해보면 좋을 것 같다”라고 말해 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양은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을 맡아 주룽지를 보좌하였으며, 이후 원자바오에 의해 발탁되어 출세가도를 지속하게 된다. 2005년 충칭시에 부임한 왕양은 “GDP가 사람보다 중요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화제를 모았고, 충칭시에 만연하던 강제 토지수용과 철거 문제를 재산권 보장의 측면에서 해결하도록 주도했다. 그는 충칭시 지역 언론 개혁을 이끌며 고위 관료 동정보도 대신 시민들이 실제로 원하는 정보를 보도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었다. 2007년 17차 당대회 후 광둥성 서기로 영전하게 된 그는 금융위기 때도 자신의 색깔을 명확히 드러내는 정책을 펼쳐 중앙정부를 깜짝 놀래켰다.

왕양 (2013년 모습)
왕양 (2013년 모습)

분명 파벌 간 합의의 결과물은 균형발전과 성장우선의 두 정책적 기조를 모두 긍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광둥성과 같은 연해지역은 수출기업을 지원하여 실업을 막는 데 자금을 집중해야만 했다. 하지만 왕양은 ‘등롱환조'(騰籠換鳥: 새장을 비워 새로운 새로 바꾼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개혁개방 초기에 광둥성은 저부가가치 단순제조를 통해 성장하며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다.

그리고 왕양은 이번(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기존의 저부가가치 산업을 구조조정하고 IT와 혁신을 위주로 한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여 지역경제구조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실업과 사회적 불안정은 장기적 체질개선을 위해서는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위기를 계기로 광둥성을 정부 주도형경제에서 시장 주도형 경제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태자당과 상하이방 입장에서 왕양의 ‘등롱환조’는 명백히 당내 합의를 거스르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광둥은 상하이와 함께 중국 경제의 최전선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2008년 12월, 왕양을 설득하기 위해서 당시 국가 부주석이던 시진핑이 광둥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왕양은 요지부동이었다. 계속 이렇게 나오면 합의를 주도한 원자바오의 입장도 난처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 다음주에는 원자바오가 직접 내려와 왕양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원자바오의 타협에 불만이 있다는 듯이 며칠 뒤 다시 구조조정의 중요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다시 노선투쟁의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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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중국 

  1. 덩샤오핑의 세 가지 유산(1978-2002)
  2. 후진타오의 기적과 혼란(2003-2012)
  3. 다시 불붙은 노선투쟁의 화염(2008) 
  4. 시진핑은 어떻게 황제가 되었나(2010-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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