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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건물 안에서 경찰과 대치한 그 상황에서 이화여대 학생들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이하 ‘다만세’)를 부른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겠지 싶다. ‘왜 하필 저 노래냐’ 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내가 몰라도 ‘다만세’는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 것이고 타인의 삶과 인생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함부로 재단하는 일은 쉽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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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책을 고민하는 입장이라면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정책 대상이 되는 시민의 구체적인 삶과 그 서사를 살펴보고 고민해야 한다. 대개,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삶의 서사는커녕 요즘 같아서는 ‘내가 여기에 있다’고 인정받기도 어려운 세상 아닌가. 만약에 정책의 대상인 구체적인 누군가의 삶을 모른다면 ‘지금 있는 제도’를 살펴보고 지금 있는 제도에서 배제되는 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해보자.

‘지금 있는 제도’는 당신과 아무 상관 없다 

일단, 기초생활 보장제도가 있다. 극단적인 빈곤을 해소해보자는 제도이다. 일정 연령 이상이라면 기초연금의 대상자가 된다. 보육은 생략하자. 아기 낳을 돈 없다. 직장이 있다면 4대 보험을 내는데 이 돈은 먼 훗날 국민연금으로, 직장을 잃은 후 실업 급여로 돌아올 수도 있다. 정부가, 혹은 민간기업이 일자리 자체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정부가 사용자에게 일정한 인건비를 지원하기도 하고 미취업상태의 어떤 이에게 정부가 직업교육을 제공하기도 한다. 지금 있는 제도 모두는 아니지만, 대략이 그러하다.

눈썰미가 있는 독자라면 벌써 눈치챘을 수도 있다. 개별 제도의 지급 수준과 지급 기준 등은 차치하자. 극단적인 빈곤에 직면해 있거나 멀쩡한 직장에 다니거나 둘 중 하나인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지금 있는 제도와 무관한 사람이다.

  • 당신이 학생도 직장인도 아니라면?
  • 취업은 해야겠지만, 취업준비생 신분도 유지하기 어렵다면?
  • 그렇다고 기초생활 보장제도에서 말하는 (절대적) 빈곤은 아닌 상태라면?

지금 있는 제도는 당신과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청년 절망 사람 남자

‘청년수당’이라고 불리는 서울시의 ‘청년활동지원사업’(이하 ‘청년수당‘)은 그 틈을 메우는 정책이다.

  • 학생도 직장인도 아니지만, 취업은 해야 하는 청년들.
  • 여러 상황으로 인해 취업준비생 신분도 유지하기 어려운 청년들.
  • 그렇다고 기초생활 보장제도에서 말하는 빈곤 상태는 아닌 청년들.
  • 노동시장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 어딘가에 아직 정착하지 못한 그 누군가.

그러니 당신일 수도 당신의 친구일 수도 당신의 선후배나 자녀일수도 있는 ‘힘들게 버텨내고 있는 청년’에게 일정한 ‘현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수당’이라고 하니까 무조건 지급하는 것 같지만, 수급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저소득을 증명해야 하고, 나이에도 제한이 있다. 현금 지급 말고도 청년세대의 어떤 활동을 위한 공간 지원이나 정보 제공과 같은 비금전적인 지원도 포함한다.

‘웃픈’ 스토리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쫓아가자.’

거창한 ‘썰’이 아니다. 사실, 지금 당장 지금 있는 제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들을 위한 제도가 시급한 현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청년수당은 ‘지금 있는 제도’가 배제하고 있는 특정 집단에 대한 정책적인 보완에 불과하다. 빈곤이나 실업에 직면해 있지만, 기초생활 보장제도도, 기초연금도, 실업급여 대상도 아닌 이들을 위한 보상이다. 취업 성공 패키지나 EITC[footnote]EITC: 근로소득장려세제, 저소득 근로자 가구에 근로 장려금을 세금 환급 형태로 지급하는 제도.[/footnote]와 같이 취업이 목적이고 일자리와 연동되어 있는 제도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이들(왜냐하면, 일자리가 없으니까!)을 위한 제도이다.

