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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쇼프: “왜 조선인민군 전방부대의 소련 고문들을 소환한 것입니까?”

스탈린: “나는 적이 우리가 이 일에 참여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증거들을 남기고 싶지 않소.”

이후 이어지는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에도 스탈린은 철저히 장막 뒤로 숨었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공산권에서 계속해서 발휘되었다. 그리고 이때 소련, 중국, 북한의 정책 결정을 둘러싼 서로의 셈법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3년이나 끌게 만든 원인이 되었으며 여기서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갖고 있던 것은 당연히 스탈린이었다.

안보리에서 소련이 ‘거부권’ 행사하지 않은 이유 

하지만 얼핏 보면 소련은 오히려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방해한 것처럼 보였다. UN 안보리에 제출된 남한 지원 결의안에 소련 대표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만약 소련이 이때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은 결성되지 못했을 거고, 미군은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 독자적 군사행동을 해야 했을 것이다.

UN 안정 보장 이사회(안보리)
UN 안전 보장 이사회(안보리)

이후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사람들은 스탈린 혹은 소련 대표의 실수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소련의 실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으며, 앞서 살펴 본 스탈린의 정책 결정 동기를 알면 그 이유는 훨씬 명쾌해진다.

당시 스탈린의 최고 관심사 중 하나는 소련이 한반도의 전쟁에서 주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절대로 한국전쟁에 자신이 개입된 것으로 비춰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는 미국과 갈등 상황에 놓이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이 상황에서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면 소련이 김일성의 배후에서 한국전쟁을 계획한 것으로 전 세계에 공인될 상황이었고, 이는 스탈린의 의도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소련 대표가 참석하여 안보리 결의에 찬성 혹은 기권을 한다고 해도 이 역시 소련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일이 될 것이었다. 모스크바가 미국과 자본주의 세력에 협조하는 모양새가 되면서 공산권의 맹주로서 소련이 가진 위상이 분명 손상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스탈린에겐 이를 해결해줄 좋을 핑계가 있었다. 이미 소련은 1949년 국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쫓겨난 이후 UN 안보리에서 보이콧 중이었다. ‘중국’의 자리에 국민당 정권 대신 대륙을 차지한 공산당 정권이 들어가는 것이 적합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소련은 그저 보이콧을 철회하지 않고 어떤 결정도, 심지어 기권도 내리지 않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만약에 낙동강이 뚫렸다면

그렇다고 안보리 결의만으로 남한의 운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던 상황에서 북한의 기습 공격은 남한군을 거의 붕괴시키다시피 했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으며 남한 정부가 통제하는 영역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의 일부 지역에 불과하게 되었다.

여전히 남한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3개월간 낙동강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허리가 잘려나가기 전까지는 적화통일이 눈앞에 있던 것으로 보였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변화한 남북한의 점령지 (출처: Roke, CC BY SA 3.0)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북한 점령지 변화 과정 (출처: Roke, CC BY SA 3.0)

하지만 이미 북한군의 공세 능력은 어느 정도 한계를 보였었다. 지나치게 빠른 진격 속도는 보급선을 감당 불가능한 수준까지 늘렸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 공군의 공습은 북한군의 낙동강 돌파를 계속 방해했다. 낙동강에서의 공세 지연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유엔군과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할 수 있었고, 마침내 반격의 시간이 시작될 수 있었다.

낙동강 전투
낙동강 전투 (출처 미상)

만약에, 여기서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으면 어땠을까? 북한군이 더 강력했고 미군의 지원이 늦어져서 낙동강이 뚫렸다면, 부산까지 장악한 북한군을 미군이 몰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소수 한국인만 피난해 일본과 미국에서 정착했을 것이고 한반도에는 오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 정부가 지금의 북한과는 분명 판이한 모양새를 띠었을 것이라고 봐야겠지만, 어쨌든 소련식 개발전략 대신 일본식 개발전략을 채택해 수출에 목메는 발전주의 국가가 만들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압록강 너머의 동상이몽

물론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으며, 북한군의 자원을 갑자기 바꾸는 가정은 너무 무리해 보인다. 하지만 만약에 조금 더 다른 변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반격의 불씨를 만들어낸 것은 유엔군이었다.

