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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울에 비춘 두 제국: 1. 이란과 중국

2017년 1월 8일, 이란의 타지리시에서 호메이니와 함께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이끌었던 라프산자니 전 이란 대통령이 83년의 생을 마쳤습니다. 라프산자니의 죽음은 바야흐로 혁명 1세대의 퇴장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이란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후견인으로서 라프산자니의 빈자리를 염려합니다. 라프산자니의 죽음 이후, 이란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앞으로 3편에 걸쳐 이란이 걸어갈 길을 중국이라는 ‘역사의 거울’에 비춰 전망합니다. (편집자)

  1. → 이란과 중국 
  2. 혁명을 갈망하고 혁명에 지치다 
  3. 중국은 이란의 미래인가

얼마 전에 국내에서는 그리 큰 관심을 끌지 못한 기사가 하나 났다. 1979년의 이란 이슬람 혁명을 그 유명한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함께 이끌기도 했던,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이란 대통령이 죽었다는 기사였다.

라프산자니 (1934년 8월 25일 ~ 2017년 1월 8일, 페르시아어: اکبر هاشمی رفسنجانی)

라프산자니 (1934년 8월 25일 ~ 2017년 1월 8일, 페르시아어: اکبر هاشمی رفسنجانی)

이란의 운명은 어디로 

라프산자니의 죽음은 곧바로 이란 핵 협상과 경제 개방의 지속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이란 개혁파의 거두였던 그가 죽은 것에 더해서 미국에서는 이란 핵 협상에 굉장히 부정적인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이란 안에서는 개혁을 지지하는 혁명 영웅이 죽고, 이란 바깥에서는 이란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상황이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는 행정명령을 발동하여 일시적으로 이란, 시리아 등 7개국 국민에 대한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 이른바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란도 미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 중단 방침을 밝혔다.

"우리는 모두 이주자들이다." (출처: Alisdare Hickson, "we are all immigrants ", CC BY SA) https://flic.kr/p/QyPkKf

“우리는 모두 이주자들이다.”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자들. (출처: Alisdare Hickson, “we are all immigrants “, CC BY SA)

오바마 행정부의 가장 큰 외교적 성과가 이토록 위협받는 상황에, 우리 정부가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왜냐면 이란 문제는 단순히 이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중동 전역과 나아가서는 북한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란이 내부와 외부의 압력을 잘 넘기고, 국제경제에 문을 열고 끝내는 책임 있는 지역 강국으로 자리 잡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지구 사회 전반에 이익이기도 하지만 북한 문제를 포함한 여러 차원에서도 한국에도 이익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내부와 외부의 파고가 당분간 더욱 거세질 것 같다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불안감을 계속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란에 큰 관심 없는 외부인들에게도 이럴진대 이란의 개혁파에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하지만 태양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했던가. 요즘 기사만 보면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이 나오고, 실제로 이란의 운명도 매우 불확실해진 것 같지만, 참조할 길잡이는 여전히 있다.

Q. 다음 설명하는 나라는? 

이란이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답을 찾고자 한다면, 우선 이란이 어디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올바른 위치 감각을 가지면 비슷한 조건에 처했던 다른 사례와 비교를 하면서 앞을 점쳐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음표

한 나라가 있다.

이 나라는 유라시아 한복판에 있는 대국이다. 그리고 일찍부터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워 현대까지 이어왔다. 그래서 자신들의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다. 때로는 주변의 야만인들에게 굴복한 적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결국은 자신의 문화적 성취에 감복하여 동화되곤 했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문명은 곧 세계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이 나라는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혼란을 겪는다.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침입해 들어왔고, 남쪽에서는 영국이 간섭을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국내에서는 전통적인 왕조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헌법을 만들자고 목소리를 내고, 그 이후에는 좌파 세력이 성장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지배층은 이런 대내외적 압력에 대응하는 데 실패하였다. 끝내는 혁명이 일어나 구질서가 와해되었다. 하지만 혁명은 곧 고난의 길이었다. 곧이어 들어선 혁명 정권은 극단적인 이념과 철저한 군사조직을 양손에 들고 반대파를 숙청하고 대대적인 사회적 정화운동을 펼쳤다. 문화적 자유는 물론이고 말 한 번 잘못 했다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전쟁과 혁명의 혼란 속에서 국가는 점점 가난해졌고, 국민의 불만은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개혁과 개방을 외치는 지도자가 등장한다. 이 지도자는 여전히 외세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이 뿌리 깊은 나라에서 다시 세계로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다. 보수파들은 격하게 반발하며, 인권이나 자유 등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서구 국가들과 다시 긴장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그리고 경제가 차츰 열리는 와중에도 정치적 억압은 끊이질 않는다. 이렇게 보자면 이 나라의 미래는 불투명해 보인다. 이들은 문을 열기를 선택할까, 아니면 다시 걸어 잠그는 것을 선택할까?

