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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땅은 우리는 조금도 원치 않지만, 우리 자신의 땅은 한 치도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 이오시프 스탈린, 제16차 전연방공산당 대회 중앙위 정치보고에서, 1930년.

“그는 마치 하늘이 무너질 것을 걱정하던 고대 기나라 사람과도 같았다.”

– 녜룽전, 중국 인민해방군 원수

현실주의자 스탈린 

스탈린은 과거 일본 제국에 맞서 싸우며 세력을 확장해온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배타적으로 나오는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정책을 보고 마음을 바꾼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1949년에 완수된 중국공산당의 승리에 고무되어서 아시아 태평양에서 혁명의 물결을 확산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탈린이라는 인물의 특성과 당대 소련의 정책 결정 논리를 고려해보면, 이 두 가설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 직접적인 전쟁 재가를 둘러싼 스탈린의 결정에 사실 미국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역할은 애치슨 라인[footnote]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 애치슨 라인에 의해 한국과 중화민국,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사실상 제외됐다. [/footnote]을 설정해서 김일성을 자극한 것이 끝이었다.

애치슨 라인
애치슨 라인

실질적으로 스탈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스탈린의 정책 결정 우선순위와 관련이 있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나 이데올로그가 아니었다. 스탈린은 오히려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이미 그의 싱크탱크는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근간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보다는 훨씬 설명력이 높은 서구 경제학에서 많은 것을 차용해서 국제질서를 설명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공황이 찾아와 자본주의를 몰락시킬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이제 정책 결정의 근거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런 스탈린에게 있어서 국제무대는 피억압 민족과 노동대중의 일치단결한 혁명적 열기가 언젠가 무너질 자본주의를 박살 낼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 대신에 강대국들의 구체적인 경제 및 외교정책과 세력 간 힘의 대결만이 존재하는 차가운 곳이었고, 정책 결정의 근거는 바로 이런 현실적인 전략적 고려에서 나왔다.

스탈린은 이념을 앞세운 교조주의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의 역학에 민감한 현실주의자였다.
스탈린은 이념을 앞세운 교조주의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의 역학에 민감한 현실주의자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스탈린은 미국과의 갈등을 극도로 꺼렸다. 이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련이 아직 미국에 대하면 갈 길이 한참 먼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의 외교 정책은 철저히 수세적인 것이었다. 스탈린은 상대방이 과도하게 자극받을만한 행동을 절대 하지 않았고, 모든 세력 확장은 철저한 계산 하에서, 미국과의 관계에서 감당 가능할 정도로만 이루어졌다.

스탈린이 원하던 것은 단지 완충지대였을 뿐이다. 실제로 소련은 동서 양편의 파시스트에게 위협받았었고, 특히 서쪽은 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같은 피해를 감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외부의 안보적 위협을 흡수해줄 완충지대가 필요하다는 전략적 판단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는 그리스의 혁명가들을 버렸다. 그리스는 완충지대로 가치가 높지도 않고, 굳이 그곳에 목메는 영국과 충돌을 감수하면서 얻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폴란드는 그곳의 친서방 민족주의자들을 무리하게 탄압해서 비난을 받더라도 어떻게든 공산화를 시켜야만 했다. 폴란드는 이전의 수많은 침략자가 그랬듯 모스크바로 향하는 침략군의 탄탄대로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스탈린은 완충지대로서 폴란드를 포기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완충지대로서 폴란드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놓는 스탈린의 외교 정책은 외국 지도자와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동시에 격이 맞는 자본주의 지도자인 루스벨트가 자신에게 대들려고 하는 티토나 마오쩌둥 따위보다는 훨씬 나은 상대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재가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이와 같은 현실 인식에 근거했다.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나 아시아 혁명을 고무하고자 하는 의도는 스탈린이라는 인물에게는 상상이 가능한 선택지가 아닌 것이다.

요컨대 폴란드는 스탈린의 전략적 안목에 있어서 ‘우리 땅’이지만, 남한은 ‘남의 땅’이었다. 그렇기에 폴란드는 한치도 내줄 수 없었지만, 남한은 딱히 스탈린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미국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얻어낼 가치가 있진 않았던 것이다.

