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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시대의 진보와 보수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이 단어들은 한국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개념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핵심 키워드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좌파와 우파, 그 개념과 특히 우파를 표상하는 집단은 국가 주도적 경제발전이라는 특수한 맥락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럽게 형성됐다고 분석했다. 이 문제는 좌파/우파와 필연적으로 엮인 진보/보수의 개념으로 인해 실제로는 훨씬 더 혼란스럽다.

박정희, 스탈린, 김재익

박정희, 스탈린, 김재익

물론 일반적으로는 진보+좌파, 보수+우파가 우리에게 익숙한 묶음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이 꽤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명백히 진보정권으로 간주될 수 있는 참여정부는 비정규직 확대와 민영화 등 우파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한 반면 참여정부의 계승자로 봐도 무방할 문재인 정부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공공부문을 확대하는, 비교적 좌파적 정책을 추진 중이다. 그렇다면 참여정부는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기에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우파적 정책을 추진했기에 진보우파라고 해야 할까?

개념 혼란 초래하는 다양한 기준 

이처럼 어떤 용어의 개념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일반적으로 어떤 집단을 보수, 진보로 간주할 때 사용되는 기준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복지정책, 정부의 적극적인 소득재분배 등 경제적인 문제가 논점이 될 수 있다. 혹은 정치적 자유의 확대 면에서는 언론이나 집회 시위, 결사의 문제에 있어서 국가의 통제 수준을 두고 갈릴 수도 있다. 사회문화적인 면에서는 동성결혼의 제도적 인정이나 여성할당제, 교회에 대한 태도 등이 그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문에서 진보적이라도 정치적인 부문에서는 보수적일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며, 진보/보수(혹은 좌/우)의 안정적 경쟁을 넘어 지역주의나 환경 이슈 등 개별 의제에 집중하는 소수정당들의 약진으로 기존의 이분법적 구도는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소위 진보적/보수적이라고 생각되는 의제로 일사불란하게 정렬되는 개인, 집단, 정당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더 자세히 들어가면, 어떤 정책이 더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는 방향성 자체도 의심스러워진다. 키메라와 같다고 할 수 있는 현대 중국은 가장 좋은 실례이다. 천안문 사태를 전후한 1980~90년대의 중국은 기존의 마오주의적 분류를 조금 더 서구적인 맥락에 맞게 계승하여 격렬한 이념 갈등을 겪었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1989)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으로 끝났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1989)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으로 끝났다.

정치적 순수성 강조 (좌파; 보수파 ) ↔ 전문기술·실용성 강조 (우파; 개혁파)

이 때 진운(천윈), 박일파(보이보), 왕진(왕전)과 그들의 지원을 받은 이붕(리펑)은 보수파를 이끌었다. 반대편에는 조금 중도적인 등소평(덩샤오핑)을 중심으로 만리(완리), 호요방(후야오방), 조자양(자오쯔양)까지 이어지는 개혁파(진보파)가 있었다.

보수파는 국영기업이 보장하는 완전고용과 국가 주도의 복지정책을 지지했으며 정치적 자유의 허용 범위를 극히 제한하고자 했다. 반대로 개혁파는 민간기업 주도의 경제와 사회보장에 있어서 국가 역할의 대대적인 후퇴를 주장했고, 정치적 자유의 (제한적) 확대를 주장했다.

정치적인 입장 차이는 별론으로 경제적 지향의 차이는 상당히 흥미롭다. 80년대 동시대 서구에서 진행된 정치적 갈등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보수당과 공화당을 이끈 대처와 레이건은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국영기업이나 규제 완화를 주장했고, 국가의 역할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자 했다.

한편 노동조합이나 국영기업, 규제기관은 진보정당이라고 여겨져 온 노동당(영국) 혹은 민주당(미국)과 연계해 자신들의 위치를 방어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노동유연화 등의 조치는 과연 진보적인 조치인가 보수적인 조치인가? 왜 중국과 영국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반대로 정렬된 것일까?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게 진보?