A. 이란과 중국 

앞서 설명한 이 나라는 어디일까?

이 글에서 이란을 얘기하고 있으니 이란일까? 맞는 말이긴 하다. 이란인들은 높은 문화적 자긍심을 갖고 있다. 페르시아는 서양 최초의 제국이나 다름 없었다. ‘야만인(투란)’이던 투르크인들이 그들을 정복했지만, 그들은 문명(이란)에 동화되었다. 투르크인들은 언제나 궁정에서 페르시아어를 사용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이란은 카자르 왕조의 무능함에 고통받았고, 러시아와 영국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그 후 들어선 팔레비 왕조도 사회적 갈등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고,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적 열정을 분출시켜 주었으나 혁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포와 광기도 같이 보였다.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그리고 바로 이라크가 대대적 침공을 개시해서 나라는 혼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란에서는 혼란을 수습하는 개혁적인 지도자가 등장했으나, 글의 머리에서 밝혔듯이 대내외적 어려움에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이다.

이란

중국

그러나 이 나라는 이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라시아의 동쪽에 비슷한 나라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중국이다. 동양의 진정한 제국이자 문명의 중심지는 언제나 중국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이란인들이 문명인 이란과 야만인 투란을 대비시켰듯이 중국인들도 중화와 오랑캐를 대비시켰다. 오랑캐들이 중국을 정복한 적도 많았으나 그들 또한 중국의 용광로 속에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순 없었다.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화약 무기를 갖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을 평정했던 것처럼 중국도 청 왕조의 강희제가 화약 무기와 함께 준가르의 유목민을 굴복시켜 초원길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청 제국도 결국은 러시아와 영국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탈을 이겨낼 수 없었다. 중화민국은 이 위기를 이겨내지 못했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하면서 ‘신중국’이 세워지게 된다.

하지만 중국의 공산당 정권 역시 새로운 사회적 열정과 함께 어마어마한 광기도 보여주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나라를 황폐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위기를 풀고자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이 등장해서 미국과 일본 등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 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천윈을 비롯한 보수파들이 이에 반발하였고, 80년대 내내 두 세력은 개혁개방을 두고 갈등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때로 대만 문제를 놓고, 대체로 그의 우군이었던 미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 갈등은 그리고 1989년의 천안문 사태로 이어진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로 끝났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로 끝났다.

천안문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은 중국 당국의 학살에 강력히 비난했다. 천안문을 빌미로 보수파는 개혁·개방이 정권에 가져올 위협을 경고했다. 마침 당시는 소련이 붕괴 직전에 몰려 세계적으로 불확실성이 커가던 시기였고, 미국은 걸프 전쟁에서 막강한 무력을 과시하였다. 개혁·개방의 미래, 그리고 나아가 중국의 미래마저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중국은 1976년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의 혼란한 중국, 혹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직후의 무기력하고 충격에 휩싸인 중국이 아니다. 2017년의 중국은 다보스 포럼에서 당당히 자유무역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는 국가가 되었다.

중국 용

이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그리고, 이란과 중국이 비슷하다면 이란 또한 중국처럼 될 수 있을까? 그를 위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열쇠: 지정학

이야기를 위해선 또 하나의 재료가 더 필요하다. 바로 지정학이다. 지정학은 정교한 분석 도구와 독자적 방법론을 갖춘 학문이라기보다는 지리적 공간 위에서 펼쳐지는 전략을 위한 느슨한 이야기의 집합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현재 수준으로는 결코 밟고 있는 땅에서(때로는 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때문에 지정학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면 엄청 쓸모 있는 생각은 못해도 최소한 재미난 이야깃거리들은 몇 개 건질 수 있다.

