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지난주 월요일(2016년 7월 25일),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 마지막 연사로 버니 샌더스가 등장했을 때 청중들은 일제히 파란색 종이를 들어 환호했다. “Bernie”라고 적혀 있었고, 버니를 상징하게 된 작은 새 모양이 “i”의 점 위치에 그려진 종이였다. 나는 그걸 보면서 ‘역시 샌더스 지지자들은 살아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raymondclarkeimages, "Bernie", CC BY NC https://flic.kr/p/KzhUNC
raymondclarkeimages, “Bernie”, CC BY NC

그런데 그 연설이 끝나고 현장에 있던 CNN 간판 앵커인 앤더슨 쿠퍼가 요약과 평을 하는 순서에서 흥미로운 말을 했다:

“저 ‘버니’라고 적힌 종이는 샌더스 지지자들이 만들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제가 행사장에서 봤는데 주최 측(민주당 전국위원회: DNC)에서 만들어서 나눠주더라고요.”

쿠퍼는, 무소속이었다가 민주당에 들어와서 격변을 일으키고, 민주당에서 내부적으로 저지하는 과정에서 슐츠 위원장이 낙마하는 등 내홍을 겪게 한, 샌더스 후보의 마지막 연설에 주최 측이 ‘버니’ 푯말을 만들어서 청중으로 하여금 샌더스를 응원하게 한 제스처는 신사적이고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치밀하게 준비된 민주당 전당대회

하지만 얘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화요일의 스타 연사는 빌 클린턴이었다. 그 날 빌 클린턴은 아내 힐러리를 “변화를 만드는 사람(“Change maker”)”이라고 추켜세웠고, 그의 연설 전체가 바로 그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구성되었다. 흥미로운 건, 빌 클린턴이 등장하는 순간 청중들은 “Change Maker”라는 푯말을 이미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출처: PBS ‘NEWS HOUR’ https://www.youtube.com/watch?v=8RchVnIn_-Y
출처: PBS ‘NEWS HOUR’

수요일의 마지막 연사인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이 끝난 후 CNN의 또 다른 인기 앵커인 존 킹은 이런 말을 했다:

“오바마의 연설은 이번 대회의 다른 연설들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함께 조율된(coordinated)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등장한 연사들은 각자 자신이 준비한 연설을 했지만 누군가가 총지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는 잘 준비되고 조직된 티가 났다.

예를 들어 연사가 특정 인물(가령, 참전용사)을 내용 중에 언급하면 중계 카메라는 청중 중에서 그 사람을 클로즈업 해서 보여준다. 이런 방식은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세심한 준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1. 첫째, 연설문이 미리 제작돼 중계진에 전달되어야 하고,
  2. 둘째, 연설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의 참석은 물론, 위치까지 확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 하나는 등장인물을 찾아 고정해서 기다리다가 연사가 언급하는 순간 제어실에서 그 카메라를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힐러리 스타일

그만한 대형행사에서 그렇게 세심한 준비를 하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일주일 먼저 있었던 공화당 전당대회를 보면 안다. 다른 연사들은 고사하고, 후보지명을 받은 트럼프의 연설 때도 준비 없이 산만해 보였다. 통일된 푯말 준비는커녕, 연설문이 미리 전달된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흔히 미국에서 두 당의 전당대회를 이야기할 때는 그 반대로 묘사한다. 즉, 공화당은 일찌감치 후보가 결정되고 그 후보를 중심으로 완벽한 대본이 짜인 전당대회가 열려 축제 분위기를 만드는 반면, 민주당은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경선을 하고 막판에 후보가 결정되는 바람에 깔끔한 전당대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두 당의 모습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우리는 공화당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정답: ‘트럼프’ 때문). 하지만 민주당 경선이 예전보다 더 깔끔했다고 볼 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예전과 달리 일사불란한 모습을 하는 이유는 뭘까?

