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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만 해도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방법은 전화번호로 보내는 SMS(Short Message Service)가 유일했다. 그러다가 스마트폰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문자 메시지에도 한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바로 카카오톡의 등장이다. 새롭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카카오톡에는 기존 SMS에는 없던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SMS는 문자를 보낸 후에 상대방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는지 알 수 없었다. 상대방이 답장을 보내면 그제야 상대방이 확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카카오톡은 보내는 메시지 옆에 1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그 메시지를 확인하면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진다. 사람들이 문자를 보낼 때마다 느끼던 ‘상대방이 언제 확인하나’라는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이런 편의성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이 카카오톡에 빠져들었다.

카톡 ‘1’이라는 숫자 

그런데 이게 보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편의성일지 모르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읽은 순간에 상대방이 알아차릴 것이란 사실을 알기에, 곧바로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을 무시한 것처럼 비치니 말이다.

한편, 카카오톡을 보낸 사람 입장에서도 전에 없던 부담이 생겼다. 자기가 보낸 메시지 옆에 1이 사라지고 나서 시간이 흘러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닐까.’, ‘혹시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닌가.’ 같은 쓸데없이 생각이 고개를 든다. 답장을 기다리다가 급기야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카톡 문자에 남겨진 '1'이라는 숫자
카톡 문자에 남겨진 ‘1’이라는 숫자

그렇게 우리는 언제인가부터 메시지 옆에 뜨는 1을 두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카카오톡 주고받기를 시작했다. 카카오톡의 숫자 1을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은 스마트폰을 한시도 내려놓지 못하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편 이것은 수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불편하게 여겨온 어떤 성격의 단편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HSP, 아주 예민한 사람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상대방의 마음에 신경 쓰며 보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주변에서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이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남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HSP(Highly Sensitive Person, 또는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20% 정도가 HSP로 분류된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이 한 말이 남에게 어떻게 비칠까 두고두고 고민한다. 심지어는 상대방이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할 때조차도 그렇다. 남들이 무심코 던진 농담에 상처받기도 하며, 별 뜻이 없는 말에 숨겨진 다른 의미가 없나 오래도록 고민한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과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기보다 마음에 맞는 사람과 담소를 나누길 좋아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차라리 조용히 혼자서 책 읽기를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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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사소한 물리적인 자극일 때도 있다. 예컨대 이들은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이들 때문에 유달리 힘들어한다. 도서관에서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있어야 비로소 집중할 수 있다. 비흡연자인 경우 길 가다 담배 연기라도 마주치면 멀리 돌아간다. 안경 렌즈에 먼지가 묻어있으면 바로 닦아내어야 하고, 스마트폰 액정 화면에 흠집이 나는 것이 싫어서 사자마자 곧바로 필름을 씌운다.

이들에게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주관이 뚜렷해서, 온당치 못한 것을 보았을 때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넘어가지 않는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평등이나 불공정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집어낸다. 권위나 나이를 앞세운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며, 부정한 뒷거래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보기도 한다.

요컨대 이들은, 남들로부터의 평가, 오감을 자극하는 찝찝함, 양심에 걸리는 부정을 무척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너무도 민감한 나머지 원하지 않는 부담과 함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처럼 속속들이 그들을 잘 이해하냐고? 내가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원치 않는 부담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HSP, 즉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깊이 공감한다.

민감함을 미덕으로 만드는 세 가지 조건  

덴마크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작가인 일자 샌드(Ilse Sand)는 [센서티브] (2017) [footnote]원제: Highly Sensitive People in an Insensitive World | 일자 샌드 지음 | 김유미 옮김 | 다산 3.0 | 2017년 02월 09일 출간 [/footnote]>에서 자기 자신을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저자는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이 종종 자기 자신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센서티브
일자 샌드 지음 ㅣ 김유미 옮김 ㅣ 다산 3.0 ( 2017)

하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이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고 만족에 이르는 기준이 높기 때문에,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 자기 스스로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여긴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민감함은 능력의 부족이 아닌 성향의 차이일 뿐이며, 창의력과 통찰력의 뿌리가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처럼 민감한 성향의 긍정적인 측면을 주로 다룬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부분을 짚어보고 싶다. 민감함이 장점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그전에 민감한 이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타인에 대한 배려다.

민감한 이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이해받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남에게 맞추라고 강요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민감함을 앞세워서 남에게 불편을 강요하기도 한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같다. 이해하는 사람 정해져 있고 이해받는 사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나의 민감함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남의 민감함을 먼저 살펴야 한다.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민감한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발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런데, 정작 본인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지적하는 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다.

당신이 민감하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옳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면, 과연 스스로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먼저 돌아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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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실수에 대한 포용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민감한 이들은 업무에 대한 기준이 높은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하면, 완벽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세상이 다 자기와 같은 줄 알고 그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더불어서 남의 실수를 지나치게 지적한다.

하지만 남들이 다 같은 기준으로 살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사람이란 실수도 하고, 또 그런 실수를 통해 성장한다. 타인의 실수를 포용할 때, 자신의 민감함도 포용될 것이다.

요컨대, 당신의 민감함이 존중받고자 한다면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남의 민감함을 존중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때로는 남의 실수를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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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면, 민감함은 떳떳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격적인 결함도 아니다. 일자 샌드의 말마따나 창의력과 열정의 원천일 수도 있다.

혹여 당신이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감추려고 하지 마라. 능력의 부족이라고 여길 필요도 없다. 당신이 벗어나야 할 것은 민감함이 아니다. 민감함을 억누르려는 천편일률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외부의 압력이다.

한발 더 나아가, 민감함이 당신의 욕구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행위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남의 입장을 살피는 것까지 민감함의 범위에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민감함이 아니라 그저 편협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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