스탈린과 루즈벨트

일례로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던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회고한다. 전후 소련의 새로운 국경을 표시한 지도가 스탈린의 별장으로 배달되자 스탈린은 핀으로 지도를 벽에 고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 한 번 보세나. 북쪽은 모두 정상이지. 핀란드가 우리에게 지은 죄가 커서, 우리는 국경을 레닌그라드에서 좀 더 확장할 수 있었어. 발트해 연안은 원래 옛날부터 우리의 영토였는데, 다시 돌아왔고. 우리 벨라루스인들은 현재 모두 한 곳에 모여 살고 있고, 우크라이나, 몰다비아도 마찬가지야. 서쪽 상황도 정상이고.”

그리고선 몸을 돌려 동양을 지적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곳 상황은 어떤지? 쿠릴 열도와 사할린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야. 한 번 보라고! 얼마나 좋나? 뤼순항도 우리 것이고 다롄항도 우리 것이야. 창춘 철도 역시 우리 것이고, 중국, 몽골 역시 문제가 없는데…

(남쪽 캅카스를 가리키며) 이쪽 국경은 좋지 않아!

스탈린은 만족하지 않는 그 캅카스(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좁은 지역) 부근에서 일련의 팽창을 시도해본다. 남쪽 국경에 있는 터키와 이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서방 국가의 반발로 곧바로 팽창 시도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캅카스 지역의 국가들
캅카스 지역의 국가들

그래도 스탈린은 2,700만 명 소련인의 피를 흘려가면서 얻어낸 국경선에 대체로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의 충돌을 원하지는 않았고 그저 자기가 얻어낸 땅들만 더 잘 지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격동하는 전후 동아시아의 상황은 스탈린의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흔들 수밖에 없었고, 곧이어 스탈린은 마음을 바꿔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한다.

중국의 붉은 별

동시에 동아시아에서는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1949년, 장시성에서 옌안으로 도망온 한 줌의 홍군이 대륙을 장악했다. 대일전쟁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미국의 지원까지 받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공산당에게 그토록 허무하게 패퇴당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스탈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8월에 체결된 중소 우호 동맹 조약은 국민당 정권과 소련 사이에서 체결되었는데, 소련은 만주의 60만 관동군을 3주만에 분쇄한 자신들의 우월한 전략적 위치를 활용해서 국민당 정권에게 많은 양보를 받아낸다. 바로 중국의 창춘선 철도(만주철도) 이용권과 랴오둥 반도의 다롄(대련), 뤼순(여순) 항구 사용권을 얻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중국공산당 측에는 오히려 국민당과 연정하라고 조언해주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이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중국의 붉은 별’ 마오쩌둥은 자신 나름의 셈법이 따로 있었다. 그는 일찍이 1920년대부터 코민테른의 조언을 받은 중국 공산당의 결정들이 전부 재앙으로 끝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 그는 대장정을 이끌고 소련에 경도된 이들을 숙청해냈기에 중국 문제에 있어서까지 스탈린의 말을 전부 따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오쩌둥은 그가 입증한 탁월한 지휘 능력과 권력 획득 능력에 힘입어 끝내 1949년에 독자적으로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자연스럽게 한반도, 그리고 소련까지 미치게 된다.

모택동 마오쩌둥

동아시아에서 거대한 공산주의 국가의 등장은 공산주의 운동의 입장에서는 좋은 것이었을지 몰라도, 스탈린에게는 아니었다. 소련의 입김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의 등장은 스탈린이 원하는 바가 절대 아니었다. 거기에 이미 스탈린은 국민당 정권과 꽤 괜찮은 관계를 정립해놓았고, 그는 유럽에 더 많은 자원을 집중하고 싶어 했으며 아시아에서까지 냉전을 의도하지는 않았다(물론 일본과 한반도에서 미국의 배타적 태도를 보고 대응 수위를 결정하긴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중국이 등장하면서 스탈린은 새로운 카리스마적 공산주의 지도자와 다시금 관계를 정립해야만 했으며 아태지역에 대한 미국의 더 높아진 관심도 견뎌야 했다. 여러모로 중국에서 공산주의의 승리는 스탈린에게 새로운 골칫거리들을 안겨줬다.