Sarah Burris, President Barack Obama and Hillary Clinton Hug, CC BY https://flic.kr/p/KznNqX
마치 하나의 드라마나 쇼처럼 잘 연출된 민주당 전당대회 (출처: Sarah Burris, “President Barack Obama and Hillary Clinton Hug”, CC BY)

공화당이 혼란스러운 이유가 트럼프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민주당이 일사불란한 이유가 힐러리 때문이라고 본다. 오바마가 이번 지지연설에서 “힐러리만큼 준비된 후보는 없었다”고 한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힐러리가 대통령이 될 자격을 갖췄다’는 것이 그 하나고,
  2. 힐러리가 조직과 자금, 대의원, 심지어 로고까지 거의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게 다른 하나다.

그게 힐러리이고, 힐러리의 스타일이다.

힐러리의 걱정

“힐러리는 항상 우리 가족의 걱정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She is our family’s designated worrier.”

전당대회 둘째 날 빌 클린턴이 지지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빌 클린턴이 8년의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에서 나올 때 클린턴 부부의 은행 잔고는 텅 비어있었다. 클린턴 임기 말에 터진 르윈스키 스캔들을 막아내기 위해 최고의 로펌을 동원했고, 거기에 가진 돈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돈 추심 채권추심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만 느긋한 성격의 빌은 ‘뭐 어떻게 되겠지’하는 태도였지만,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힐러리는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다그쳤다고 한다. 당장 살 집부터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한 기사에 따르면, 클린턴 부부가 뉴욕 주에 집을 사는 것도, 비록 바로 갚기는 했지만, 부자 후원자의 도움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빌린 돈을 갚는 것도 월스트리트를 비롯해 미국의 기업들이 클린턴 부부의 연설비로 엄청난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샌더스가 경선 내내 힐러리를 공격한 돈 문제의 근본은 거기에 있다. 남편이 일으킨 사고 때문에 잔고가 바닥났고, 그걸 메워서 살림살이를 유지하고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나아가 두 번의 대선 출마까지 이뤄내는 동안, 미국 정치인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힐러리 주위에는 지갑을 열고 기다리는 부자와 기업들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사고를 치지 않았으면 나중에 샌더스 같은 후보로부터 공격받게 될 돈을 받지 않았을까?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집안의 돈 문제이든, 선거 조직의 문제이든, 대의원 확보의 문제든 불확실한 상황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것이 힐러리의 스타일이라는 사실이다.

복병 제거하기

누구도 인생에서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라도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면 패할 수 있다. 2008년에는 그 복병이 오바마와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전국적인 현장 조직이었다.

하지만 힐러리가 다른 후보들보다 유독 잘하는 것이 있다면, 남편이 지지 연설에서 강조한 것처럼, 그런 패배를 경험하면 다시 일어나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런 힐러리가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생각했던 이번 대선 가도에서 만난 복병이 도널드 트럼프다.

Gage Skidmore, Donald Trump, CC BY SA https://flic.kr/p/9hHrit
Gage Skidmore, “Donald Trump”, CC BY SA

힐러리가 작년 여름 뉴욕의 루스벨트 섬에서 출마 선언을 할 때만 해도 주된 선거 메시지는 경제적 평등과 결혼의 자유와 같은 인권 문제였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평등이라는 메시지는 이미 샌더스가 독점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힐러리가 쓰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주제가 됐고, 트럼프가 세를 확장하는 패턴으로 볼 때 그를 공격하는 데도 효과적이지 않다.

따라서 힐러리 진영은 트럼프를 “분열을 조장하는(divisive)” 후보로 묘사하기로 결정했고, 그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메시지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함께(together)”였다.

힐러리는 마지막 날 수락연설에서 ‘함께’를 강조했지만, 사실 그 메시지는 첫날 미셸 오바마의 연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미셸이 힐러리의 책에 등장하는 “온 마을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It takes a village)”는 말을 인용한 것은 마지막 날 힐러리의 수락 연설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면서 “함께”라는 주제를 양괄식(兩括式)으로 전달하려는 치밀한 준비로 보인다.

출처: PBS 'NEWS HOUR' https://www.youtube.com/watch?v=4ZNWYqDU948
전당대회에서 힐러리 지지 연설 중인 미셸 오바마의 모습 (출처: PBS ‘NEWS HOUR’)

심지어 힐러리의 수락 연설이 끝난 후, 전당대회가 으레 그렇듯, 3색 풍선들이 쏟아져 내려올 때 나온 노래도 제시카 산체스의 신곡 ‘함께 할 때 더 강한(Stronger Together)’이였다.