우리는 북한이 수세에 몰렸을 때 마찬가지로 반격의 불씨가 되어준 외부 세력도 잘 안다. 그건 바로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이 1950년 가을과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북한군과 함께 진격했다면, 그래서 아슬아슬한 전장의 균형을 붕괴시켰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정부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1950년 10월 19일 비밀리에 압록강을 도하하는 중국 인민지원군(인민해방군) (사진 출처 미상)
1950년 10월 19일 비밀리에 압록강을 넘는 중국 인민지원군(인민해방군) (출처 미상)

이것은 실제로 가능했던 시나리오였다. 이미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미국의 참전이 중국 사회에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효과들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발발 이틀 뒤에 미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미군의 공습에 두려워한 일부 연안 도시에서는 사재기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사실 이 또한 스탈린이 의도한 바였는데, 중국이 자율적 행위자로서 미국에 가까워질 기회를 사전에 차단하고 소련 쪽에 어떻게든 도움을 요청하게끔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중국은 그런 이유에서 빠르게 한반도의 상황이 정리되기를, 즉 조선반도가 빠르게 적화통일되어서 미국의 추가적 개입과 영향력 확대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스탈린이 마오의 ‘참전’ 제안을 불허했던 이유 

마오쩌둥은 이미 7월에 북한 측에게 “4개 군단 32만명의 군대를 파병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했다. 저우언라이도 이승만을 바다로 몰아내자고 하고 있었고, 북한 측에 “십만분의 1, 이십만분의 1, 오십만분의 1 조선지도 각각 500장과 조선인민군 군복 견본”을 최대한 빨리 달라고 요청했다.

김일성은 이런 제안을 슈티코프 소련 대사를 통해 스탈린에게 알려주었지만, 스탈린은 마오의 제안을 허가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이미 전쟁의 발발로 그가 이루고자 한 목적의 대부분을 달성한 상태였다. 스탈린이 원하는 것은 이제 전쟁의 ‘지속’이었다. 스탈린이 마오의 ‘참전’ 제안을 허가하지 않고, 현 상태로 전쟁이 지속되길 원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스탈린이 원했던 건 한국전쟁의 '지속'이었다. (출처 미상)
스탈린이 원했던 건 중국은 참전하지 않되 미국은 계속 전에 발이 묶이는 상태로 한국전쟁이 ‘지속’하는 것이었다. (출처 미상)
  1. 미국의 발을 한국전쟁에 묶어두고 소련의 운신 폭 확대: 먼저 미국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독일과 동유럽의 문제들을 해결할 여력은 줄어들 것이었고, 스탈린은 그 틈을 파고들어 소련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더욱 넓히려고 했던 것이다.
  2. 중국을 배제하고 한반도에서 전략적 이익 독점: 또한,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이익을 독점하고 싶어 했다. 만약 중공군이 대거 파견되어 한반도에서의 전황을 종결시켰다면, 이후 적화통일된 조선 정권에 대한 전략적 이익을 중공과 공유해야만 했을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김일성은 7월에 저우언라이가 조선 지도와 군복 견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날 슈티코프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이렇게 요청했다.

“이미 미국 등의 국가들이 이승만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였으므로, 체코슬로바키아, 중국 등의 민주국가들도 그들의 군대를 이용하여 조선을 도와줄 것.”

슈티코프는 스탈린에게 어떤 지시도 받은 바가 없었기에 고의로 대답을 회피했다. 이후에 마오쩌둥과의 이야기를 끝낸 뒤에도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스탈린의 의견을 물어보았으나 슈티코프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회답했다.

