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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비즈니스 인사이더가 고른 15개의 ‘올해의 최악의 IT 실패작’ 목록에서 의외의 제품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혁신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구글 글래스’가 그 목록에 섞여 있던 것이다. 스마트 안경의 선두주자에서 비판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의 일이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더는 구글 글래스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없고, 구글 글래스 2.0이 등장할 2015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지켜보겠지만, 2014년은 구글 글래스가 현실에 직면했던 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도대체 그 해 구글 글래스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러한 비평을 들어야 했을까?

혁신의 대명사에서 실패작으로 낙인 찍힌 ‘구글 글래스 익스플로러 에디션’
혁신의 대명사에서 실패작으로 낙인 찍힌 ‘구글 글래스 익스플로러 에디션’

실패와 희망 사이 

사실 비즈니스 인사이더뿐만 아니라 여러 IT, 경제 매체들이 구글 글래스를 냉혹하게 평가한 이유는 상업적 가치를 회의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구글은 미국에 이어 영국에서 구글 글래스 판매를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으나 비싼 본체, 낮은 성능, 제한된 활용, 액세서리 부족 등 여러 지적에 시달리면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판매를 확대했음에도 수요는 늘지 않았다. 여기에 전방을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한 사생활 침해 가능성 논란까지 겹치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구글은 글래스를 시장에 확산하기 위한 몇몇 조치를 취했다. 그 해 여름 글래스의 운영체제를 최신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 킷캣으로 업그레이드를 실시한 것도 그 노력의 일부였다. 하지만 종전 젤리빈을 쓰던 때보다 느려진 반응과 늘어난 발열, 빨라진 배터리 소모 같은 부작용만 동반하면서 최악의 업그레이드를 글래스 이용자들에게 선사했을 뿐, 오히려 글래스에 대한 평가는 더 부정적으로 바뀌게 됐다.

결국 구글은 글래스를 지원했던 여러 서비스를 중단하고 새너제이의 글래스 체험관도 폐쇄했다. 또한 글래스 체험용으로 도입하려던 초대형 바지선 구매 계획도 돌연 취소했다. 여기에 글래스를 관장하던 프로젝트팀의 책임자까지 교체해 미래를 어둡게 했다. 결국, 비즈니스 인사이더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명백한 실패로 판명된 구글 글래스 익스플로러 에디션... 하지만 글래스 프로젝트는 아직 희망을 품고 있었다.
명백한 실패로 판명된 구글 글래스 익스플로러 에디션. 하지만 글래스 프로젝트는 아직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구글 글래스는 이듬해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데 있다. 구글 X에서 졸업을 ‘명’ 받은 구글 글래스는 ‘독자 생존’과 ‘자산 정리’라는 갈림길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구글이 32억 달러에 인수한 네스트 창립자 토니 파델이 나섰다. 네스트에 앞서 애플에서 아이팟의 성공 스토리를 쓴 토니 파델이 글래스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팀 합류를 자원하면서 글래스의 상업적 가치를 살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진 것이다.

구글의 지주회사(모회사) 알파벳이 글래스 사업을 정리하지 않는 대신 수장 자리를 맡기자 토니 파델은 시간을 갖고 원점에서 글래스를 다시 살펴볼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는 1년 뒤 구글을 떠났다. 글래스팀 합류 후 불거진 네스트 하드웨어에 대한 문제들은 그가 글래스에 집중할 수 있던 시간을 부족하게 만들었다. 비록 고문역을 맡기로 했지만, 토니 파델은 알파벳에서 떠났고, 글래스의 미래는 모르는 일이 됐다.

글래스, 엔터프라이즈 에디션으로 돌아오다

토니 파델이 떠난 이후 글래스가 사라지는 듯 했지만, 알파벳은 느닷없이 지난 7월 중순 글래스의 복귀를 정식으로 발표한다. 글래스의 깜짝 복귀는 많은 이들을 흥분하게 했지만, 이내 그 동안 기대하고 예상했던 대중적인 글래스로 돌아온 게 아님을 알게 된다.

글래스 엔터프라이즈 에디션이라는 이름을 달고 돌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글래스 엔터프라이즈 에디션은 종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은 형태지만, 알파벳은 글래스를 썼을 때 효율성이 높은 사업장에서 해왔던 실험들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다.

엔터프라이즈 에디션으로 돌아온 구글 글래스
엔터프라이즈 에디션으로 돌아온 구글 글래스 (출처: X)

농기계 업체 AGCO 

미네소타주 잭슨의 농기계 업체인 AGCO 노동자들은 전후 작업자의 검사 목록에 접근해서 할 일을 줄이는 것은 물론 설명서를 보기도 하고 제작 중인 기계 사진을 태블릿이나 노트북으로 전송하는 일을 통해 생산시간을 25%, 검사시간을 30% 단축했다. 업무처리 개선 담당이사 페기 굴리크(Peggy Gulick)는 “직원들은 원하는 시점에 필요한 정보를 눈앞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더 똑똑하고 빠르고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글래스를 쓰고 작업 중인 AGCO 직원
글래스를 쓰고 작업 중인 AGCO 직원(출처: X)

DHL의 물류센터  

흥미로운 점은 DHL 같은 물류센터다. DHL 직원들은 ‘주문 피킹’이라는 공급망 프로세스를 통해 선반에서 물품을 스캔해 배송할 카트의 수하물이나 통으로 옮겨 주문을 처리한다. 이때 DHL이 쓰는 방식은 유비맥스(Ubimax)의 ‘비전 피킹(Vision Picking)’ 솔루션이다.

