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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미디어를 회고한다

슬로우뉴스는 NCSOFT와 함께 디지털 기술이 우리 사회에 초래한 변화를 점검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미래 읽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청년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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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누구나 운명 같던 순간이 있다. 네오가 모피어스의 빨간약을 먹은 이후 세상을 깨달았듯이 난 2014년 여름 이후 참 많이 달라졌다. ‘그놈’을 알게 된 이후, 내 세상은 내 세상이 아니었다. ‘그놈’이 누구냐고? 바로 ‘청년 미디어’다.

The Matrix (1999)

The Matrix (1999)

“청년 미디어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이들이 “멋있어요.”라고 답한다. 알고 있다. ‘청년 미디어’라는 단어는 진심으로 멋있다. ‘청년 미디어’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단어의 조합이다. 인생에서 가장 푸르른 시기라는 청년에다가 요즘 시대의 화두인 미디어라니. 손오공과 슈퍼맨, 아이언맨과 배트맨이 힘을 합쳐야 이 단어의 광채에 빗댈 수 있지 않으려나 싶다.

빨간약을 먹다 

하지만 시작은, 그러니까 내가 ‘청년 미디어’라 불리는 매체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그리 멋있지도 않았고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첫 키스의 날카로운 추억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미스핏츠]를 잊지 못한다. [미스핏츠]는 2014년 8월에 창간된 매체로 ‘핏(fit)하지 않은 목소리’를 기조로 내세운 청년 미디어인 동시에 내가 처음으로 몸을 담게 된 매체다.

미스핏츠

2014년은 많은 단어로 기억된다. 2014년은 ‘푸른 말의 해’라고 힘차게 시작됐지만 4월 이후 우울하고 슬픈 해로 끝나고 말았다. 청해진해운이 보유한 세월호라는 선박이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중 진도군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 사건은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점을 끄집어냈다. 구출되어야 할 사람들은 수면 아래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가장 충격적인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의 연속이었다. 학생들을 책임지지 않은 채 안위만 챙긴 선장과 승무원 그리고 문제 해결 주관 단체의 해체로 문제를 해결한 정부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가장 실망한 부분은 언론이었다. 모든 언론사가 기본인 팩트 체킹과 크로스 체킹을 하지도 않은 채 ‘전원 구출’을 받아적었다. 피해자의 가족과 전 국민을 비통과 충격에 빠뜨린 주범 중 하나였다.

세월호 오보 전원구조

어떠한 언론사라도 들어가고 싶던 흔한 언론사 지망생 중 하나였던 나는 곧 어디라도 가고 싶은 데가 없는, 열정을 잃어버린 언론사 지망생이 됐다. 그러던 와중 내게 빨간 약이 배달됐다. 대학 학보사 편집장 출신인 고등학교 후배가 내게 “매체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시민기자로서 가끔 글만 쓰던, 교내 교지에서 분기별로 글을 쓰던, 소위 ‘기레기 사태’에 언시생으로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던 내겐 최고의 제안이었다.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 사회에 대한 실망을 건설적인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가장 최선, 최고의 방안이었다. 그렇게 그 친구와 나 그리고 그 후배의 친구 셋이서 처음으로 [미스핏츠]를 만들었다.

‘청년 미디어’를 자청하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유행하는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청년’이다. ‘청년 담론’은 시대적 필요성인 동시에 점점 파편화되고 있는 20대의 지지를 받기 위한 정치인들의 몸부림이자 인구절벽과 세대갈등을 고려한 정부기관의 몸부림이다. 우린 쉽사리 불려 나갔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쉽사리 쓰였으며 사회에서 우리는 그렇게 쓰다가 버려졌다. 정치인들은 앞에선 청년을 이야기하지만, 뒤에선 지역유권자를 가장 두려워한다. 청년을 이야기하는 정치인도 지역구에 돌아가면 청년을 무시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청년이 아니라 청년의 부모님들이다.

[미스핏츠]는 발칙하게도 ‘청년 미디어’를 자칭했다. 정치권이, 기성 언론사들이, 기성세대가 청년을 객체로서 부른다면 우린 스스로 주체가 되어 청년의 이야기를 담으려 했다. 남들이 소비하는 청년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사는 같은 세대로서 청년의 편이 되고 싶었다. 우리가 편이 되려는 청년들을 동정적으로,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고, 다양한 사회생활을 한다. 우리는 그런 ‘우리’의 편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고 당신들은 우리의 색깔을 담지 못하니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색깔을 담겠다.”

