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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광석]을 늦게서야 봤다. 영화적 완성도를 기대하는 작품은 아니었기에 보지 않으려 했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꽤 의미 있는 사회적 현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에 만난 한 친구는 영화 [김광석]을 보고 살인 증거는 확실치 않지만, 그 부인은 “진짜 나쁜 X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다른 친구도 추석에 만난 50대 이모들이 김광석 부인을 비난했다고 했다.

아마 지난 긴 추석 연휴의 최고 이슈는 김광석 아니 서해순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파장을 자세히 살펴보다 보면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변 이후 한국 사회의 자화상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김광석

당연한 이야기

우선 당연한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면, ‘나쁜 X’이라는 인상이 살인에 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살인죄는 사회적으로 강력한 도덕적 비난을 받는 것을 넘어서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처벌받는, 공동체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범죄다. 그렇기에 살인죄를 추궁하기 위해선 단순히 ‘그럴 것 같다’는 것 이상의 증명과 엄밀함을 필요로 한다.

특히나 영화 [김광석]에서 이상호 감독의 포지션은 기자다. 영화 속에서 이상호는 명확하게 기자로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영화의 정보값은 순전히 ‘서해순은 나쁜 X’이라는 것만 남아버린다.

‘OOO은 나쁜 X이다’라는 것은 얼마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정보일까? 만약 10년 전 MBC 시사 프로그램이었다면, 이 다큐를 방영할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상파에 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매체가 미칠 영향력에 비해 확실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손석희가 뉴스룸에 진행한 해순 인터뷰는 결과적으로 의혹 해소는커녕 '서해순 악마화'라고 명명할만한 가십화 현상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손석희가 뉴스룸에 진행한 서해순 인터뷰는 의혹 해소는커녕 ‘서해순 악마화’라고 명명할만한 가십화 현상을 촉진하는 아쉬운 결과를 낳았다.

이상호는 어떤 게임을 한 걸까

그런데 [김광석]을 보다 보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사실을 증명하거나 확실한 증거를 내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타살 의혹을 오랫동안 제기해왔고, MBC라는 영향력 있는 매체에 속해있던 시간도 상당 기간이었다. 만약 공인받을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있었다면 언론 보도를 통해 재수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상호는 2012년 백지연과의 인터뷰에서도 김광석 타살설을 주장하며, “99%를 가지고도 기사를 못 쓴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를 발표했고, 그 뒤 가진 2017년 기자간담회에서는 “99%는 확실하다. 나머지 1%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100%가 아니더라도 99%라도 되었다면 이미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규명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공식 기관을 통해 승인받을 수 없는 문제를 대중에게 승인받아야 하는 게임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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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해결책은 취재를 통해 새로운 증거가 나와야 하는 것이었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새로운 증거가 나오기는 힘들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감독의 심증을 어떻게 타인의 확신으로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후의 사회적 논란을 보면 그의 시도는 옳고 그름을 떠나 성공적이었다.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자유

영화 초반부는 그런 논란을 감독이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타살 의혹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타인의 입을 빌려 들려주기도 하고, 커트 코베인의 사인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는 미국 다큐멘터리의 예도 든다.

이상호는 아마 이 사안이 단순한 풍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가질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음악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묘사하는 장면을 초반부에 배치한 것이리라.

김광석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구의 죽음에 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커트 코베인의 죽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예시한 것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어떤 사건에 대해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해도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자유는 분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혹 제기가 무책임한 것이었을 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함은 물론이다.

커트 코베인의 죽음에 관한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 [커트 앤 코트니] (닉 블룸필드, 1988, 왼쪽) ㅣ [표백제에 흠뻑 젖은] (Soaked in Bleach, 벤자민 스타터, 2015, 오른쪽)
커트 코베인의 죽음에 관한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 [커트 앤 코트니] (닉 블룸필드, 1988, 왼쪽), [표백제에 흠뻑 젖은] (Soaked in Bleach, 벤자민 스타터, 2015, 오른쪽)

의혹의 핵심

도입부를 지나 영화가 본격적으로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할 때 꽤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해순의 증언은 일관되지 않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119에 신고했으며, 김광석은 사건이 있기 전날에 음반 계약을 했다. 게다가 그의 활달하고 진취적인 성격 등을 고려하면 그가 자살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가 죽은 방법이 이상하다고 했다. 자살 방법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한 전문가의 해설이 있었지만,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은 아니었다.