불확실한 동반자

“우리는 중국의 해방전쟁이 더욱더 승리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우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우방이란 진정한 우방을 뜻하는 것입니다. (중략) 우방은 진정한 우방과 거짓된 우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우방이란 우리를 동정하고 지원하며 원조해주고, 진실되고 정직한 우정을 표합니다. 거짓된 우방은 겉으로는 우호적인 척 합니다. 그들은 한편으로 어떤 말을 하지만, 행동은 다르거나 뒤에서 사악한 계획을 꾸미기도 합니다. 그들은 인민을 기만하고 뒤에서 인민들이 고통에 처한 것을 즐깁니다. 우리는 이 점을 경계해야합니다.”

– 마오쩌둥, 중국을 방문한 소련의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마오쩌둥은 영리한 사람이자 중국의 푸가쵸프[footnote]예멜리얀 푸가쵸프, 러시아의 가장 큰 농민반란 중 하나인 “푸가쵸프의 난”을 일으켰다.[/footnote]와 같은 농민 지도자입니다. 물론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제게 자신은 결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스탈린에게 마오쩌둥에 대해 보고하며

“스탈린이 마오쩌둥을 찾지도, 그 이외의 누군가에게 그를 대접하라는 명령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감히 그를 보러 가지 않았다.”

–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에 대한 니키타 흐루쇼프의 회고

무엇보다 스탈린은 애초부터 마오쩌둥을 제대로 신뢰하지도 않았고, 그것은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은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어봤을지도 의심되는 ‘마가린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의 농촌 혁명론을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과 소련의 국가적 이익에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는 진짜 공산주의자의 자격이 없었다. 차라리 내부의 이단보다는 바깥의 이교도가 스탈린 입장에서는 훨씬 감당해주기 좋았다.

그러나 이제 소련의 지원을 크게 받지 않고서도 독자적으로 엄청난 영토를 공산권에 추가시킨 마오쩌둥의 위상은 어떻게든 높아지게 될 것이고, 소련의 절대적 권위를 흔들 것이 뻔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예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스탈린이든 마오쩌둥이든 그 둘은 공산주의 혁명가였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러시아’의 혁명가였고, ‘중국’의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의 결정들은 혁명가로서의 결정보다는 전통적으로 부동항을 얻으려는 차르와 예로부터 북방의 위협을 경계해온 황제의 결정에 훨씬 더 가까웠다.

마오쩌둥과 스탈린

이제 ‘신중국’의 새로운 황제가 된 마오쩌둥은 다시 중국을 재통일하고 위대한 중화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약 100년 전 아편전쟁의 패배로 시작된 오욕의 역사를 씻어내는 길이었다. 이는 마오 이후에도 다르지 않아서 1997년에 이루어진 홍콩 반환은 중국 공산당의 의기양양한 승리를 장식한 사건으로 칭송받았다.

이것은 국민당 정권이 넘겨준 창춘 철도와 뤼순, 다롄 항구의 이용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련은 사회주의 형제국, 그리고 그 중에서도 형의 위치에 있는 나라였으나 어쨌든 외세는 외세였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을 진행했는데, 중소 우호 동맹 조약 문제가 이 시기 새로이 부상했다. 국민당 정권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적어도 대만해협 건너로 사라졌으니) 새로운 조약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이 조약의 갱신에서 절대로 만주에서 중국의 이익을 회수하는 문제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스탈린은 당연히 이에 내켜 하지 않았으나, 중소 관계를 바라보는 국제 사회의 여론과 소련의 위신 때문에라도 이를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 1월에 세부적인 협상과 조율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1950년 2월에 새로 갱신된 중소 우호 동맹 조약에서 마오쩌둥은 마침내 창춘 철도와 뤼순, 다롄 항구의 이용권을 회수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를 둘러싼 스탈린의 게임 세팅

시간적 순서와 스탈린의 정책 결정 동기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스탈린은 만주에서의 철수를 어떻게든 보상받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소련에 있어서 어떻게든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적어도 어떻게든 한국전쟁을 소련의 공식적인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루어진 북한의 단독행동으로 만들면 말이다. 그는 결코 미국과 괜스레 갈등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것이 어떻게 스탈린과 모스크바의 이익을 충족시켜주는 선택이 되었을까? 소련, 그리고 전통적인 러시아의 외교정책이 부동항 확보에 있었음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우다 보면 계속 강조되는 사실이다. 러시아 제국이 일찍이 일본과 전쟁을 벌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하얼빈, 그리고 뤼순항으로 이어지는 축과 조선반도로 이어지는 축을 극동 및 태평양으로 향하는 기지로 삼고 싶어 했다. 이것이 일본의 의도와 그리고 더 넓은 차원에서는 영국의 의도와 충돌했던 것이다.
기차

