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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적’ 선배

한 선배가 있었다. 학내 무슨 무슨 조직에서 간부급으로 군림하던 선배는 ‘맑스주의적’이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살았다. 대강 이런 식이었다.

“맑스주의적으로 볼 때 말이야.”

“그건 맑스주의적이지 못해!”

“내 개그가 맑스주의적인가?” 

가깝지도 친하지도 않았던 선배에게 오만 정이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술자리에서 선배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내 동기에게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1을 인용하며 호되게 몰아붙였고, 결국 동기는 울음을 터트렸다.2 자신이 섭취한 이론으로 타인의 삶을 헐값으로 후려치는 선배의 모습에 진력이 나서 그때 이후로는 일부러 멀리 피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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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배와 다시 마주친 건 단과대 학생회장 선거 때였다. 학생회장으로 출마한 선배는 ‘맑스주의적’이라는 말 대신 ‘노동자 민중’이라는 말로 열심히 선거 운동을 하고 있었다. 하긴 지금 같은 시대에 마르크스를 내세워서 무슨 선거를 하겠느냐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선배는 나를 붙잡더니 또 노동운동이 어쩌고 총파업이 어쩌고 지루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만 갈 생각으로 무심코 한마디 던졌다.

“근데 선배는 왜 노동운동 말고 다른 부문의 운동은 얘기 안 해요? 운동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 않나요? 환경운동, 여성운동, 통일운동…”

선배는 단칼에 잘라 말했다.

“응. 그런 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면 저절로 해결될 거야.”

뭔가 기분이 뜨악했지만, 그때는 그 뜨악함이 뭔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선배는 인간의 노력을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고 자신은 그 중심부에 있으며 주변부는 나중에 알아서 잘 해결될 것이라 이야기한 셈이었는데 그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다. 어쨌든 뜨악한 기분은 그 뒤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선배는 학생회장에 당선되었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학내 조직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선배는 철두철미한 이론가였던 것 같다. 책 속에 있는 지식을 많이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선배는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던 마르크스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책에서 종교를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라 언급한 적 있다.

“(종교는) … 현실의 고통을 표현할 뿐 아니라 현실의 고통에 항의하기도 한다. 종교는 천대 받는 피조물의 한숨이고,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다.”

–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 중에서 (재인용 출처:  ‘마르크스주의와 종교’)

그러나 선배가 자신의 언어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오로지 말해지기 위해 존재하고, 설득의 도구로써 쓰일 뿐인 이론의 본질과 너무나 흡사했다. 선배의 존재 자체가 이론이었던 것이다.

선배는 종교를 통해 삶의 위안을 찾던 내 동기의 경험을 무시했다. 노동운동에서 비켜서서 다른 종류의 주장을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서슴없이 주변으로 내몰았다. 경험이란 책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해지기보다는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는 상대방을 향해 귀를 열어둔 채 자신을 내보이는 것들이라면 책 속이든 밖이든, 언어로 표현되든 행동으로 표현되든 그것은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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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그것을 내세우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우위와 권력욕을 위해 존재하지만, 경험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 경험은 더 많은 경험을 부르고 그렇게 모여든 경험들의 연대체는 이론과 권력투쟁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가려지거나 묻히기 쉬운 목소리들을 발굴한다.

그 시절 내가 선배에게 느꼈던 것의 정체는 피로감이었다. 그것도 아주 극심한 피로감. 읽은 것이 있어 남들보다 떠벌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의 삶은 주변의 배제와 중심의 옹립이라는 전형적인 권력 지향의 흐름으로 갔을 뿐 정작 자신이 주변이라 부른 곳에 갇혀 있는 목소리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선배가 수없이 주워섬긴 노동자들의 현실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지만, 선배는 그것을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 크기를 더 키우기 위한 확성기로만 사용했을 뿐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가 노동자면서 모두가 노동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과감히 뒷전으로 몰았다. 선배에게는 노동운동 혹은 노동자성이야말로 종교였고 나머지는 전부 이단이었다.

나는 그 선배 혹은 선배와 비슷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다. 거기서 나는 영원히 주변으로 내몰려 살아야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1.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 (1843)

  2.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 아편은 마약이 아니라 진통제였다. “종교는 민중의 진통제” 정도의 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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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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