상황이 이렇다면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 것일지 의심스러워질 정도다. 그렇다면 진보나 보수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특정한 가치 지향성을 살펴봐야 하는 것일까? 2010년 4월 유시민은 전국 4개 대학 언론인과 만나 가진 인터뷰에서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진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에 근거해서 진보 개념을 살펴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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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조선대신문 편집장): 이번 대학생 정치이념 조사를 보면 진보와 보수를 혼동하는 ‘이념 착시’ 현상도 두드러졌다. 유 전 장관이 생각하는 진보는 뭔가.

유시민: 나는 진보의 개념을 폭넓게 본다. 포괄적으로 보면,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진보다. 물질적 결핍과 불합리한 제도, 낡은 의식 등이 빚어내는 억압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진보다. 현실정치에서는 민주당부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그리고 국민참여당까지 모두 진보로 본다.

한겨레21, “나는 노무현만큼 바보는 아닌 것 같다” (2010. 4. 28) 중에서

하지만 이런 모호한 언설은 분석상의 유용함도 제공해주지 못하고 현실을 설명해내지도 못한다. 대한민국에서 진보 혹은 보수를 표방하는 각 정치세력의 주장은 대체로 이런 모호성에 기대고 있다. 이 때문에 진보와 보수가 일관성 있는 개념으로 통용되는 게 아니라 이슈별로 ‘아전인수’식 해석이 판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불명료함이 개념 혼란을 만들어낸다.

유시민의 사실상 정보 값이 없는 주장은 1980년대 중국과 영국의 반대되는 상황이나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개념의 혼동을 전혀 해결해줄 수 없다. 오히려 그 혼동의 원인이라고 할만하다. 오히려 이런 예시들은 하나의 사실만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진보와 보수는 그들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별개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80년대 중국 

한번 진보와 보수에 들어가는 온갖 첨가물을 배제해보자. 좌, 우, 시장주의, 개입주의, 정치적 자유, 여성인권 등 수많은 이슈와 의제들 말이다. 대신,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을 가장 헷갈리게 한 주범이기도 한 1980년대 중국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무엇이 진운과 이붕을 보수파로 만들고, 무엇이 등소평과 조자양을 개혁파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시작은 1976년이었다. 이 해는 중국인들의 정신적 영웅인 주은래(저우언라이)와 군사 원로인 주덕(주더)이 사망하고, 당산(탕산) 대지진이 일어나 10만 명 혹은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다(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와 동시에 중국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극도로 혼란하게 만든 지도자 모택동(마오쩌둥)도 사망했고, 그 후계자는 나약하고 인망 없는 화국봉(화궈펑)이 맡게 되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탕산시의 모습. 탕산 대지진이 일어난 1976년은 모택동이 타계한 해이기도 하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탕산시의 모습. 탕산 대지진이 일어난 1976년은 모택동이 타계한 해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구심점을 잃은 중국은 훨씬 더 뿌리 깊은 대내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경제는 수십 년째 정체했고, 모택동의 정책은 파멸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근대적 보건의료가 전 사회적으로 보급되면서 사망률이 줄어 인구는 많이 늘었지만, 식량 생산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공산당 통치는 인민에게 점점 더 신망을 잃었고, 경제적 활력이 없는 도시에서는 대중 소요와 시위가 늘었다.

이런 도전에 맞서 중국 지도부는 기존의 공상적 마오이즘을 배제하고,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조금 더 유연한 체제로 바꾸자고 합의했다. 바로 개혁개방이다. 1978년 제3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3중전회)는 바로 그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때 보수파의 거두 진운과 개혁파의 거두 등소평이 나란히 앉아 개혁개방을 선포하는 사진을 보면, 천안문의 유혈사태로 마감되는 80년대의 격렬한 정치적 갈등을 연상하기 힘들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이때만 해도 중국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소리다.