비전 피킹은 원래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을 이용해 선별(Picking) 작업을 향상시키는 하나의 활용법이지만, 스마트 글래스를 통해 완벽한 증강현실이 아닌 채로 선별 작업의 단축을 위한 수단으로 발전해왔다. 많은 상품, 또는 부품을 관리하는 물류창고에서 재고를 관리하거나 물품을 선별해야 하는 작업자가 처리해야 할 물품 정보가 담긴 바코드나 QR코드를 글래스의 카메라로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물건을 놓은 곳, 골라야 할 것, 남은 작업량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글래스의 디스플레이로 확인한다.

비록 디스플레이의 투명도가 없어 완전한 시스루(See-Through) 형태는 아니지만, 정보의 수집과 확인 과정의 단순화를 통해 선별 속도를 높이면서 오류를 줄이는 비전 피킹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스마트 글래스는 적지 않은 역할을 해온 것이다.

유비맥스는 글래스 같은 시각보조도구를 활용해 물건이나 주문정보가 들어 있는 바코드 또는 QR코드를 스캔하고 카트에 물건을 올려 둬야 할 위치에 대한 실시간 지침을 보여주는 솔루션을 몇몇 물류 사업장에 적용해왔다. DHL도 일찍이 비전 피킹을 적용했던 사업장 중 하나인데, 별도 단말을 쓰지 않고 두 손을 자유롭게 쓰는 상태에서 편하게 물건을 제자리에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 DHL은 공급망 효율성을 15% 높인다고 추정한다.

DHL은 글래스 도입 이후 물류 작업의 효율성이 높아졌다.
DHL은 글래스 도입 이후 물류 작업의 효율성이 높아졌다. (출처: X)

삼성의 유럽 물류센터 경우  

글래스 같은 장치와 비전 피킹으로 효율성을 높인 곳은 DHL만이 아니다. 삼성도 일부 유럽 물류센터에 1세대 구글 글래스와 ‘기어 S’ 스마트워치를 활용한 비전 피킹을 실험했던 예가 있다. 먼저 글래스로 작업자의 ID와 스마트워치 정보를 QR코드로 읽어 동기화한 뒤 물류센터에서 옮겨야 할 부품에 대한 정보를 가진 바코드를 스캔하면 이 정보가 글래스로 전송되고 해당 부품의 위치를 알려준다.

이를 처리하는 작업자가 해당 위치에서 부품을 꺼내 선반에 올린 뒤 스마트워치에 그 수를 입력하면 별도의 처리과정 없이 곧바로 재고 파악을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이러한 장비의 활용으로 작업 효율성을 20% 높였다는 게 유비맥스의 설명이다.

핵심은 정보의 단순화

ACGO나 DHL, 삼성 등 글래스를 도입했거나 실험한 기업들은 작업 효율성을 높이는 공통 효과를 얻었다. 작업 효율성이 높아진 이유로 역시 앞서 비전 피킹처럼 정보를 입력하고 확인하는 과정과 시간을 줄이고 오류를 최소화한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정보의 단순화다. 이는 스마트 글래스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기도 하다.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2014년 테드(TED) 강연에서 사람들이 검색을 통해 정보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만 곧바로 볼 수 있는 형태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만든 것이 글래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마트폰처럼 깨알같이 정보를 찾아서 보던 방법을 생략하는 대신 꼭 필요한 정보만 곧바로 보거나 손쉽게 입력하는 장치의 필요성을 느껴 구글 글래스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스마트 글래스는 단순화된 입출력 데이터를 처리하는 환경에 적합하다
스마트 글래스는 단순화된 입출력 데이터를 처리하는 환경에 적합하다

물론 최종 목적은 두 손을 자유롭게 쓰기 위한 최소의 기능을 가진 단말이지만, 이를 위해선 먼저 정보의 출력과 필요한 정보의 입력을 단순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글래스는 스마트폰처럼 수많은 정보를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입출력 모두 단순한 형태이어야 한다. 이에 따라 비전 피킹 솔루션처럼 정보의 쉬운 입력과 단순한 데이터 처리 과정, 그리고 보기 쉬운 출력으로 작업자의 복잡성을 없앴기 때문에 물류센터나 제조 환경에서 글래스와 함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던 것이다.

다만 복잡하고 광범위한 데이터를 단순하게 표현하려면 이에 맞는 형태의 가공이 필요하기 때문에 디스플레이의 대체나 증강현실을 원하는 대중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 어렵다. 이 같은 사정이 개인정보 침해 문제보다 글래스의 활용을 확대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였고, 지금도 같은 이유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알파벳이 산업용 모델을 먼저 상업 시장에 내놓은 것은 대규모 정보를 재가공하는 과정이 적은 글래스의 특성에 맞춘 결정이기에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현재 글래스는 이를 필요로 하는 시장과 파트너를 제대로 찾았을 뿐이다. 하지만 글래스의 미래가 지금과 같다고 예단하긴 힘들다. 쉬운 입력과 단순한 출력 사이의 처리 과정에서 지능형 처리가 덧대어지면 굳이 기존 데이터의 재가공에 대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새로운 활용을 찾을 수 있어서다. 물론 우리가 줄곧 그런 글래스를 원하고 있음은 그 이전의 글래스를 비판하며 말해온 만큼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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