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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푸른 눈의 목격자와 택시운전사

이 글은 스포일러를 최소화한 글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포일러의 불안이 염려스러운 독자께서는 이 글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9년 전, 평범한 풍경이 낯설었던 어느 날.

2008년 6월,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따사로운 여름 아침 햇살은 싱그러웠고, 곱게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와 미소가 있었다. 여느 때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일요일이었다.

나는 인천행 수도권 1호선 지하철에 몸을 맡겨두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지만, 온몸은 땀과 물 때문에 축축이 젖어 있었다.

머리칼은 소화기 분말 가루와 물이 엉겨 붙은 채 헝클어져 있었다. 함께 지하철에 탔던 사람도 그랬다. 곱게 옷을 차려입고 지하철을 탄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튈 수밖에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처참했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처참함이 아니었다. 낯섦이었다. 분명히 늘 보던 여유로운 일요일 아침 풍경이었지만, 너무나도 낯설었다.

지하철은 아직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분명히 같은 서울 안이었다. 그날 아침까지 내가 밤새도록 보고 겪었던 풍경은 물대포·소화기·방패·밧줄이 오갔던 격렬한 현장이었다.

egg, "불꽃 - 촛불집회", CC BY (2008. 6. 10) https://flic.kr/p/4V9hxA

egg, “불꽃 – 촛불집회”, CC BY (2008. 6. 10)

그 낯섦과 밤새 한숨도 못 잤던 피로를 이기지 못한 채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내가 밤새도록 보고 겪었던 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구분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계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따뜻한 눈빛이었다. 아주머니는 나와 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셨다.

“시위 현장에서 오신 거죠? 젊은 사람들이 애 많이 쓰네요.”

그 말씀을 듣자마자 눈가가 부옇게 흐려졌다. 왜 눈물이 나왔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지금에 이르러 그 이유를 돌아보자면, 그 순간 눈 앞을 흘러갔던 파노라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긴박한 상황에서 처음 보는 내게 자신의 오토바이 뒷자리를 기꺼이 내주며 함께 급박하게 움직였던 청년, 위험을 함께 피하고자 서로를 챙겨주며 내달렸던 또래 청년들, 자식뻘 되는 청년들과 함께 분노하며 현장에 있었던 어른들, 대열에서 이탈해 혼란을 느끼던 전경, 흥분한 군중으로부터 그 전경을 지켜주기 위해 스크럼을 짜던 예비군 청년들까지…

밤새도록 함께 있었던 그들이 갑자기 기억났던 것 같다.

함께 웃고, 고민하고, 토론했던 친구들... (사진: Sarah Le Clerc, "memory", CC BY ND) https://flic.kr/p/4W5Bp3

Sarah Le Clerc, “memory”, CC BY ND

그로부터 9년이 지났다. 나는 그 9년 동안 겪어야 할 일과 겪지 말아야 할 일을 두루 겪었다. 지금에 이르러 그때와 달라진 것이 제법 많아졌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내 눈가가 그렁그렁해지는 것을 보고 나를 격려해줬던 동승자는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언젠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뒤 동승자의 연락처도 함께 잃어버렸고, 이렇게 저렇게 삶에 치이면서 그의 이름과 얼굴마저도 기억에서 사라진 상황이다. 하지만 그때 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던 것을 눈치채고 의연하게 격려해줬던 그 고마움만큼은 평생 간직하고 있다.

머릿속 어딘가에 잠시 접어뒀던 그 기억은 만 9년이 지나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푸른 눈의 목격자, 1980년 5월 광주에 서다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물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매점매석한 사람이 없었고. 그게 바로 대동세상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2010년 3월 19일 서울대 강연에서 (참조: 오마이뉴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대로,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9년 전 그날’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있어야 할 군대가 그 총칼을 국민에게 휘둘렀던 아픈 나날들이었다.

ⓒ5.18기념재단

ⓒ5.18기념재단

ⓒ5.18기념재단

ⓒ5.18기념재단

그리고 광주로 진입하는 모든 길이 폐쇄됐던 5월 19일, 택시 한 대가 광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택시에는 훗날 ‘푸른 눈의 목격자(Witness with Blue Eyes)’라는 별명을 얻게 될 서독의 공영방송 ARD의 도쿄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와 녹음 담당 기자 헤닝 루모어(Henning Rumohr)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계엄령 하 광주, 시민과 계엄군 충돌’이라는 보도를 접하고 ‘광주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판단하에 서울을 거쳐 곧장 광주로 진입했다.

계엄군이 외신 기자의 광주 진입을 허락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계엄군에게 “우리는 외국 회사의 광주 주재원이고, 광주에 남아있는 가족을 데리고 나오겠다”는 말을 해 겨우 광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는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취재를 했다. 광주를 어렵게 빠져나온 그들은 더욱 급박하게 움직였다.

광주의 참상이 담긴 필름은 고급 과자 통에 담겨 일본을 거쳐 독일로 곧바로 보내져 22일에 독일에서 방송될 수 있었다.

1980년 5월 22일 독일 제1공영방송 저녁 8시 뉴스에 방영된 힌츠페터의 리포트

이후 위르겐 힌츠페터는 23일 다시 광주로 진입한다. 당시 광주는 계엄군이 발포한 뒤 시위대도 무장을 시작해 시민군을 형성했고, 계엄군에 맞서면서 ‘시민 자치’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글머리에서 인용한 한홍구의 발언은 당시의 ‘시민 자치’에 대한 전언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취지였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23일 다시 광주에 들어가 촬영한 필름이 아니었다면, 일각에서 제기하는 ‘폭도들의 무장봉기’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르겐 힌츠페터의 2차 촬영본은 그 주장을 논파하는 명백한 근거가 됐다.