천윈과 덩샤오핑 (1952, 출처 미상)

먼 훗날 보수파의 거두가 되는 진운(천윈)과 개혁파의 거두가 되는 등소평(덩샤오핑)의 젊은 시절 (1952, 출처 미상)

개혁개방 심화에 따른 갈등 

대신 개혁개방이 점차 심화하면서 갈등이 곧바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은 농촌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새롭게 인정된 향진기업은 농촌 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도시 경제에도 점차 과거 공산정권 이전의 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대중과 지방 당 관료들은 개혁개방 정책을 지지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을 인정해주었다. 등소평과 그가 키워낸 당 관료들은 이런 성과를 보면서 기존 중국의 경직성을 더 많이 유연하게 풀어주고 더 많은 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 덩샤오핑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20031125123522.jpg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 덩샤오핑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그러나 이 정책에는 이면이 존재했다. 기존 단위(단웨이)를 통해서 중국은 활력은 떨어지지만, 극도로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단위 속에서 살아가면서 사회보장을 받고, 기초적인 생필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장경제 원칙이 도입되자 중국은 외채와 인플레이션이라는, 그 전에는 관리할 필요가 없던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차관을 통해서 중국은 더욱 빠르게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과거 외채에 휘둘렸던 청대나 중화민국 시절의 어두운 과거는 차관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또한, 정부가 가격 통제를 완화하면서 시장거래는 더욱 늘어났지만, 아직은 물자가 충분치 않던 중국 도시에는 상당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많은 도시민들은 기존의 안전망이 제거되면서 불안함을 느꼈다. 가격통제 완화 조치가 발표되면 곧바로 사재기 현상이 등장했고, 암시장이 번창했다. 그렇지만 막상 생활 수준은 이런 도시민의 불안을 상쇄할 만큼 빠르게 높아지지 않았고, 불만은 날로 커갔다. 이는 학생 시위와 대중 소요로 발전했고, 80년대 중국 지도부를 내내 괴롭혔다.

진보와 보수는 ‘전략’의 문제 

보수파는 개혁개방이 초래하는 이런 의도치 않은 결과들을 보면서, 개혁 속도를 늦추거나 더는 개혁을 진행하면 안 된다고 진단했다. 이들이 바라보기에 경제는 여전히 국영기업의 통제하에 놓여야 하고, 차관을 과도하게 받는 것은 경제를 외국 자본가들에게 종속시키는 위험한 행위였다.

또한, 가격 통제를 완화하고 인구 이동을 용이하게 하는 건 정부의 관리능력을 벗어나는 사회적 혼란만 키워줄 뿐이었다. 특히 총서기 호요방과 그 후임 조자양, 그리고 ‘중국의 사하로프’로 불리운 방려지(팡리즈) 등이 주장하는 정치개혁이나 언론 자유 등은 가장 위험한 것이어서 공산당의 통치를 붕괴시키고 중국을 영원한 혼란으로 밀어넣을 최악수로 간주했다.

1980년대 중후반 신변 위험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시민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팡리즈 박사. (출처: 차이나타임스)

1980년대 중후반 학생들과 시민에게 인권의 중요성과 민주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방려지(팡리즈) 박사. (출처: 차이나타임스)

이들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중국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개혁파는 이 위기를 기존의 잘못된 제도와 정책을 뜯어고치면서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만약, 그 변화의 과정에서 어떤 스트레스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더 많은 것을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보수파는 위기의 존재를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개혁이 갖고 올 부작용에 훨씬 더 민감했다.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정립된 사회체제가 주는 안정성을 함부로 버리면 통제 불가능한 혼란이 찾아온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훨씬 간단히 말하자면, 진보는 바꿀 것을 바꾸자는 것이고, 보수는 지킬 것을 지키자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이처럼 전략의 문제다. 정확히는 미지의 것을 마주하였을 때 모든 인간이 고려하는 두 가지 상황 판단에 있어서 어느 쪽에 비중을 더 둘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사회를 구성하는 어떠한 요소를 바꿀 때, 우리는 어떤 변화가 초래될지 정확히 알 수 없다. 1980년대 중국 지도부가 했던 고민이 그러했고, 멀리는 프랑스 혁명을 관찰한 보수주의의 거두 에드먼드 버크가 그랬다.

버크는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자의 교과서적인 생각을 드러낸다. 버크에 따르면 전통이라는 것은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왔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왜냐면, 전통은 인류가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해 축적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 자산을 버렸을 때 어떤 위험요소가 등장할지 알 수 없다면 안 바꾸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이야기다.