  1. 아메리칸 아이돌로 스타덤에 오른 (힐러리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남미계의 가수가
  2. 힐러리 캠페인의 새로운 주제에 맞춰 작곡한 노래를 힐러리의 수락 연설 직후에 발표한 것이다.
YouTube 동영상

정치 축제가 아니라 마치 치밀하게 계획된 군사작전을 보는 기분이다. 트럼프라는 복병이 생겼으니, 그 후보의 가장 취약점을 찾아 정밀 타격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당대회 전에 공격용 메시지를 마련해야 할 뿐 아니라, 아예 전당대회 전체를 완벽하게 연출해서 선제공격의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만들어진 vs. 자발적인

좋든 나쁘든, 그렇게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힐러리 클린턴의 스타일이다. 모든 것을 힐러리 본인이 챙겼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챙기는 사람들을 참모로 두는 사람이 힐러리이고, 그런 사람들이 중용이 되는 곳이 힐러리 캠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완벽주의 스타일은 여러모로 유리하지만 분명한 단점 역시 있다. “만들어진 느낌(lack of authenticity)이 강하다는 것이다. 지난 3월, 미디엄에 어느 디자이너(Lindsay Ballant)가 기고한 ‘버니, 힐러리 그리고 진짜 간극'(Bernie, Hillary, and the Authenticity Gap)이라는 글은 정치와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글로, 힐러리가 가진 문제를 정확하게, 그리고 시각적으로 설명했다.

힐러리의 이미지 (재인용 출처: Lindsay Ballant의 미디엄) https://medium.com/@lindsayballant/bernie-hillary-and-the-authenticity-gap-a-case-study-in-campaign-branding-ef46845e11cb#.m2194fqqy
힐러리의 이미지 (재인용 출처: Lindsay Ballant의 미디엄)

즉, 힐러리의 디자인 전략은 일관성 있고, 힐러리라는 ‘후보’를 전달하는 데 효율적인 반면, 샌더스의 유세에 등장하는 디자인들은 지지자들이 직접 만들어와서 일관성이 떨어지지만, 더 열정적이고, 무엇보다 후보가 아닌 이유(cause), 즉 샌더스가 대표하는 운동과 목적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힐러리가 샌더스를 상대로 가졌던 그런 약점은 트럼프를 상대로 고스란히 치환될 여지가 충분하다. 우리는 경선을 통해 샌더스의 지지세력과 트럼프의 지지세력이 여러모로 겹치거나 닮았음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과장된 비유를 하자면, 마치 화력이 강한 미군이 게릴라전을 펼치는 베트콩을 상대로 싸우는 느낌마저 든다. 모든 여론조사가 11월의 선거에서 힐러리의 승리를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이유는, 객관적인 조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결국 베트남에서 퇴각해야 했던 미군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감동 없는 승리’ 

힐러리는 2016년 3월 토론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마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제 남편이나 오바마 대통령처럼 타고난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를 얻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힐러리는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빌과 오바마가 가졌지만,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것은 바로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거나, 진정으로 소통한다는 믿음을 주는, 타고난 재주라는 것을 잘 안다.

여기에서 우리는 힐러리가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한계를 목격한다. 미군이 수십 년 동안 만들어온 전투 방법을 게릴라전 방식으로 바꿀 수 없듯, 힐러리 역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다.

미국 대선 코커스 힐러리 트럼프

그리고 그 방법은 80년대의 선거운동 방식으로 21세기 커뮤니케이션의 최강자인 트럼프를 상대하는, 전통적이고 진부한 무기를 총동원한 화력전이다. 힐러리가 트럼프와 샌더스식의 풀뿌리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런 지지층이 형성되지 않는 거다.

하지만 어쨌거나 힐러리는 샌더스를 이기지 않았는가? 비록 감동은 없는 승리였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런 감동 없는 승리야말로 오는 11월에 힐러리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