소련의 한국전쟁 승인의 중개자 역할을 한 테렌티 슈티코프 북조선 주재 대사(1907년 ~ 1964년)
소련의 한국전쟁 승인의 중개자 역할을 한 테렌티 슈티코프 북조선 주재 대사(1907년 ~ 1964년)

스탈린이 판단을 일부러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남한군은 낙동강에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특히 미 공군의 지원은 인민군에 엄청난 손실을 강요했다. 김일성은 하루빨리 국제공군이 파견되어 인민군의 진격을 엄호해줘야 한다고 슈티코프에게 말했으나, 역시 슈티코프는 대답을 회피하고, “신속히 부대 병력을 보충하고, 예비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여 최대한 빨리 전진해 나갈 것”이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만 전해주었다.

스탈린과 마오·김일성의 줄다리기  

한편 마오쩌둥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통해 김일성에게 경고했다. 진격이 너무 빨라져서 후방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10월 2일에 스탈린에게 보낸 다음의 전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올해 4월, 김일성 동지가 베이징에 왔을 때, 우리는 외국 반동 군대가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을 심각하게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7월 중순, 하순, 그리고 9월 초순에 우리는 다시 3차례 조선 동지들에게 적이 해상을 통하여 인천과 서울로 진격하여 인민군의 후방을 차단할 위험이 있으며, 인민군은 이에 충분한 대비를 해야 하며, 적당한 시기에 북쪽으로 철수하여 주력을 보존하여 장기전에서 승리를 쟁취해야 할 것을 지적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이를 위해서 중공군이 파견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실제로 중공군을 인천 근방에 대규모로 배치했다면, 인천 상륙작전이 북한군의 허리를 절단하는 결과를 가져와 그렇게 엄청난 전과를 올릴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김일성, 마오, 스탈린 (출처 미상)
김일성, 마오, 스탈린 (출처 미상)

이런 이유들로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계속해서 스탈린에게 중공군의 조기 파병을 건의했고, 스탈린은 이에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8월 28일 슈티코프를 통해 김일성에게 이런 전문을 보낸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외국 군대가 곧 조선에서 쫓겨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외국 간섭자들과의 투쟁에서 연속적 승리를 얻지 못했다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승리는 때로 좌절과 함께 올 수 있으며, 심지어 부분적 패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전쟁에서는 연이은 승리는 기대할 수 없다. 러시아도 1919년 영국, 프랑스, 미국의 무장간섭을 받았으며 현재 소선의 상황보다 어려움이 훨씬 많았다. (여기까지는 사실상 하나 마나 한 위로였다. 진짜는 그 다음 문장이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우리는 조선에 전투기와 폭격기를 제공하겠다.”

김일성은 이에 매우 기뻐하며 스탈린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존경하는 스승님, 우리는 당신의 높으신 가르침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조선 인민 투쟁의 결정적인 시기에 우리는 당신으로부터 거대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김일성은 이후 중국의 지원 문제에 대해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이제 그가 살길은 모스크바의 지원밖에 남지 않았음을 안 것이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약속한 소련의 공군 지원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전황은 급속도로 바뀌고 있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들어온 것이다. 6월과 7월이 정반대의 모습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북한군의 전열이 붕괴해서 곧바로 평양이 함락되었고 유엔군과 남한군은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통일이 목전까지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중공군 파병을 지시한 스탈린

하지만 우리는 통일이 이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잘 안다. 1950년 10월, 이미 중공군은 압록강 근방에서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마침내 압록강을 도강하여 공세를 개시한다. 중국인들에게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국공내전으로 단련된 베테랑들이었고 펑더화이의 지휘 아래에서 산악을 통한 야간 기동을 통해 남한군을 박살 내고 이후 유엔군까지도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었다.

전황은 다시 뒤집혀 마침내 1월 4일에는 서울이 다시 함락되었다. 이후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었지만, 전쟁은 이전 38선 부근에서 고착되기 시작했고 휴전을 둘러싼 기나긴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양측은 어느 쪽도 전선을 돌파할 여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반도는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남의 대한민국으로 갈렸고, 그 뒤의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다.

