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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탈출기

5년 전에 빚이 3억 원이 넘었던 적이 있다.

조그만 디자인회사나 하면서 무슨 빚을 그리 많이 지느냐고 안 믿는 사람도 있지만, 빚은 눈덩이 같아서 상환 계획이 정확히 없으면 순식간에 불어난다. 게다가 인간의 마음은 유약해서 빚이 생기면 빚으로 갚는 우를 범한다. 그게 반복되면 짧은 기간 신용은 추락하고 빚은 두세 배가 늘어난다.

노숙부터 행사장 ‘삐끼’와 대리운전까지 안 해본 것 없이 다 하면서 은행권과 비은행권, 하청회사의 대출 자금과 빚을 갚아 나갔고, 마지막 남은 게 직원들의 밀린 월급이었다. 생각해보면 가장 큰 실수였다. 믿고 기다리며 버텨준 후배들을 힘들게 만들었으니 난 사업할 자격 없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매일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압류가 들어오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건 기다려 달라는 말뿐이었다. 각서를 쓰고 꼭 갚겠다는 약속과 함께…

돈으로 엮인 관계는 항상 돈으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한때 좋은 형, 멋진 선배, 믿을만한 후배, 복지 좋은 회사의 괜찮은 사장이었던 나는 어느 날 나쁜 형, 실패한 선배, 싸가지없는 후배, 직원들 돈 안 주는 악덕 사장이 되어있었고, 그 일로 인해 바닥에 소문이 이상하게 퍼져서 순식간에 바보가 되어 있었다. 동문들은 등을 돌렸고 하이에나 같은 동료들은 내게 남은 일까지 빼앗아갔다.

지리멸렬, 지옥 같은

그리고 시작된 게 지옥 같은 지리멸렬함이었다. 갚아도 갚아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빚의 구렁텅이는 언제나 마음의 한 귀퉁이를 아프게 붙잡았고 벌어도 벌어도 내 것이 남지 않는 모래성 같은 허무함은 일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로 비교적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은 지옥에 가면 돌탑을 쌓는다고 했다. 그렇게 손이 부르트게 탑을 높이 쌓고 나면 야차들이 그 돌탑을 부수고 다시 쌓으라고 하고 또 부수는 걸 반복한다고 한다.

매일 무너져서 다시 쌓아야 하는 돌탑 같이 지리멸렬한 일상이었다.

매일 무너져서 다시 쌓아야 하는 돌탑 같이 지리멸렬한 일상이었다.

내 일상이 그랬다. 아픈 몸 일으켜 죽어라고 일해서 돈 벌면 빚 갚는데 나가고, 그렇게 갚아도 독촉과 압류와 내용증명이 끊임없이 괴롭히는 나날이었다. 올여름 그 감정이 폭발해 자살까지 생각했으니 지난 5년, 티를 안낼 뿐 지독하게 암울했다.

하지만 힘들 때마다 되뇐 말이 ‘여기서 포기하지 말자’였다. 그렇게 포기하면 내 인생이 너무 불쌍했고 생을 포기하기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나날이 부정하는 것 같아 분했다. 아무것도 없이 자존심만 남은 상황에서 그 자존심이 나를 옥죄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앞에 있던 인생 따위 잊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마음먹으니 어느 순간 담담해졌다. 자존심을 버렸더니 자존감이 돌아왔고 인생을 리셋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감사했다.

글과 공부  

3억이 넘던 빚은 이제 500이 안되게 남았다. 그중 은행권 대출은 모두 갚아서 9등급이었던 신용이 이제 5등급이 되었다. 0원 또는 20만 원이었던 카드 한도는 200만 원으로 상향조정되었다. 더는 빚 독촉 전화와 은행권 거래정지 메시지는 오지 않는다.

삼각김밥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어 밀가루를 퍼먹으며 살았던 내가 이제는 맘 편하게 1만 원이 넘는 초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커피가 너무 먹고 싶어서 미팅하러 다른 회사에 가면 몰래 봉지 커피를 훔쳐오던 내가 이제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원래 올해 안에 모두 갚으려 했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랴. 남은 돈은 내년에 무리 없이 갚기만을 바랄 뿐이다.

요즘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늦게라도 공부를 시작한 것을 무엇보다 잘했다 생각한다. 돈 적게 들이고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은 그것뿐이었으니 나름 내 입장에선 살려고 발버둥 치는 의지였던 것 같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쌓이는 지식과 그걸 통해 만나게 된 좋은 분들에게 감사하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글과 공부는 나를 본궤도에 다시 올려놓는 추진제였다.

공부 책상 시계 시간 추억 학생

담담하게 단단하게 

그렇게 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 3년, 빠져나오는 데 2년이 걸렸다. 지금 힘들어하는 분, 그리고 빚 때문에 허덕이는 분, 어설픈 소문에 왕따가 되어 힘들어하셨던 분, 몸이 아파 삶이 힘든 분들은 비록 비루하지만 날 보고 희망을 얻었으면 한다. 내가 나를 찾으면 결국 모두가 타인일 뿐이다. 매일 다시 태어날 준비만 되어 있으면 바로 어제도 먼 과거가 된다. 고통과 좌절을 덤덤히 받아들이면 담담한 하루를 보낼 수 있고, 그 매일이 반복되면 사람은 단단해진다.

포기하지 않으면 인생은 계속된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작은 것에서 행복을 얻으려 하면 인생은 하루하루 기쁨으로 가득 찬다. 한해를 이렇게 넋두리로 마무리하는 게 작년 오늘의 계획이었다. 내년엔 꽃길이 아니어도 좋으니 진흙탕만 걷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진흙탕이면 어떠하랴, 이제 거기에서 벗어나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진흙탕 끝엔 무지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제 믿는다.

여러분도 내년엔 올해보다 행복하시기를. 그리고 언젠가 우리 만나게 되면 서로 힘든 일 털고 웃으며 마주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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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광혁(Jake Kim)
초대필자. 디자이너. 평론가

디자이너이자 평론가, 문화재청 산하의 국립무형문화원에서 디자인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권 이상의 단행본 및 책자의 편집 디자인 작업을 했고,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울시청, 해양박물관 등의 국가기관 및 삼성전자, 아모레퍼시픽, 미래에셋, 대한적십자, 한국은행, 서울대학교, 한국마사회 등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습니다. 타이포그래피 역사를 다룬 '글자를 위한 글(아레나옴므매거진)'을 연재했고 만화 규장각을 통해 서브컬처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페이스북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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