에드먼드 버크(1771) http://en.wikipedia.org/wiki/Edmund_Burke http://en.wikipedia.org/wiki/File:EdmundBurke1771.jpg

“악이 승리하는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는 잠언으로 유명한,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아일랜드계 영국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 (1771)

또 다른 중국의 예시를 살펴보자. 주용기 총리가 국영기업을 대대적으로 개혁해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구조조정을 이끌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고용 충격과 실업에 대한 우려했다. 수천만 명을 순식간에 해고하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중국 경제에 족쇄로 작용하던 거대한 국영기업들이 구조조정이 되자, 급속하게 새로이 성장한 민간 부문에서 실업자를 흡수함은 물론이고, 훨씬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해냈다.

이렇게 보면, 필연적으로 좌파가 진보일 이유는 없고, 또 우파가 보수일 이유는 없다. 진보와 보수는 엄밀히 말해서 정치적, 사회적 견해 이전의 문제, 즉 미지의 것에 대한 전략의 문제이며, 기회 포착과 위험 회피의 비중 문제다. 선사시대부터 왕안석의 개혁을 둘러싼 송대 조정의 논쟁이나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둘러싸고 일어난 숱한 정치적 갈등, 그리고 1980년대 중국과 노무현과 문재인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진보와 보수는 보편적인 전략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역사적인 ‘특수 전략’ 좌파와 우파 

반면 좌파와 우파는 이런 보편적인 전략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좌파와 우파는 산업화가 가지고 온 사회경제적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대적으로 굉장히 특수한 전략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좌우파의 기원이 된 국민공회(국회)의 자리 배치. 의장석을 기준으로 급진파 자코뱅당은 왼쪽(좌파)에 앉았고, 온건파인 지롱드는 오른쪽에 앉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좌우파의 기원이 된 국민공회(국회)의 자리 배치. 의장석을
기준으로 급진파 자코뱅당은 왼쪽(좌파)에 앉았고, 온건파인 지롱드는 오른쪽에 앉았다.

산업혁명은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산업자본가들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대규모로 조직된 노동자들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를 장악하기 위해 우파와 좌파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노동자가 없으면 좌파가 없고, 자본가가 없으면 우파가 없다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진보랑 보수랑] 2. 서구에서의 이념'에 사용한 도식. 서양 역사 속 좌파와 우파를 도식화했다. (출처: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352582

중앙일보가 ‘[진보랑 보수랑] 2. 서구에서의 이념’에 사용한 도식. 서양 역사 속 좌파와 우파를 도식화했다. (출처: 중앙일보)

사냥감이 줄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할지 고민하는 부족회의에 좌파와 우파가 있는가? 그저 이동하여 기회를 포착하자는 진보와 검증된 장소에서 사냥감들의 수가 회복되기를 기다리자는 보수만이 있을 뿐이다. 그 특수성이라는 차원에서 좌파와 우파는 조선 시대의 ‘이기론’ 논쟁과 비슷하다. 조선이라는 특수한 시간적, 공간적 맥락 없이는 이기론이 무의미한 허공의 논리 싸움에 불과하듯이 좌파와 우파도 산업시대라는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당 부분 상실한다.

하지만 이런 도식이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진보/보수를 가르는 사안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관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우선 “진보는 인간을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말을 나는 비판했지만, 이 말이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에게 큰 호소력을 가진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대처와 레이건, ‘굴라크’는 진보인가 

직관적이지 않은 경우에 관한 예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980년대 중국의 보수/좌파, 진보/우파의 문제는 어느 정도 직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반대로 영국은 어떨까? 대처의 보수당은 중국에서 주용기(주룽지)가 진행한 것과 같은 대대적인 민영화와 복지 축소 등을 단행했다. 대처의 이런 정책들은 전후 노동당 정부가 설계한 복지국가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또한 개혁조치로 환영받았다.

그렇다면 대처는 진보고 노동당은 보수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여기까지 오면 확실히 우리의 직관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실제로 대처는 사회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인 정책을 강행했고, 대서양 건너편의 레이건도 이와 유사한 정책 패키지를 추진했다.

대처와 레이건 (1981)

대처와 레이건 (1981)

이조차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다음의 예시를 생각해보자.