미스핏츠 초기 컨텐츠에 쓰인 삽화

미스핏츠 초기 컨텐츠에 쓰인 삽화

단순히 가치관이 다른 것만은 아니었다. 우린 다른 사용자 경험을 주고 싶었다. 냉정하게 말해 지금이나 그때나 청년세대의 삶 속에 기성의 미디어는 들어올 수 없다. 아이폰으로 시작된 스마트폰 혁명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었다. 지면은 데스크탑 모니터, 노트북 모니터에 이어 스마트폰으로, 태블릿PC로 바뀌어야만 했다. 문자 그대로 판이 바뀌었다. 청년들은 더이상 가만히 앉아 드라마를 기다리거나, 글만을 소비하지 않았다. 청년에겐 페이스북이 386세대의 진보지와 같았고, 유튜브가 TV처럼 익숙했다.

기술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성 미디어는 여전히 자사 홈페이지에 덕지덕지 광고를 붙였다. 모바일 시대에 맞지 않는 UX·UI로 무장한 채 모바일 세대에게 접근하겠다는 기성 언론사엔 코웃음만 나왔다. 스마트폰과 셀카봉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방송 기자처럼 그럴듯한 스탠딩을 할 수 있다. 우칫(Wochit)에서 방송 클립을 다운받아 저작권 문제없이 외신을 보도할 수 있으며,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통해 연합뉴스와 YTN의 국제 섹션을 대체할 수 있다. 기술 변화가 제작 환경을 바꾸고 콘텐츠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고 창조해냈는데 가만히 있는 건 시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카드뉴스에서 영상으로 그리고 예능까지 

처음부터 “너희들과 우린 다르다”를 외쳤으니 진짜 달라야만 했다. 기존 언론사가 글에만 집중했다면 우리는 글을 넘어 사진, 사진을 넘어 영상에 집중하고자 했다. 홈페이지는 있었지만 주 무대는 페이스북이었다. 홈페이지는 있었으나 페이스북에서의 수치를 더 중요시했다.

운 좋게도 당시는 카드뉴스 콘텐츠의 초창기 시대였다. 언론사 간부가 어린 기자 몇 명에게 “그거 카드뉴스인가 뭐시기 해봐라”고 시켜서 나왔을 법한 콘텐츠가 대부분이었다. 어렸을 때는 싸이월드 셀카 보정에, 나이 들어서는 발표와 공모전 자료에 치여 포토샵에 능숙한 대학생에게 카드뉴스는 그리 어려운 놈이 아니었다. 카드뉴스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한겨레]가 직접 공유해가기도 했고, 웬만한 언론사의 글보다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맹점이 있었다.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에 의해 사진 순서가 엉키기도 했고, 많은 언론사가 대학생 인턴 제도를 통해 카드뉴스를 제작하며 금세 레드오션이 됐다.

이제는 익숙한 아니 어쩌면 식상한 '카드뉴스'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카드뉴스')

이제는 익숙한 아니 어쩌면 식상한 ‘카드뉴스’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카드뉴스’)

그다음은 영상이었다. 지면에 중심을 둔 신문사나 브라운관에 중심을 둔 방송사나 소셜 세상에서의 영상 제작엔 미숙했다. 딱 봐도 신입 기자가 제작했거나 대학생 인턴을 통해 만들었을 법한 영상이 대부분이었다. 모바일 콘텐츠와 비모바일 콘텐츠는 소비 환경 자체가 다르다. 우리는 이동 중에 뉴스를 본다. 지하철, 버스, 수업이 끝나 다른 교실로 움직이는 그 잠깐 사이에 우리는 영상을 본다.

그런 시기에 기존 비모바일 콘텐츠 제작자들이 만드는 영상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기자가 나와 스탠딩하는 영상을 페이스북으로 옮긴 수준, 남들 다 하는 이야기를 겨우겨우 쫓아가는 부장님 개그 스타일의 콘텐츠가 많았다.

우리는 좀 다르기 위해 예능을 차용했다. 지금에야 모든 콘텐츠가 예능화 되었고 뉴스 역시 예능화를 꺼리지 않지만, 그때는 언론사들이 소셜에 집중하기 전이라 나름 블루오션이었다. [지미 카멜 라이브], [The Try Guys] 등 해외에서 유명한 예능 콘텐츠를 접목했다. 이게 뉴스냐고? 앞서 말했지만 우린 ‘청년 미디어’를 지향했다. 뉴스라고 분류됨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개중엔 시사성이 있는 콘텐츠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다. 우리의 타깃에게만 중요하면 됐다.

the try guys

the try guys

섹스 판타지를 논하는 글은 누구에겐 시정잡배나 할 법한 이야기였지만,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시기를 보내는 우리에겐 대통령이 무슨 옷을 입었냐보다 백 배, 천 배는 중요한 뉴스였다.