결국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중공군
결국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중공군

그렇다면 왜 중공군은 10월에는 파병이 된 것인가? 마오쩌둥은 승리에 가장 적합한 시점에 파병을 결심했으나 스탈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면 10월에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을 두려워해서 스탈린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파병을 결정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실, 마오쩌둥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오히려 파병 계획을 취소해버렸다. 10월 3일에 마오쩌둥은 북한 측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줄 수는 있지만, 파병만은 안 된다고 못 박아버렸다. 마오쩌둥의 의지가 이럴진대 중공군은 왜 한반도로 쇄도해왔단 말인가?

당연히 이것 역시 스탈린의 결정이었다. 스탈린은 파병에 도저히 내켜 하지 않는 마오쩌둥을 설득해 중공군을 한반도라는 사지로 내몰았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만들어준 국제적 상황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고, 사실 북한의 통일이든 남한의 통일이든 분단이든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미군이 압록강까지 왔다는 소식에 스탈린은 “미국이 극동에서 우리 이웃이 되도록 내버려 두게.“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전쟁의 연장을 원했고, 중공군을 참전하게 해 미국과 중국의 힘을 동시에 빼놓기까지 했다. 이제 강력한 미국의 군사력과 대치하고 위협을 받게 된 중화인민공화국은 한동안 스탈린의 소련이 가진 강력한 붉은 군대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었다.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은 자신(소련)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은 하나의 체스판에 불과했다.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은 소련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하나의 체스판에 불과했다.

또한, 한반도에서 힘을 소진한 미국이 더 적극적인 군사개입 정책을 펼치는 것은 더 힘들어질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계산으로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향해서 ‘지금’이 파병할 때라고 말했고, 마오쩌둥은 당과 군부 대부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에게 선택지는 사실상 없었다. 왜냐면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중국의 사회적, 경제적 안정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였다. 소련의 지원이 없다면 마오의 신중국이 빠른 시일내에 건설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소련의 대대적인 지원과 협력을 허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스탈린밖에 없었다.

따라서 스탈린의 신임을 다시 사기 위해서라도 마오는 파병을 결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중국 인민의 핏값에 나름으로 보상해주었다. 파병이 결정되고 나서 소련의 수많은 기술자와 고문이 중국으로 들어가 과학기술을 전해주었고, 인프라를 건설해주었으며 공장 운영법을 알려주었다(후에 중국의 지도자가 되는 장쩌민도 1955년 모스크바로 유학을 갔고 소련 기술자와 자동차 공장을 운영했다).

파병을 통해 스탈린은 마오가 자신의 충실한 하위 파트너임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전쟁도 스탈린의 의도대로 더 연장될 수 있었다

만약? 몇 가지 가상 시나리오 

만약 몇 가지 상황들이 다르게 연출되었다면 한반도의 역사, 그 중 남한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상상해보자. 역사에서 ‘가정’ 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지만, 역사를 ‘지금’ 불러와 해석함에 있어 상상력을 제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아이디어 생각 마인드맵 시나리오 상상 이야기 가정

1. 한반도에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김일성의 조선 전쟁을 스탈린이 승인해주지 않았다면 결국 6.25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 수준의 파괴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미국 국무성이 동아시아 지역의 토지개혁에 대해 갖는 관심이 이후 급격히 떨어진 것을 고려하자면, 남한 개발의 핵심적 조건 하나를 이미 불완전하게 달고 가는 셈이 된다.

또한,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남과 북의 극렬 대치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고, 연성화된 긴장 국면이 조금씩 이어지는 정도였을 것이다. 전쟁의 경험을 겪지 않은 남한은 그렇게 집착적으로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목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토지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주들이 불평등한 촌락의 사회구조를 유지해 이득을 취하고자 했을 것이고, 개발은 정체되어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에 밀려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위협은 어쨌든 존재하기에 군부는 박정희 정권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고, 지주들과의 유착관계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남한은 아마 지금 남미에서 볼 수 있는 국가처럼 되지 않았을까?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 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북한이라는 ‘절대적 타자’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한 박정희 정부와 그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 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2. 통일한국 혹은 통일조선이 됐다면? 