레닌과 스탈린의 강제노동 수용소는 진보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막대한 노예노동력을 전례 없던 규모로 배치하면서, 소련은 엄청난 속도로 산업화의 기회를 잡아낼 수 있었다. 산업화에 우물쭈물하다가 전쟁에서 패배하고 멸망한 로마노프 왕조와는 굉장히 대비되는 일 아닌가.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스탈린의 산업화는 분명 진보적인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등공신이라고 할만한 ‘굴라크'(ГУЛаг, gulag; 강제노동수용소)까지도 진보적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보수적인 정책은 확실히 아니다.

굴라크(ГУЛаг, gulag)는 진보인가? 굴라크는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담당하는 기정부기관을 의미한다. 하지만 점점 소련의 강제수용소와 거기에서 행해진 강제 노동 그 자체를 상징하는 용어로 쓰여졌다.

굴라크(ГУЛаг, gulag)는 진보인가? 굴라크는 원래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점점 소련의 강제수용소와 거기에서 행해진 강제 노동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이는 우리가 과거의 낡고 안 좋은 것에 대비하여, 현재 혹은 미래의 더 새롭고 좋은 것이 있다는 선형적인 세계관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앞과 뒤에 대한 명백한 기준이 필요하다. 새로운 형태로 노예제를 도입하자고 하는 주장은 요즘 시대에 어떻게 포장해도 진보적인 정책이라는 소리를 못 들을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막대한 기회를 선사한다고 해도 말이다.

나치 돌격대의 에른스트 룀과 같이, 기존의 사회질서를 일소하고 민족 공동체에 근거한 신세계를 창조하고자 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분명 자신들이 사회의 진보를 이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들은 파시즘 사회의 건설이 만들어줄 막대한 기회를 위해서 기존의 낡은 것들을 파괴하자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내가 앞서 설명한 진보의 개념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치를 진보라고 간주한다면 그는 정상인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목적론적 진보

원칙적으로 시대적 맥락에 따라서 좌파가 보수일 수도 있고, 우파가 진보일 수 있으며, 1980년대 중국은 이를 실증한다. 하지만 노예제, 굴라그, 나치즘 등의 문제를 진보(와 보수라는) 전략의 문제로 쉽게 환원할 수는 없다. 이들이 보편적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추구해온 어떠한 가치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와 정치의 목적이며, 그 과정이 곧 진보라는 관념이 자리한다.

따라서 이 보편적인 진보에 반하는 급진적인 수단은 진보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들이 급진적인 수단을 통해서 자신의 지향점을 달성하고자 하는 기회를 포착할 수는 있어도 그 지향점 자체가 ‘보편적 진보’로 취급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수단이자 전략으로서 진보/보수의 관념은 모든 것을 꿰뚫는 창이라고 할 수 있다. 좌·우파라는 방패는 이 창으로 뚫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합의되는 가치가 존재하며 이를 목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목적론적 진보 관념은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방패다.

우리는 두 글자로 이런 상황을 모순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모순을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결국 나는 모순이라고 취급하고 이 문제를 넘어가보는 것보다는 아예 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기회 포착과 위험 회피라는 전략에서의 보편성과 자유 확대와 인권 보장 등 목적에서의 보편성 중에서, 전자를 더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얻는 집단이 승리한다”

이언 모리스는 그의 저서인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와 [가치관의 탄생]에서 “인간이 진화를 통해 만들어온 핵심 가치들이 있으며”, 인간의 가치체계라는 것은 사회조직 방식에 따라서 그 핵심가치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절대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라는 것은 결국 없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사회조직 방식은 결국 에너지 획득 방식이 결정한다. 더 많은 에너지를 획득하는 집단이 승리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획득하도록 사회조직을 일신하는 집단이 승리하여 다른 집단을 압도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회조직을 정당화 해주는 가치관을 만들어내며 곧 그 가치체계를 따른다.

