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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Rated, 여성 영화를 분류하는 새로운 기준

영화를 평가하는 테스트 중 하나로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라는 것이 있습니다.

벡델 테스트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은 미국의 유명한 만화가입니다. 그는 1987년부터 2008년까지 “다이크 투 와치 아웃 포”(Dykes to Watch Out For)라는 만화를 연재했습니다. 그가 1985년에 그린 “법칙”(The Rule)이라는 편에서 한 여성 캐릭터는 아래의 세 조건을 만족하는 영화만 본다고 말합니다.

Dykes to Watch Out For의 한 장면

참고로 벡델은 이 아이디어를 자신의 친구인 리즈 월리스(Liz Wallace)에게서 차용했다면서 리즈 역시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차용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출처: 위키백과 – Bechdel test)

그 세 가지 조건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해야 하고 (It has to have at least two women in it)
  • 그 두 명이 서로 대화를 해야 하고 (who talk to each other)
  • 그리고 그 대화는 남자에 대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about something besides a man)

이 테스트는 쉽게 말해 여성이 단순히 구색을 갖추거나 성적 편견을 조장하는 역할 이상의 역할을 가지고 영화에 등장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즉, “벡델 테스트”는 영화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테스트입니다. 하지만, 위의 기준을 보다시피 매우 낮은 기준으로 평가할 뿐입니다. 정말 최소한의 조건이죠.

예를 들어보죠. 여기 100분짜리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남성들이 등장하는데, 서로 전혀 대화하지 않는 겁니다. 아니면 대화를 하긴 하는데, 100분 내내 여자 타령만 합니다.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찌질이 남성 친구들끼리 어떻게든 맘에 드는 여성과 데이트를 해보려고 좌충우돌하는 코미디 영화가 아니라면 이 영화는 아마도 이상한 영화가 될 겁니다. 아니, 그런 내용의 영화라 하더라도 상영시간 내내 여자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기괴한 영화가 될 확률이 높겠죠.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영화들의 숫자가 많다는 겁니다.

물론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다고 그 영화가 무조건 페미니즘 관점에서 훌륭한 영화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낮은 수준의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라는 뜻입니다. 그것조차 통과 못 한 영화가 많을 뿐이죠.

반대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무조건 여성을 차별하거나 반여성적인 영화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127시간(127 Hours)] 같은 영화는 주요 등장인물이 1명이죠. [그래비티(Gravity)] 같은 영화는 핵심 등장인물이 2명인데, 남성 1명과 여성 1명이라 영화가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벡델 테스트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F등급 영화들

2014년 영국의 영화감독 홀리 타퀴니가 디렉터로 있는 배스 영화제(Bath Film Festival)는 처음으로 F등급(F-rated)이라는 걸 소개했습니다.

F등급 (f-rated)

F등급 영화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여성 감독이 연출했거나 (is directed by a woman)
  • 여성 작가가 각본을 썼거나 (is written by a woman)
  • 여성 캐릭터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영화 (features significant women on screen in their own right)

그리고, 위 세 가지 조건 모두를 만족하면 트리플 F등급(Triple F-Rating)이 됩니다. “벡델 테스트”보다는 한결 더 나은 기준이 생긴 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극장에서 관객이 보는 영화는 다양한 문화를 표현하는 사람들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관객은 주로 백인 남성들이 카메라를 잡고, 각본을 쓰고, 제작비를 대는 그런 영화를 만날 뿐입니다. 변화 없이는 아마도 이러한 흐름은 다음 세대에도 계속될 테고요.

현실의 여성들이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고, 언제나 연약한 피해자가 아니듯 영화 산업 그리고 영화 속 이야기의 여성들도 그렇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게 진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테니까요.

f-rated.org 홈페이지 캡처

f-rated.org 홈페이지 캡처

이제는 IMDb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F등급 영화

2014년 배스 영화제가 42개 작품 중 17편을 F등급 영화로 선정한 이후로 여러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영국의 모든 독립영화관과 영화제가 이 F등급을 도입했습니다. 런던의 바비칸 센터가 영국에서 F등급을 40번째로 도입한 곳이 되었고, 런던에 있는 제네시스 시네마는 2017년 내내 매주 F등급 영화를 적어도 한 편 이상 상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이 미국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IMDb도 영화를 구분하는 키워드 중 하나로 “F Rated”를 쓰기로 했고, 시스템에 적용했습니다.

현재 [겨울왕국], [주노], [허트 로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맘마 미아!] 등을 포함해 21,747개의 작품이 “F Rated” 키워드 영화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작은 시도들이 큰 변화로

더 나아가야 할 점들이 많이 보이기도 합니다. IMDb에서 특정 영화가 “F Rated” 영화인지를 확인하려면 “Plot Keywords” 항목에 “F Rated”가 들어있는지를 일일이 확인해야 합니다. 많이 불편해요.

영어권에서는 “F-Rated”라는 표현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가 봅니다. 낙제를 의미하는 F학점이나 고장율(failure rate)의 인상을 받는다는 사람들도 있고요.

하지만, 막연히 좋은 영화, 나쁜 영화로 영화를 구분하지 않고, 구체적인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춰서 영화들을 분류하고, 또 그 기준을 더욱 합리적인 선으로 바꿔서 재분류하는 이런 일련의 흐름이 몇 년 지나지 않아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여러 매체가 단발적으로 흥행작에 벡델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벡델 테스트든 F등급 영화든 아니면 새로운 기준으로 분류한 여성 영화 리스트든, 잘 관리되는 리스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천천히 해도 좋으니까요. 지금의 영화인들과 관객을 위해서.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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