물론, 제도적 보완은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아니고 지금 있는 제도의 개선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실업 급여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방식도 청년세대의 재취업, 실업으로 인한 생계곤란의 해소에 일정한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노동소득에 바탕한 제도, 즉 내가 벌이가 있어서 낸 만큼 받는 제도로는 청년에게 무엇을 적절한 수준으로 보장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청년은 대개, 직장이 없거나 직장에 다닌 기간이 짧으니 지금 있는 제도를 위해 낸 돈도 많지 않고, 따라서 받을 돈도 많지 않다. 모든 제도에는 장단점이 있고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황희 정승 같이 말할 수 있지만, 이제 노동 소득을 바탕으로 한 사회제도는 다시 고민해봐야 한다. 왜냐면 애초에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고, 노동소득과 자기 부담을 바탕으로 사회를 지탱하기에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절망 청춘 고독 희망 소망 청년 사람

누군가에게 청년수당은 ‘도덕적 해이’고, ‘포퓰리즘’이고. ‘선심성’이지만, 정책적인 차원에서 보면 청년수당은 진작에, 벌써 했었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 있는 제도는 직장이 있었다가 잃은 경우의 실업에 대한 대책이다. 직장이 있었는데 실업기간이 장기화된 경우, 애초에 노동시장에 진입한 적이 없는 실업에 대한 제도는 이름이 무엇이든 그 대상이 누구이든 우리 사회가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제도이다.

정부와 여당은 여태 이러한 종류의 제도 마련을 미뤄 온 것이고 그래서 지방자치단체가 하겠다고 하는데, 중앙정부와 여당이 이 제도를 딱히 막을 길은 없고 그렇다면 ‘돈줄을 끊어보자!’ 하고 있다. 이것이 청년수당을 두고 최근 일 년 동안 벌어진 ‘웃픈’ 일의 대략이다.

도덕적 해이? 그럼 대기업 정책은 뭔가

청년수당 같은 ‘조건 없는 보장’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취업률이 낮고 생계의 압박이 심한 작금의 현실에서 구직활동을 강요하고 취업을 목표로 강제하면 청년은 ‘묻지마 취직’을 선택하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요새 같아서는 ‘묻지마 취직’도 쉽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강제된 선택으로 나쁜 일자리라는 함정에 빠져 저숙련·저임금노동을 전전하게 되면 그 사회적 비용은 고스란히 우리 몫으로 되돌아온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도 문제다. 구직도 다 돈이다. 예를 들어 토익이다. 응시료가 대충 4만 5천 원 정도라고 한다. 요새 시험이 바뀌어서 기존에 준비하던 사람도 다시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학원비는 없다고 치고 대충 4만 원의 토익비를 벌려면, 시급 6,030원 하는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7시간은 일해야 한다. 7시간이면, 옛날 토익기준으로 LC파트의 100문제를 풀어야 하는 45분을, 대충이라도 10번은 들을 수 있다. LC와 RC 합쳐서 모의고사를 두어번을 더 풀 수 있다. 주경야독은 그저 동화이다. 토익은 환불도 모호하다.

토익 시험 한 번 보려면 최저임금 기준으로 7시간은 일해야 한다.
토익 시험 한 번 보려면 최저임금 기준으로 7시간은 일해야 한다.

‘도덕적 해이’를 이야기하려면 일단, 도덕적 해이에 빠질 만큼 지급하고 그런 얘기를 하면 좋겠다. 한 달에 50만 원, 최대 6개월 받는다. 그것도 조건부로. 중위소득 60% 이하만 받는다. 청년수당은 부채로 경기를 떠받들고 있거나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해체한 지금의 정부 정책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경제 부양정책이 될 수도 있다. 청년과 같이 지금 당장 돈을 써야 하는 이들의 소득이 늘어나면 그 돈을 쓸 수밖에 없다.

돈 실업
박근혜 정부의 대기업 정책이야말로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출처: Truthout.org, CC NC SA)

청와대든, 여당이든, 보건복지부든, 고용노동부든 있지도 않은 일자리를 말하면서 실업대책인 양 호도하거나 일자리는커녕 아무 소득도 없는 이들한테 도덕적 해이를 말하면서 자기 부담을 요구한다. 논리도 없고, 실질과도 멀며, 경우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는다.

중앙정부와 비교하면 시민과의 접촉면이 월등히 넓은 지방자치단체가 시민의 삶을 어느 부분을 채워주는 어떤 정책을 가져왔다. 심지어 누군가 꼭 해야 했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중앙정부는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을 수용하고 더 큰 정책의 틀 안에서 일자리를 만들어 내놓아야 한다. 그렇게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이 순간의 느낌을 함께 하’면 좋은데, ‘전해주고 싶’은 정책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게 생겼다.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을 보고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은 이제 그만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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