그런데 실은, 그 방법으로 자살하는 게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그 방법으로 죽는 것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면 영화에서는 충분히 강조해서 설명하지 않았을까. 왜 가장 확실한 방법을 피해가겠는가? 그림을 그리거나 시연을 해서라도 그 방법으로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우리는 늘 갈등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우리는 '대화'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또 악의적인 편견 조장세력들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일러스트: Mister Kha, CC BY SA)
Mister Kha, CC BY SA

법의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 자살 방법에 대한 의혹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살은 분명 그 자체로 예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살이라면 반항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법의학자들의 반론이 자살/타살 논란에 있어서는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혈중 알코올 농도도 높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설득력이 확실치 않다면 나머지 근거는 모두 반박될 수 있는 것들이다. 증언이 일관되지 않은 것은 자살을 목격한 직후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고, 활달한 성격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그랬을 수도 있다. 자살할만한 사람들이 자살했다면 대부분 자살도 손쉽게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등장하는 심리 전문가는 예외적으로 그가 매우 불안하고, 자살자의 전형적인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후반부 내용까지 고려해보면 부인의 외도로 괴로워하고 불안했던 김광석이 술을 마시다 자살했다는 것도 충분히 정황적으로 가능해 보였다.

타살설 vs. 부검 기록

하지만 사람들이 ‘타살설’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는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장난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부인의 당일 진술에 등장하는 이 말을 들으면 왠지 자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 자살 방법도 이상하고, 마침 아래층에는 전과자 서해순의 오빠가 와 있었다는 것이 합쳐지면서 감독이 생각하는 타살의 퍼즐은 완성된다. 왜냐하면, 독살이 아닌 이상 목을 졸라 죽이기 위해서는 물리력이 필요하고, 그 적역인 전과자 오빠가 등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서해순에 대한 ‘나쁜 X’ 공세를 생각해보면, 이 ‘타살설’이 아주 정형적인 고정 관념의 결합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흔한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서해순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나쁜 X’이다.
  2. (그런데) ‘돈 많은 남편’ 김광석은 재산도 주지 않고 이혼하려 했다.
  3. (그래서) 서해순은 ‘전과자 오빠’를 이용해 자살로 위장한 살인을 저질렀다.

하지만 나쁜 X이 재산을 노린다고 반드시 살인하지는 않으며, 전과가 있고 거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살인을 공모하거나 방조하지는 않는다. 이 타살설의 구조는 쉽게 받아들여지는 전형성을 띠고 있지만, 결국은 정황의 연결일 뿐이고, 결과에 짜 맞춰진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그 반대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즉, 타살설은 사체가 물리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증명력보다 훨씬 더 열등한 것이고, 결국 부검기록은 이런 ‘정황’들보다 더 무겁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부검기록이다. 영화에 따르면 그 부검기록은 서해순이 열람을 막아 두었다고 했다. 하지만 부검기록에서 ‘타살 의혹’이 객관적으로 존재했다면 일개 ‘사인’이 그 열람을 막아둘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 이 부검기록을 SBS가 단독으로 입수해 보도했다. 골자는 다른 큰 외상이 없고, 반항과 방어의 흔적이 없어 타살로 보기 힘들다는 법의학자의 의견이다(SBS 보도 참조).

교착상태에서의 선택

서해순을 의심하지만, 타살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 이와 같은 교착상태에서 감독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선택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더라도, 오랜 시간을 들였더라도 이 프로젝트를 기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확신할 수 있는 선까지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가 제기할 수 있는 한계는 초동수사가 불완전해 보였고[footnote]그것 역시도 인상일 수 있다. 사체 부검 과정에서 타살의 흔적이 명확히 없어 보여 쉽게 결론 내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footnote] 타살의 동기도 있을 수 있으니 확실히 재조사하라고 공론을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이상호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더 강경하게 범인을 확신함으로써 영화 [김광석]을, 그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김광석이 주인공인 ‘음악 영화’가 아니라, 이상호가 주인공이고, 서해순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신파조의 미스터리 스릴러로 만들었다.