스탈린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움직였다. 즉, 이는 이념 이전에 아시아 태평양에서 소련이라는 국가의 전략적 이익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 이익을 위해서 스탈린은 부동항을 원했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만주 혹은 한반도였다.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 김일성이 전쟁에서 승리했더라면, 이는 스탈린에게 최선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미군 세력을 몰아내고 김일성을 지원해준 대가로 스탈린은 제주도와 부산을 기점으로 소련 태평양 함대의 활동범위를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미국이 개입하고 전쟁이 잘 안 풀려도 이는 전혀 문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주도면밀한 스탈린은 그에 대해서도 대비책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이 진짜로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한다면 위기의식을 느낀 중국이 알아서 뤼순 항과 창춘 철도에 대한 사용권을 소련에 다시 제공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 갱신된 중소 우호 동맹 조약에도 그대로 단서조항으로 삽입된다. 어떤 것이 되더라도 스탈린은 원하는 목표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일은 그렇게 돌아갔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김일성, 그리고 무시되는 마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재가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김일성은 1950년 1월에 취기를 빌려 슈티코프에게 다음과 같은 주정(?)을 부린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동지는 나에게 남한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오직 이승만의 군대가 먼저 공격을 할 경우에만 반격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지금까지 공격하지 않고 있어 남조선 인민의 해방과 국가의 통일 사업이 이처럼 지연되고 있다.

그러고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나는 공산당원이며,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다. 스탈린의 지시는 나 자신에게 있어 규율이며, 나 자신이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과 만나 나의 행동을 허락받고 싶다.”

1월 19일 슈티코프는 사건 경위를 모스크바에 전보로 보고했고, 스탈린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1월 30일에 슈티코프에게 다음의 전보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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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전보 

“귀하의 보고는 이미 받았다. 나는 김일성 동지의 불만을 이해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한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행동은 충분히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일은 반드시 치밀하게 준비해야 하며 큰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이 문제를 나와 논의하고자 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그를 만나 회담을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김일성 동지에게 전달하고, 이 문제에 대해 나는 그를 도울 준비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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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스탈린

줄곧 김일성의 요청을 묵살하던 스탈린이 드디어 전향적 태도를 내비친 것이다. 김일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기뻐하며 모스크바로 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2월 2일에 아주 의미심장한 보충 지시를 내렸다. 지시는 다음과 같다.

[box type=”info”]

스탈린의 보충 지시 

“김일성 동지에게 설명하기를 바람:

현재 상황에서 그(김일성)가 본인(스탈린)과 논의하려는 이 문제는 반드시 비밀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 사실을 적뿐만 아니라 조선의 기타 지도자와 중국 동지들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

마오쩌둥과의 회담을 모스크바에서 계속 진행할 예정이며, 우리는 조선의 군사적 능력과 방어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원조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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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사회주의 형제국’의 지도자인 마오쩌둥은 논의에서 빠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것은 바로 스탈린의 전략적 의도를 짐작케 해준다. 마오쩌둥은 후에 스탈린도 죽고, 한국전쟁도 끝난 지 3년 뒤인 1956년, 미코얀과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전쟁 전,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베이징에 와서 스탈린이 (전쟁 개시를) 이미 동의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주연과 나에게 와서 여러 차례 (조선 전쟁을 시작하자고) 말할 때, 나는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그들이 다시 말하기를 스탈린이 이미 동의를 하였으므로 중국도 단지 동의만 해주면 되고, 그들은 어떠한 도움도 원치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김일성이 (베이징에) 와서 스탈린이 이미 동의했다고 말했다. 이에 나는 삼국 중 두 나라가 이미 동의했기 때문에 반대를 고집할 수 없었다. 내가 계속 반대하는 것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에 미코얀이 이렇게 답했다.

“맞습니다. 귀하가 반대했어도 어차피 안 되었을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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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오늘날의 한국은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필연일까요? 한국전쟁 전후의 현대사를 돌아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역학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반도의 운명을 회고하고, 우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방법을 생각해봅니다. (필자)

스탈린과 한국전쟁 

  1. 스탈린, 남침 승인을 거부하다 
  2. → 스탈린의 체스판
  3. 역사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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