두 번의 촬영은 훗날 ‘기로의 선 한국’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한국에도 은밀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 훗날 알려진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목격자’는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이름을 대중에게도 널리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2016년 1월 작고한 위르겐 힌츠페터는 “나를 꼭 광주에 안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머리카락과 손톱 등 일부 유해는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치됐다. 단 4일간의 목격이었지만, 그는 죽어서도 광주를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1937년 7월 6일 ~ 2016년 1월 25일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1937년 7월 6일 ~ 2016년 1월 25일)

택시운전사 ‘김사복’

“아, 그란디요. 아저씨는 고향이 어딘 게라?”

“내 고향 말입니꺼? 대한민국 아입니꺼?”

SBS 드라마 [모래시계] 제7~8회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다. 태수(최민수 분)는 어쩌다가 시민군에 가담했고, 절친한 친구 우석(박상원 분)은 계엄군으로 광주에 진입했던 상황이었다.

경상도 말투를 쓰던 어떤 노인이 “우리 모두 똘똘 뭉쳐야 한다”는 당부를 하던 상황에서 나왔던 문답이다.

[모래시계] 이후 굳혀진 ‘광주 민주화 운동’ 소재 창작물의 클리셰1는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왜 데모를 하느냐”고 혀를 차던 사람이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시민들을 구하려 하거나 시민군에 참여하고 ▲경상도 태생 인물이 반드시 등장한다는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광주민주화운동'

드라마 [모래시계]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

영문도 모르고 계엄군의 가혹한 폭력과 발포 공격을 당해야 했던 광주시민들의 참상을 절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르적 설정이다.

[모래시계]에서 ‘태수’를 고향 광주로 초대했던 폭력조직의 아는 동생도 “학생 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나 한다”고 혀를 차다가, 좋아하던 여성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자 큰 충격을 받아 적극적으로 시민군에 가담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치만 분)·헤닝 루모어를 서울에서 광주로 데려다주고 함께 광주를 다녔던 ‘택시운전사 김사복’ 역할을 맡은 배우는 송강호다. 영화 속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평범한 남자였고, “학생 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나 한다”고 혀를 차던 김사복을 맡기에는 부산 출신 송강호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시민 김사복(송강호)

평범한 택시운전사 김사복(송강호)

사실 ‘김사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김사복’이라는 그 이름조차 그의 이름이 맞는지 불분명하다. 위르겐 힌츠페터와 [택시운전사]의 제작진도 그를 찾기 위해 애썼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외신 기사의 취재를 도운 기사의 존재가 발각됐다면 그가 겪을 고초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란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로서는 당연히 존재를 숨겨야만 했을 것이다.

[택시운전사]는 위르겐 힌츠페터보다는 김사복에게 더 초점을 맞춰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평범한 그의 눈앞에 군인들이 가혹한 폭력을 휘두르고 총을 난사할 뿐 아니라, 광주 내 모든 시외전화 회선은 모두 차단됐다.

병원에는 치명적 상처를 입은 부상자들과 그 가족들이 고통 어린 신음과 통곡을 하고 있었고, 방송국 건물은 불에 타고 있었다. 청년들은 몽둥이를 들고 트럭에 탄 채 시내로 나가고 있었으며, 시민들의 모든 일상은 평소와 달라졌다. 가진 것은 나누어 쓰고 음식은 나누어 먹었다.

그날, 가족이 된 택시운전사 

언론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던 상황에서 외신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는 “진실을 전할 유일한 믿음”이었으며, 그들을 따라온 그날 처음 만난 김사복에게도 그날부터 ‘가족’이었다.

김사복의 마음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참상과 광주시민의 아낌없는 마음에 절로 녹아들었다. 그렇게 그는 그날 ‘택시운전사’로 충실하고자 한다. 손님은 끝까지 목적지까지 모셔 드려야 했던 것이다.

택시운전사

[택시운전사]가 전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상은 이미 머리로 알고 있고, 많은 창작물을 통해 접했어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끔찍한 참상을 접할 때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산 총알이 국민에게 날아오던 그 순간’이 너무나도 어이없다. 외지인들은 그렇게 광주에 녹아들었다.

다만 아쉬움도 남는다. 헤닝 루모어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광주에 들어갔던 사람이었지만,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 한국영화 특유의 문제점인 다소 과한 배경음악과 선을 살짝 넘어선 감독의 개입도 조금은 아쉽다. 때로는 감독이 한발 물러서 있는 것이 관객에게 더 많은 것을 전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감히 비할 수 없는 현장’이었지만 그래도 그들과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었던 ‘9년 전 그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겪어야 할 일과 겪지 말아야 할 일을 두루 겪으면서 다소 달라진 것은 있지만, 그날 그 현장에 모두를 모이게 했던 그 ‘순수한 분노’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그날 이후 김사복을 만날 수 없었고 그의 진짜 이름조차 알 수 없었듯이, 기자도 그때 만났던 그들을 이후로 만날 수 없었고 그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그때 그날 우리가 느꼈던 ‘순수한 분노’는 영원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택시운전사


  1. 클리셰(Cliché): 판에 박힌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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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박형준
초대필자. 기자

저는 '샤브샤브뉴스'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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