도전 

[미스핏츠]를 하면서 가장 컸던 도전은 단언컨대 뉴스펀딩(현 ‘스토리펀딩’)이었다. 우린 스토리펀딩을 통해 청년주거의 현실을 취재했다. 지금 취준생인, 대학생인, 고등학생인 청년들이 취업해서 독립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고민했다. 사회에서 청년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사회의 재생산이다. 그런데 사회의 재생산 이전에, 청년 삶이 재생산되지 않고 있다면?

우리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었다. 주거비용이 너무 비싼 나머지, 사람답게 살 수 없고, 산다고 해도 온전히 나의 재생산에 투자할 수 없는 현실에 욕이 나왔다. 나의 재생산은 청년의 재생산이요, 청년의 재생산은 사회의 재생산인데 주거라는 블랙홀 때문에 재생산이 안 됐다. 더군다나 주거는 세대갈등의 핵심축이었다. 우리가 만난 많은 청년은 부동산이 싹 다 망했으면, 심지어 집으로 재테크를 하고자 한 많은 기성세대를 욕했고 심지어 ‘죽이고 싶다’고 했다.

대안이 뚜렷한 문제는 아니었다. 비례대표보다 지역구 의원이 많은 우리나라의 구조상 정치권에 중요한 건 우리가 아니었다. 그들에겐 집에 정착한 기성세대가 집 없이 떠돌고 부유하는 청년세대보다 훨씬 중요했다. 홍콩과 일본 그리고 대만 등을 취재한 우리의 리포트는 추후 [청년, 난민 되다]로 출간됐다.

청년, 난민 되다

팀원들 대부분이 언론사를 한 번쯤은 꿈꿔봤던 사람들인 만큼 조직 구조 역시 기성 언론사와 다르게끔 했다. 디자이너, 개발자, 기획자가 한 팀이 되어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도 있고, 디자이너가 주도적으로 콘텐츠를 제작한 적도 많았다. 모든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시대에 글밖에 모르는 기획자가 모든 걸 진두지휘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됐다.

한계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모든 게 성공적이었겠는가. [미스핏츠]는 지금 와서 보면 성공적이고 혁신적이었던 동시에 아쉬움도 적나라했다. 나름 주목받는 매체였기 때문에 많은 분에게 따끔하고 매서운 충고를 들었다. 개중엔 우리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한 참교육도 있었다.

아쉽게도 우리 대부분은 수도권에 거주한, 수도권 상위 대학을 다니는 소위 엘리트층이었다. ‘SKY’라 불리는 대학을 다니며 대기업 정규직에 다닐 확률이 좀 더 높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본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와 별개로 사실은 사실이었다. 학력이 이야기의 소재를 가두진 않았다.

기고도 받았고 내부적으로, 의도적으로 기득권에 멀리 있는 청년에게 초점을 두려 했다. 그래도, 한계는 한계였다. 무엇이 한계였느냐고 물으면 뚜렷하게 어떤 점이 한계였다고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핏하지 않은 목소리’가 기조인 매체의 구성원 대부분이 ‘핏’해지기 쉬운 조건에 있는 사람이라면 좀 모순 아닌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SKY

또 하나의 근본적인 한계는 우리가 청년 미디어를 자청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글을 보는 독자에게 묻는다. 청년은 무엇일까?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청년의 뜻은 다양하다. 누구는 이렇게 보고, 누구는 저렇게 본다. 나는 이렇게 보는데, 슬로우뉴스 편집장은 다르게 본다. 나는 저렇게 보는데, 조선일보 국장은 다르게 본다. 사전적 정의마저 불분명한 개념이다. 이 시대를 떠도는 망령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다루니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좀 더 공격적으로 묻겠다. 정유라와 나는 분명 같은 인구통계학적 특성을 갖지만,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서울대 청년과 중졸 청년의 이해관계는 같은가? 금수저 청년과 흙수저 청년을 같이 청년이라 묶어도 될까? 반값등록금 운동이 반 토막 난 이유는 하나다. 좋은 기업에 다니는 부모를 둔 청년은 등록금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부모의 회사에서 내주거나, 부모가 내주기 때문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금수저, 금수저 청년과 흙수저 청년은 같은 청년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금수저, 금수저 청년과 흙수저 청년은 같은 청년인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힘을 가진, 힘을 가질 확률이 높은 청년들이 운동에서 빠지는 모양새다. 청년주거 문제도 그렇다. 하우스푸어인 부모를 둔 청년과 집이 두 채인 부모를 둔 청년과 자취하는 청년의 이해관계는 같을 수 없다. 당장 나만 해도, 대구에서 올라와 6년째 자취 중인 친구에 비해 주거 문제가 더 크게 와 닿지 않는다.