이 관점으로 세상을 처음 보기 시작한 사람은 지정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지리학자 핼퍼드 매킨더(Halford Mackinder)였다. 그는 인구와 자원이 집중된 유라시아의 각 지역에 접근할 수 있는 곳,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지역의 ‘심장지대(heartland)’를 장악하는 이들이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하지만 동유럽부터 중앙아시아까지 펼쳐진 광활한 제국을 통치하던(무려 지구 육지의 6분의 1에 달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엄청난 위용을 보여줌과 동시에 경제적 부진으로 쩔쩔매며 붕괴하고 말았다.

지정학의 창시자 핼퍼드 매킨더(Halford Mackinder, 1861년 ~ 1947년)

지정학의 창시자 핼퍼드 매킨더(Halford Mackinder, 1861년 ~ 1947년)

왜냐면, 실질적인 부가 오가는 곳은 유라시아를 둘러싼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의 해안지대, 즉 ‘주변지대(rimland)’였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또 다른 지정학자인 니콜라스 스파이크먼은 매킨더에 반발하여 주변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곳은 대략 스칸디나비아, 독일을 거쳐 터키와 인도를 지나 중국의 연안지대까지 이어지는 ‘내주 지역(inner rim)’과 영국에서 필리핀, 대만, 일본, 아메리카 대륙과 같이 유라시아 바깥에 위치한 ‘외주 지역(outer rim)’으로 구분된다.

출처: tackk.com https://tackk.com/uzdv8w

출처: tackk.com

외주지역과 내주지역은 세계의 해양무역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경제적 진보와 발전을 일구어냈고, 근대적인 의미에서 이런 전략을 처음으로 실행한 국가들은 유라시아 서쪽 끝의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영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미국은 외주지역과 바다를 통제하며 내주지역과의 무역을 통해 헤게모니를 이어갔고 심장부를 차지한 러시아 제국, 그 뒤를 이은 소비에트 연방을 압박하여 소련의 진출 혹은 방어 의지를 저지하거나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한편 심장부와 외주지역 사이에 위치한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대체로 이들 지역은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국주의의 물결을 맞이해야만 했다. 특히 유라시아 연안 지대의 국가들은 외주지역 세력의 접근성 높은 해군력에 직접 노출되어야 했고, 이 때 외주지역의 제국주의 열강과 맞닥뜨리게 된 경험이 이후 역사적인 경로를 만들어내는 데 상당 부분 일조했다.

일본은 철저한 서구화(물론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전근대지만)를 통해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인도는 영국에 의해 일찍부터 식민화를 당한 경험 때문에 독립 후에는 나라의 문을 철저하게 걸어 잠갔다. 유라시아 연안 지대의 국가들은 대체로 이 두 극단 사이의 스펙트럼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스펙트럼의 가운데에서 비슷한 경로를 보여준 두 국가 바로 중국과 이란이었다. 두 국가는 규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중국: 인구 13억, 면적 960만 제곱킬로미터, 이란: 인구 8천만, 면적 160만 제곱킬로미터) 심장부와 이어지는 광대한 대륙국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일찍부터 문명의 중심지를 자임했고 심장부에 맞닿아 있기에 유목세계와의 처절한 투쟁을 겪어야만 했으며 19세기는 러시아와 영국 사이의 세력갈등의 주요 무대이기도 했다.

이란

나는 이런 바로 지정학적인 유사성과 국내 정치적 조건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중국과 이란이 걷게 된 경로에서도 비슷한 점들이 생겨났다고 추측한다. 한 나라는 동양의 무신론 공산주의 국가이고 한 나라는 서양(혹은 이슬람 세계)의 신정 공화국이지만, 어떤 면에서 두 나라 모두 당과 정부 혹은 최고지도자와 대통령이라는 이원화된 권력구조를 가진 나라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음엔 지정학이라는 열쇠를 통해 본격적으로 두 나라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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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임명묵
초대필자

전문성이 부족한 학부생입니다. 세계를 설명하는 많은 지식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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