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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 일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학년 주임이었는데, 하도 돈을 밝혀서 ‘돈 먹는 이구아나’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IMF 여파로 아버지께서 정리해고를 겪은 직후였고, 원래 부모님께서 ‘자식들 학교에는 뭐하러 찾아가느냐’는 주의인지라 이 담임의 ‘주머니’를 따로 신경 써서 챙기지 않았다.

내 고3 시절 담임 선생의 별명은 '돈 먹는 이구아나'였다.
내 고3 시절 담임 선생의 별명은 ‘돈 먹는 이구아나’였다.

‘이구아나’ 선생의 추억 

그 덕분에 나는 이구아나 선생의 주요 ‘갈굼’ 목표가 되곤 했는데, 그나마 내가 반 내에서는 유일하게 서울대에 갈 수 있는 성적의 보유자인지라 담임도 갈 데까지 가지는 못했다. 학년 주임 입장에서 자기가 담임하는 반에 서울대 하나쯤은 나와야 체면이 설 테니, 돈 안 주는 건 서울대 입시로 갈음하겠다 뭐 대충 이런 속셈이었던 것 같다.

하여간 그런 선생이다 보니 돈 갖다 바치지 않은 애들에 대한 압박이 꽤 심했는데, 언젠가는 개중 하나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늦었다. 9월 언저리였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앞에 불러세워 놓고 칠판 닦는 걸레로 머리를 툭툭 때리면서 “그따위로 해서 대학이나 가겠냐” 하면서 열심히 야단치고 있는데, 얼굴이 벌게졌던 친구놈이 갑자기 픽 쓰러지더니 교실 바닥에서 부들부들 떠는 게 아닌가. 이구아나 선생은 얼어붙었고 교실은 난리가 났다. 옆 반 선생이 들어와서 황급히 애들을 제지하고 구급차를 불렀다.

Cliff, CC BY https://flic.kr/p/5nNg9d
Cliff, CC BY

건강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원인인즉슨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일시적으로 호흡곤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것 같더라고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사건은 학교에 알려지지 않았고, 이 일을 수습했던 옆 반 담임 선생님은 다른 반 애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밖에서 축구를 너무 오래 하고 들어와서 일시적으로 일사병 증상을 일으킨 것 같다.”

당시 방송반이었던 나는 동기에게서 저 선생님이 저런 소리를 하고 다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건의 진실’을 학교 홈피에 올리다 

당시는 한국에 막 인터넷망을 보급하던 시절이었고,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학교별로 홈페이지가 생겼더랬다. 광통신망 보급이 김대중 정부 숙원 사업 중 하나였으니, 아마 학교 홈페이지 제작도 일괄적으로 지시되었을 터였다. 관리하는 사람도 딱히 없어 보였다. 나는 그곳 게시판에 당시 우리 반에서 벌어진 사건을 낱낱이 밝혀서 적어놓았다. 물론 ‘익명’으로. 내가 바보냐, 그걸 실명으로 적게.

286 AT 컴퓨터

며칠 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왜겠냐. 게시물 올린 ‘범인’ 색출하려고지. 당시 ‘이구아나’는 침묵을 지켰고, 옆 반 담임 선생이 여론을 수습하러 다녔다. 우리 반 수업을 들어와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할 말이 있으면 떳떳하게 자기 드러내놓고 하지, 그렇게 비겁하게 자기 이름 숨기고 이야기하는 건 자기도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선생님이라면 이름 밝히고 문교부 장관 비판하겠습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저도 그렇게 해보죠.’

결국, 범인 색출은 실패했다. 평소 내 문체를 익히 알고 있던 문학 선생님만은 그게 나라는 걸 진즉에 눈치챘지만, 이 양반도 어지간한 반골인지라 그 사실을 알리진 않은 듯했다.

이대 사태와 마스크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사태와 관련해 이 사업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마스크 쓴 걸 가지고 문제시하는 사람들을 보니 문득 그 시절 생각이 난다. 학생이 쓴 마스크로 정당성 운운하는 양반들, 정작 지난 프라임 사태 때 학교 측에서 학생들을 불법으로 채증했다는 학생의 이야기는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농성에 참여한 한 학생은 “프라임 사업 반대집회 때 불법 채증을 당해 이번에 학생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이화여대 사태가 보여준 ‘대학정책 10년’ 중에서

2016년 8월 1일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 중인 학생들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1053362.html
2016년 8월 1일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 중인 학생들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불법 채증은 경찰이 해도 문제지만, 공권력도 아닌 민간인이 이런 짓을 하면 사적 제재에 해당한다. 이런 것은 적당히 묵과하면서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마스크 쓰고 나선 학생들 질타하는 사람들을 보니, 아 과연 인간이란 너나 할 것 없이 ‘약강강약'[footnote]약강강약: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하다.[/footnote]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댁들이나 자기 얼굴 까고 소속된 집단이나 상사 비판 좀 해 보세요. 솔직히 자기 회사, 자기 조직에 불만 가지지 않은 사람 없잖아요.

그렇게 해본 경험도 없고, 해볼 용기도 없는 사람이 꼭 남의 마스크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그런 행동을 할 용기를 지닌 게 가상한 것이지, 자신은 안전한 모니터 뒤에 앉아서 ‘떳떳함’을 주장하는 꼴사나움이 용기는 아니다.

이화여대 본관 문에 붙은 자보.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1053362.html
이화여대 본관 문에 붙은 자보.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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