그러면 만약 스탈린이 마오쩌둥의 7월 파병을 승인해줬다면 어땠을까? 32만 명의 중공군 참전에도 불구하고 남한군이 낙동강을 지켜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전열이 붕괴했다면, 위에서도 얘기했듯 한반도는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토지개혁은 이루어냈을지 몰라도 일본식 발전국가 개발전략, 아시아의 힘에서 조 스터드웰이 극찬한 그 전략을 채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개혁·개방을 중국보다 빨리했다면 몰라도, 북한이 중국보다 늦게 개혁개방을 했다면 지금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는커녕 1만 달러가 되기나 했을지 의심스럽다. 뭐가 되었건 지금 수준의 개발 단계는 절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이나 베트남의 사례를 볼 때, 이 적화통일이 된 한반도에서는 민주정권이 등장하기보다 공산당 정권이 일부 자유화를 추진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3. 중공군 개입을 스탈린이 지시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대다수 한국인이 제일 아쉬워할 마지막. 1950년 가을 중공군의 개입을 스탈린이 지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이 발발되었으니 토착 사회의 질서도 무너졌고 토지개혁도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한반도는 통일되었고 이제 일본식 전략에 익숙한 관료집단과 미국 유학파들이 진출하여 한국을 지금보다 더 괜찮은 나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남한이 1950년에 통일을 이루어냈다면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지 예측하는 것은 제일 어려울 것이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남한 엘리트에게 북한의 강력한 위협이 제공해주는 생존압은 사라질 것이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합병해도 그것에 자극받아 한반도에 공격을 감행할 공산정권도 없었을 것이고, 그것에 위협을 느껴 무리한 중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할 정치세력도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중공업 선셋 황혼 노을 바다 항구 조선업

수백 년 간 러시아와 싸워왔고 소련과 국경까지 접한 터키가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는가? 이 경우(사실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실제 역사가 그래왔듯 많은 것이 역사적 우연에 달려 있겠지만,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는 지금보다는 경제적 고도화 수준이 상당히 낮은 민주적 통일한국일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한국전쟁과 그를 둘러싼 여러 우연들은 우선 역사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일은 거의 없으며, 때때로 우리가 원했던 결과나 우리가 재앙이라고 생각한 사건들이 전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국전쟁에서 주도적으로, 능동적으로 상황을 이끌어간 남한 사람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오직 북한의 김일성이 가장 큰 주도권을 가졌다. 그러나 거시적인 국제적 상황으로 들어가면, 그조차도 스탈린과 마오쩌둥이라는 두 지도자의 긴장 관계와 서로 다른 계산 때문에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여러 지도자의 장기판이나 다름없었고, 그중에서 가장 많은 말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핵심 플레이어인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행동을 대부분 통제할 수 있었고, 전황을 때때로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체스판'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원하는대로 말을 움직인 스탈린. 하지만 소련은 붕괴했고, 대다수 사람에게 스탈린은 독재자로 남았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체스판’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을 움직인 스탈린. 하지만 소련은 붕괴했고, 대다수 사람에게 스탈린은 독재자로 남았다.

스탈린의 선택을 추동한 동기는 사회주의 국제혁명과 노동계급의 연대 같은 이제는 공허해 보이게 된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바로 전통적인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과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이익선 확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스탈린도 결국은 역사라고 하는 족쇄를 발목에 차고 최대한 멀리 뛰어보려고 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역사를 초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은 모두 스탈린의 의도대로 돌아갔지만, 소련은 해체되었고, 러시아는 그저 그런 지역 강국으로 전락했다. 그가 가지고 놀던 중국은 무섭게 성장하여 역으로 러시아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비극적 전쟁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상황에 휩쓸려 동족과 싸우기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남한인들은 미국의 동맹국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룩한 우등생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계산했고 그의 예측은 대부분이 맞아떨어졌지만, 그 또한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마저 예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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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오늘날의 한국은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필연일까요? 한국전쟁 전후의 현대사를 돌아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역학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반도의 운명을 회고하고, 우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방법을 생각해봅니다. (필자)

스탈린과 한국전쟁 

  1. 스탈린, 남침 승인을 거부하다 
  2. 스탈린의 체스판
  3. 역사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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