이 에너지 획득 방식은 수렵채집, 농업, 화석연료로 구별된다. 따라서 수렵채집 사회와 농업 사회와 화석연료 사회는 모두 각자의 가치체계가 있으며, 우리는 다른 가치체계를 굉장히 이질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이언 모리스는 자신이 그리스 아시로스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할 때 게오르기스라는 농민을 만난 일화를 소개해준다. 남성이었던 게오르기오스는 나귀를 타고 편하게 오는 반면, 아내는 무거운 짐을 이고 힘들게 걸어가고 있었다. 모리스와 그의 동료들은 이를 후진적인 것으로 여긴 반면 게오르기오스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으로 여겼다. 여기서 농업 사회(아그라리아)와 화석연료 사회(인더스트리아)가 충돌한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소년 코난] (1978)에 나오는 가상 국가 '인더스트리아'의 중심 건물 '삼각탑'. 코난은 원시 농촌 공동체와 미래 과학기술 문명의 충돌을 기본적인 골격으로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소년 코난] (1978)에 나오는 가상 국가 ‘인더스트리아’의 중심 건물 ‘삼각탑’. [미래소년 코난]은 원시 농촌 공동체와 미래 과학기술 문명의 충돌을 기본 골격으로, 원시 농촌 공동체에 대한 향수와 동경을 드러낸다.

인더스트리아의 산물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가 추구하는 인권, 자유, 복지, 성평등 등의 수많은 ‘보편적’ 가치들은 이 인더스트리아의 산물이다. 농업문명인 아그라리아에서는 전혀 다른 상식이 통용되었고, 그 이전의 수렵채집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아그라리아는 신분이 필요했고, 강제노동도 반드시 필요했다. 농촌은 굉장히 취약했으며, 늘 과잉 상태가 되는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산성 낮은 농업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사회기간시설과 그 관리인력이 필요했다.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이는 시스템 측면에서 굉장히 단순했던 수렵채집 사회와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복잡한 위계질서와 불평등은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유지될 수 없었고 그럴 필요조차 없었던 반면, 아그라리아에서는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노동의 한계수익이 낮았기에 공공사업은 강제적 동원에 의지했다. 모두에게 글을 가르칠 이유도 필요도 없었기에 문맹인 대다수 농민은 도시의 귀족, 관료들과는 아예 다른 인종으로 살아갔으며 모든 개인은 무수히 얽힌 인적관계망과 세세히 나뉜 카스트를 대대로 이어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상식이었다.

노예 검열 억압

하지만 인더스트리아로 사회가 이동하면서 이런 상식은 점점 구습이 되어갔다. 카스트를 나누는 수많은 사회적 장벽을 철폐하고, 농촌에 붙박이처럼 붙어있는 신민들은 생산성 있는 곳이면 어디로든 이동하여 노동력을 제공할 상호 대체가능한 시민이 되어야 했다.

이런 변화를 재빨리 받아들이고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은 그렇지 못한 국가들을 압도했으며, 아예 시도조차 못 한 아그라리아 사회를 정복할 수도 있었다. 대중사회와 여론이라는 것이 그에 발맞추어 형성되었고, 시민사회의 힘이 강해져서 국가의 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이는 보통선거권과 대중민주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아그라리아에서 가장 철저했던 사회적 장벽이었던 성별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대부분 인더스트리아는 여성노동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고, 경제적 자율성을 얻게 된 여성들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페미니즘에 반대해도 성평등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이제 찾기 힘들 정도가 됐다.

이는 이런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다른 인더스트리아 사회(이를테면 여성을 총력전 체제에 활용하기를 거부한 나치 독일)가 경쟁에서 뒤처진 결과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다. 만약 여성노동력을 활용하지 않고도 번창하는 인더스트리아가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는 사회를 압도하여 여성을 계속 가정에 묶어둘 수 있었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지금과 같은 힘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페미니즘

자유주의 전략 vs. 반자유주의 전략 

목적론적 진보 관념은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농업 문명이 산업 문명으로 발전하는 이행 과정 때문에 우리는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인더스트리아 가치를 가지게 됐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진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산업화를 경이적인 속도로 이루어내더라도 ‘굴라크’를 진보적 정책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는 특정 인구집단의 이동의 자유와 직업선택의 자유 등을 제한하고 노예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인더스트리아의 상식과 윤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 등은 이를 과거 신분을 나누고 피착취 계급을 억압하던 착취자와 그 부역자들을 청소해 진정한 인간 해방을 이루는 과정, 즉 진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이언 모리스는 이를 인더스트리아로 향하는 반자유주의적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현실 사회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하고, 다수 인민에게 풍요를 안겨주었다면 이와 같은 반자유주의적 전략은 정말로 진보가 되었을 것이다. 자유주의 전략에 패배하긴 했지만, 반자유주의적인 전략들도 이전 아그라리아에 비하면 놀랍도록 발전한 인더스트리아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현실 소비에트가 체제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면, '반자유주의 전략'은 진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만약에 현실 소비에트가 체제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면, ‘반자유주의 전략’은 진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대처와 레이건의 정책을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직관적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우선 이들의 사회문화적 정책은 아그라리아의 구습을 반영하는 것이었기에, 목적론적 진보 관념과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부합하지 않았다. 경제정책의 경우는 조금 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의 경제정책은 기존의 낡은 것을 바꾸는 것이었고 실제로 더 많은 경제적 기회를 창출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후 서구 사회에서는 복지국가, 부의 재분배, 평등 사회 등의 개념이 인간 사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적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은 이런 마땅한 진보의 과정을 훼손하려는 반동적인 시도로 여겨진 것이다.