이상호 스스로 자기주장이 객관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상호는 그렇기 때문에 그 주장을 굽히거나 그 한계를 인정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그 주장을 밀어붙이고,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는 길을 택했다.

마녀 화형식
마녀 화형식 (그림: 위키미디어 공용)

악녀, 서해순

이 영화 후반부는 사실상 서해순이 악녀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서해순은 결혼 전에 했던 이혼 사실을 숨겼으며, 그 사실을 나중에 김광석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살해했다고 한다(‘영아 살해’는 영화 속 이상호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이 놀라운 주장에는 더 놀랍게도 아무런 근거 제시도 없다).

그리고 서해순은 김광석과 함께 떠난 미국 공연에서 처음 만난 김광석의 친구와 여행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김광석의 죽음 이후 재산을 둘러싸고, 서해순이 김광석 아버지를 격하게 몰아붙이는 녹음 파일을 영화는 길게 들려주기도 한다. 감독은 김광석의 어머니를 찾아가 그녀의 육성을 빌어 그럴(자살할) 애가 아니라고, 자기가 죽기 전에 진실을 밝혔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죽어 진실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 살인에 대한 증명은 없고, 악마에 대한 확신만 있다.
여기에 살인에 대한 증명은 없고, 악마에 대한 확신만 있다.

이 영화 최악의 요소는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관한 합리적인 설명, 객관적 증명에 쏟아야 할 노력을 서해순이 악녀이고,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몰빵’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충분히 나쁘지 않아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서해순은 나쁜 X이다’는 확신을 강해질수록 서해순은 김광석을 죽이지 않았다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심지어 부검기록이 공개되고, 법의학자들의 의견이 나온 기사에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 가능성을 부정한다.

정의감의 가십화

이상호가 결정적 증거 제시도 없이 이 다큐를 극장에 내건 것은 박해받은 기자의 고군분투와 서해순의 악마화라는 코드가 지니는 대중성과 그 결과가 주는 달콤한 결과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영화는 지난 정권 동안 쌓인 국가 기구에 대한 불신을 의혹의 재료로 활용한다.

나는 영화 [김광석]을 통해 타락한 시스템의 바깥으로 밀려난 한 기자가 ‘탄압받은 자의 도덕성’을 무기로 자신의 창작물에 느슨한 도덕적 잣대를 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작업 결과가 사장되는 것이 그토록 아쉬웠다면 차라리 [저수지 게임]의 주진우처럼 쿨하게 실패담이라고 이야기했어야 했다.
저수지 게임
정권이 바뀌고 해직 언론인이 정치적으로 복권되는 상황에서 이 같은 영화가 발표된 것은 우려스럽다. 저널리스트의 도덕적 해이를 정치적 기세로 눌러 버리는 모양새로 잘못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당하게 쫓겨난 해직 언론인, 세월호 추적자의 이름을 걸고 이상호는 정의감을 생산했고, 사람들은 그렇게 합리적 근거와 객관적 증명을 결여한 ‘정의감’을 가십성으로 소비했다. 여기에 진지한 성찰이나 객관적인 증명 따위의 합리성은 들어설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십화한 정의감은 그 이상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걸 우리는 확인했다. 그 정의감은 ‘김광석법’과 같은 사회적으로도 정의롭고, 바람직한 논의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무책임한 방법을 대중적으로 공인해 버리면 공론장을 교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전자(뜻밖의 좋은 결과)는 불확실한 미래지만, 후자(공론장 교란)는 확실한 미래다.

과거의 희생이 미래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사회적 반향은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변 이후 우리 사회의 어떤 자화상이다. 자기 몫을 찾으려는 이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가십을 유통하는 기묘한, 어쩌면 뻔한 2017년의 자화상.

이상호 기자 혹은 감독 (다음영화에서 재인용)
이상호 기자 혹은 감독 (‘다음영화’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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