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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 와서 친구를 만났다. 여자인데 연봉 20만 달러를 넘겼다. 같은 업계 남자는 좋아하지 않으므로 남자 만날 때 돈 안 본다. 사귀는 남자가 자기 버는 것의 1/3만 벌었으면 하는데, 유일한 이유는 자기가 돈 쓸 때 불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친구가 남자와 같은 조건에서 일하고 차별받지 않고 자기보다 돈 못 버는 남자를 사귀면서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것은 이전에 미리 싸워준 페미니즘 전사들 덕분이다.

남편이 집에서 애를 봐? 뭐, 그런가 보지.

다른 여자도 안다. 연봉 40만 달러에 가깝다. 남편은 집에서 아이를 본다. 어차피 벌어도 아내의 1/10 밖에 못 번다. 이 여자가 남자와 같은 조건에서 일하고, 능력만으로 보상받고, 갓난아이를 낳고도 직장 계속 다닐 수 있으며, 남편이 집에서 애를 봐도 주위에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것 역시, 이전에 미리 싸워준 페미니즘 전사들 덕분이다.

난 영국에 올 때 내가 비자를 내고 남편은 피부양자로 왔다. 나는 학사를 끝냈었고 남편은 안 끝냈어서 그랬다. 더 어린 내가 학사가 있고 공부를 끝냈고 돈을 벌었고 그러므로 비자 주신청자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것 역시 페미니즘 덕이다.

아빠와 아기

경력에 맞는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건…

영국에 와서 서른의 나이로 면접을 다녔다. 그 누구도 나에게 ‘결혼은 했냐’, ‘애는 낳을 거냐’, ‘애 낳으면 직장 어떻게 다닐 거냐’, ‘친정어머니는 애 봐줄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난 직장에 들어가서 1년 있다가 임신했고, 아이를 가졌다. 난 잘리지 않았고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덕분에 경력을 계속 쌓을 수 있었고 아이 가진 엄마로서 EA에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것 역시 페미니즘 덕이다.

EA, 마이크로소프트 면접을 볼 때 아무도 나에게 ‘애가 있는지’, ‘애를 누가 봐주는지’, ‘다른 아이 낳을 생각은 있는지’, ‘왜 남편이 있는데 일하는지’, ‘남편이 잘 버는데 너까지 잘 받아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난 정당하게 내 경력에 맞는 연봉을 받았다. 엄마라고 해서 덜 받지 않았다.

남자 동료들도 아이를 픽업하기 위해 일찍 퇴근하기도 했고 아이가 아프면 직장생활이 바쁜 아내 대신 자기가 집에 가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지적은 없었다.

“그 정신 나간 놈은 일을 하겠다는 거야, 안 하겠다는 거야?!”

즉, 이런 남자들의 일하는 아내들뿐만이 아니라 이 남자들도 페미니즘의 덕을 봤다.

아이 때문에 일찍 퇴근하는 걸 보고 뭐라고 하는 놈들이 아직도 있다고?

운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페미니즘 덕분이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온 지 4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둘째를 낳았고 어린아이 둘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그 4년 동안 애가 아파서 재택근무를 한 적도 많았고, 내가 잠 못 자서 피곤한 적도 많았다.

그 긴 시간 동안 그 누구도 나에게 엄마의 자질을 의심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고, 엄마니까 직장일 못할 거라는 식의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독해서 버틴 게 아니고,

내가 잘나서 회사가 알아서 대우해 준 게 아니고,

내가 운 좋게 좋은 상사를 만나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사회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나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된 것은 나 이전에 남녀평등, 고용평등, 노동자 권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서 싸워줬던 사람들 덕분이다.

요즘 ‘페미니즘이 이렇다, 저렇다.’, ‘페미나찌가 어떻다.’ 하며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안다. 어떤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며 모인 사람들이 다 옳을 수는 없다. 그냥 있어 보이니까 참가하는 사람, 나한테 유리하니까 써먹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성 참정권부터 시작해서 1950~60년대부터 여성이 일할 수 있는 권리, 같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권리, 출산 휴가, 가정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 방지 등을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페미니스트 맞거든.

그래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내가 가진 것, 누린 것의 대부분은 페미니즘 덕분이다. 늘 감사하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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