그 대신 굉장히 유사한 정책이었어도, 등소평의 개혁 정책은, 기존에 자유를 억압받는다고 여겨진 중국 인민에게 막대한 경제적, 사회적 자유를 안겨주었다고 평가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경험은 우리의 인더스트리아적 목적론과 합치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등소평을 진보라고 해도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유이다(굳이 따지자면 중국의 개혁개방은 전통사회를 해방시키는 것과 더 유사했다).

1979년 1월 미국과 공식 수교 이후 9월 중국 지도자 최초로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을 만난 덩샤오핑.

1979년 1월 미국과 공식 수교 이후 9월 중국 지도자 최초로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을 만난 등소평. 등소평의 정책은 ‘우파’의 것이었지만, 이를 우리(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의 범 운명 공동체)가 ‘진보(적)’이라고 파악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치지향적) ‘목적론’의 범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예제, 굴리트, 대처와 레이건의 정책 등은 그 범위에 포함되지 못한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이는 절대적인 가치관들이 아니다. 다분히 인더스트리아에 특화된 인더스트리아인의 가치관일 뿐이다. 아그라리아에서는 진보의 관념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모든 전통 농업 문명사회는 사회적 혼란 대신 질서를 추구했다.

이전에 비해 복잡해진 농업 문명의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상식은 세습으로 유지되는 신분적 질서와 위계, 모든 이들의 역할과 의무를 세세히 규정한 전통적 가치관이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예속이자 퇴보로 보이는 것들이 과거에는 진보로 여겨졌다. 많은 이들은 이런 변화를 질서와 예절, 법도가 자리잡혀가는 진보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 

이언 모리스는 그의 책에서 남아프리카의 쿵산족 사람이 한 말을 소개했다.

“추장이 누구냐고요? 우리가 모두 추장이지요!”

우리는 이를 고대의 순수한 평등주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그라리아인에게는 질서가 바로잡히지 않은 야만 상태에 불과했다. 마치 아시로스의 게오르기오스를 보면서 그가 느꼈던 감정을 헤로도토스나 사마천은 변방의 비문명화된 수렵채집민을 보며 그대로 느꼈다. 물론 때로 이들은 수렵채집민을 문명에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인간들로 보기도 했다. 마치 지금 우리가 농촌의 경관을 향수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듯 말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가리키는 바는 목적론적 진보 관념이 분명 일리가 있으나 그것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즉, 방패는 모든 것을 꿰뚫는 창을 막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가 목적으로서 추구하는 가치들은 시대적 요구로 구성된 것이다. 물론 가치체계가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치체계가 상대적이라는 근거는 되어줄 수 없다.

분명 UN 인권헌장을 필두로 현대 인류 문명은 구성원들 사이에서 합의된 가치체계를 가진다. 반자유주의적이라고 여겨진 소련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소련은 1975년에 보편적 인권과 자유를 보장해야한다는 헬싱키 협정에 서명했다. 사실 이 협정은 인권 탄압을 빌미로 소련을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했다. 하지만 소련은 이런 가치를 거부한다고 천명할 수 없었기에 자신에게 불리한 협정임을 알고도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인권

이처럼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우리가 객관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분명 존재하며, 그 가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분명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회를 포착하고자 하면 진보고,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면 보수가 된다. 또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위험을 회피하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면 그것은 보수적인 것이다. 여기가 전략으로서의 진보/보수와 목적론으로서 진보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것이 목적론적 진보라는 ‘방패’가 전략으로서 진보라는 ‘창’에 비해 취약해지는 이유다. 신분제는 과거에는 진보였으나 이제는 구습 중에서도 최고의 구습으로 취급받는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진보는 인간을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유시민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인더스트리아의 진보 관념이다.