모호한 청년을 우리의 가치관의 중심에 두니, 그만큼 조직의 정체성이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타깃이 흐릿하니 문제의식이 흐릿하며 문제의식이 흐릿하니 말초적인 자극 및 통계에 집중하게 된다. 디지털을 넘어 모바일에 초점을 둔 청년 미디어지만 정작 하는 짓은 기존 미디어의 단점과 닮아 있었다.

세대가 아니라 맥락, 다가올 새로운 시대 

청년 미디어에 대한 회고는 결국 청년 미디어를 부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청년 미디어라는 수식어는 없어져야 한다. 나쁘게 보면 세대를 구분하는 행위는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하다. 특히나 한국처럼 시대의 맥락이 바뀌고 있는 시기에 세대에만 집중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왜 시대의 맥락이 바뀌고 있냐고? 미디어를 논하는 글에서 사회상을 그리는 게 어렵지만, 짧게 요약하면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라 불리는 60년대생들이 성장해온, 쌓아온 물적 토대가 깡그리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는 절벽이니 대학구조조정은 필연적이고, 고성장은 돌아오지 않고, 태반이 비정규직이고, 성장보다 복지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등 부모와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그간 청년 미디어는 이런 시대 변화를 앞둔 청년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논했다. 하지만 진짜로 청년들을 위한, 최소 51%의 청년을 포섭할 수 있는 미디어가 되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세대를 버려야 한다. 세대에만 온갖 집중을 쏟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대상을 그려야 한다.

넥스트 다음 미래 내일

다양한 매체에서 청년 미디어를 쓰는 맥락은 다양하다. 문자 그대로 젊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매체를 뜻하기도 하며, 주제가 청년이라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함의는 무언가 새로운 미디어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년 미디어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말해야 한다. 지금 시대가 어떠하고 바뀌어야 하는 문제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논해야 한다. 그 시대의 주인공은 좋으나 싫으나 지금 시대에 청년이라 불리는 젊은 계층이기 때문이다.

[미스핏츠]에서 시작해 [청춘씨:발아][필리즘]을 거쳐 지금 [ALT]까지 왔다. 청년 미디어 활동을 유발한 문제의식은 청년세대에만 초점을 맞추다 이젠 새로운 시대까지 이어졌다.

알트 청춘씨 필리즘 청춘씨발아

미디어 활동을 하던 초창기에 나는 ‘왜 청년 미디어를 했느냐’는 질문에 기존 미디어에 문제점을 느껴서라고 답했다. 지금의 나는 같은 질문에 ‘새로운 시대를 논해보고 싶어서’라고 답하겠다. 지금까지의 내가 행해온 미디어 활동은 이런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점에서 나는 진짜 청년 미디어로서 활동했다기보다 그저 젊은 애가 비기성 조직에서 미디어 활동을 했다고 나 자신을 정의하겠다.

청년 미디어는 기성 매체와 남달라서 주목받았다. 돈도 없는 젊은 애들이 직접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고 다른 이야기를 재미있게 운영해서. 앞으로 청년 미디어는 더욱 주목받아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젊은 애가 해서 주목받아선 안 된다. 이 사람들이 살아갈 새로운 시대를 이야기해서, 청년이 살아갈 새로운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주목받아야 한다.

기존 미디어가 이해관계로 인해서 말하지 못하는 새로운 시대의 그림을 좀 더 자유롭게 그려야 한다. 단순히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새 시대에선 어떤 대안이 필요한지 얘기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논해야 한다. 기성세대가, 기성 미디어가 그려놓은 관행을 뛰어넘는 미디어, 관행을 뛰어넘어 직접 플레이어가 되는 미디어, 그 주인공을 젊은 세대로 상정해 판을 그리는 미디어가 진짜 청년 미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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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구현모
초대 필자. ALT 편집장

인생만사 새옹지마. 이것저것 하다보니깐 여기까지 오게 됨. 훌륭한 판단의 표본. → 인터뷰(2015. 4)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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