내가 유시민의 이 말을 공허하고 모호한 소리라고 비판했으면서도 직관적으로 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한 이유는 내가 인더스트리아 사람이기 때문이지, 진짜로 진보가 본질적으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서가 아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게 진보인 건 자유가 곧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이며 이전 사회는 자유롭지 못했기에 뜯어고쳐야만 한다는 인더스트리아 사회의 합의 하에서나 그렇다.

‘일렉트로니아’로의 이행 

만약,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우리의 ‘인더스트리아’ 문명이 다른 형태로 에너지를 획득하고 사회 조직방식을 바꾸어버린다면 어떨까? ‘모든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한다’는 것은 과거 인간이 어리석었던 시절의 꿈이나 환상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자유는 몰라도 적어도 평등은 그럴 가능성을 보여준다.

화석연료를 통해 에너지를 얻고 부를 창출해내는 인더스트리아가, 모종의 다른 방식을 통해 에너지를 얻고 전자화된 정보를 통해서 생명의 비밀을 헤쳐나가고, 다수 인간의 노동을 무익한 것으로 만든다면 우리의 가치관은 어떻게 될까?

이런 일들이 당연히 당장 벌어질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공상이자 설레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인더스트리아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사회, 이를테면 “일렉트로니아”로의 이행은 가능성의 차원에서 논의되기에 이미 충분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산업사회의 전통적인 좌우 구분은 선진 사회에서 새롭게 재정렬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알고리즘

알고리즘 위 노동은 점점 축소하고, 알고리즘 아래에서 알고리즘을 위해 하는 노동은 점점 더 확대한다.

90년대 토니 블레어는 제3의 길을 주장하면서 좌파와 구분되는 진보세력을 만들고자 했다. 빌 클린턴의 신민주당도 마찬가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런 움직임들이 누적된 결과, 현재 영국 보수당의 테레사 메이는 노동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고, 도널드 트럼프는 국내 기업들을 압박해 고용을 창출할 것이라는 공약으로 인기를 끌었고, ‘진보’적인 마크롱은 시장주의적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자 한다. 이들은 모두 1980년대까지 서구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조합의 정치인들이다.

이런 변화상이 몇십 년 더 지속된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부를 창출하는 데 있어서 인간 노동의 역할이 점점 더 축소되고, 숙련 편향적 기술 변화가 더욱 가속되어 불평등의 확대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추세로 입증된다면 어떨까? 월터 샤이델은 최근 저서 [위대한 평등주의자] (2017) 1에서 불평등을 크게 축소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총력전, 대규모 전염병, 국가 붕괴, 폭력적인 유혈 혁명이라는 네 가지 대혼란뿐이라고 주장했다.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만약 너무 거대해지고 복잡해진 인간 사회가 그런 재앙을 감당해낼 수 없어서 불평등이 고착화되고, 끝내 막대한 불평등이라는 것은 결국 현대 경제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인식된다면 우리의 가치체계는 어떻게 될까?

날이 갈수록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통해 끝내 상위 10%의 사람들만이 그들의 신체와 정신을 업그레이드하고 진정으로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면, 그때에도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주장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인간 인공지능

물론 이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언 모리스는 미래 사회는 더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되거나 지금보다 더 극단적으로 평등하게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즉, 아직은 모두 가능성의 영역이고, 미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변동, 이행, 혹은 에너지 획득 상 혁명의 결과물이 진보와 보수의 개념에 미칠 영향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더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미래 사회에서 불평등이 과거 아그라리아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대처와 레이건은 확실하게 ‘진보’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기회를 포착함과 동시에 그들의 목적론적 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진보와 보수는 앞으로도 기회 포착과 위험 회피라는 전략으로 구분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평등은 그렇지 않다. 창은 영원하나 방패는 더 강해지거나 새로 교체될 수 있는 것이다.


  1. [The Great Level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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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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