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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이 “4등”이라면 여러분은 그 영화를 보고 싶으신가요? 만약 그 영화가 인권위원회 제작지원 영화라고 한다면? 취향 차이가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금·은·동 다음의 4등과 인권의 구도가 너무 명확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김연아도, 류현진도, 이세돌도 아니기에 “4등”의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성과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기 모멸감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인권영화로 보였습니다. “4등”이라는 제목도 많은 사람이 공감할만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보여서인지 큰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순위권 밖

뻔한 이야기를 첨예하게

그런데 영화 [4등]은 예상과는 달리 한때 1등이었던 수영코치와 1등이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어린 친구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1등이 되는 과정에 개입되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더 뻔하게 한국 학원 스포츠에 개입된 물리적 폭력과 성과주의, 그 폭력이 전이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재미있었고 인권 주제로서도 날카로운 지점을 누르고 있어 놀라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의 중반 이후를 주목할 것 같습니다. 맞으면서 운동을 하던 과거의 유산이 ‘성과주의’라는 이름 아래 2016년 다시 불려 나오는 과정을 그리는 것은 꽤 한국적인 아이러니이며 교훈적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 폭력이 부모의 묵인 아래 이루어지는 것은 쓰린 부분입니다.

영화 [4등] 중에서

수영코치 광수의 과거 이야기

이 영화에서 단 하나의 탁월한 부분을 꼽는다면 수영코치 광수의 과거를 그리는 초반부 이야기입니다. 이 초반부 이야기를 통해 감독은 관객들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이상한’ 자리로 초대합니다.

광수의 첫 등장은 꽤 재미있습니다. 아시안 게임을 앞둔 태릉선수촌 앞 포장마차에서 아직은 앳된 광수가 노련한 신문기자와 강소주를 대작합니다. 다음날 숙취에 절어 태릉에 도착한 기자는 광수가 한국기록을 깼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광수는 재능있고 당찬 수영 유망주였습니다. 잠깐의 휴가를 받은 그는 고향에서 태릉으로 복귀하기 직전 동네 어른들이 모인 한 가게에 인사를 갑니다. 그런데 그 어른들은 광수에게 ‘섯다’를 하자고 제안하고 광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도박을 하게 됩니다. 광수는 마치 그들과 10년은 같이 해왔던 것처럼 도박하고 그들의 돈을 쓸어갑니다.

그러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칩니다. 돈은 압수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경찰서로 가는 것을 두고 실랑이를 하지만 광수는 국가대표 유망주라서 경찰도 넘어가 줍니다.

광수는 복귀가 조금 늦었지만, 배를 타고, 버스를 타고 태릉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는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 황급히 전화를 받습니다. 그는 달리던 고속버스를 멈추고 내려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를 반기던 것은 돈을 돌려받은 그 어른들입니다.

광수는 환한 얼굴로 다시 도박을 시작합니다. 태릉에서는 그를 찾지만, 행방을 알 수가 없었고 고등학교 수영부 코치가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영화 [4등] 중에서

국가대표 수영코치는 광수가 복귀를 하자 물에 담가뒀던 대걸레로 그를 때립니다. 100대를 때리겠다고 했고, 그는 맞다가 참지 못하고 수영장을 뛰쳐나갑니다. 아시안 게임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던 광수는 기자에게 전화합니다. 자신이 구타를 당했다고 기사를 써 달라고.

처음에 그는 당돌하지만 재능있는 청년이었습니다. 도박할 때는 ‘참 대차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경찰이 들이닥쳤을 땐 선수생활을 그만둘까 봐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의 염려와 배려 속에 그런 위기를 벗어났음에도 그는 규율을 무시하고 오랫동안 선수촌에 복귀하지 않습니다. 술·담배에 절어서도 만면에 자신감이 넘쳐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태릉에 복귀하는 그를 때린다는 것은 왠지 그의 인생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맞을 만 했어”, “때려서라도 바로잡아야지”

감독은 이런 생각을 가질 때까지 아주 천천히 관객을 그 상황의 함정으로 몰아갑니다. 관객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가 맞을 만도 했다’라는 생각 근처로 가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누군가 때려서라도 그를 바로잡으려 했던 의지가 있었다면 그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때린다는 방법 자체는 분명 잘못되었고, 그럴 정도의 열렬한 의지와 선생 역할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열렬한 선생 역할도 그 시대에선 십중팔구 때리는 것으로 결론 났을 것입니다. 학교 체벌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 상황 속에 살았다면 광수를 때리거나 혹은 광수를 때리는 코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당시는 폭력이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학창시절 코치들이 성적이 뛰어났던 광수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철없는 그에게 매를 든다는 것이 왠지 교육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폭력을 전제로 사고하는 논리, ‘사랑의 매’라는 논리가 그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깊숙이 박혀있었고, 영화에서 상황이 주어지자 재빠르게 소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우리 사회가 짧은 시간 안에 급격한 퇴행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도 폭력의 공범일 수 있다는 의심

이러한 전개가 없었다면 영화는 다른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안전한 자리에서 타인을 비평하는 ‘남의 얘기’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많은 평범한 영화와 방송은 사람들을 안전한 도덕의 자리에 앉히고 휘두르게 합니다.

“그래, 저런 선생들, 엄마들 많아.”

신문과 방송의 정치 장사는 ‘정치 혐오’를 파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도덕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만 사람들을 당연한 정의의 자리에 앉혀둔다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과연 긍정적인 효과만을 주는 것일까요?

감독은 폭력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간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날카롭게 그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충분히 공범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이야기처럼 물리적 폭력이 금지된 현재까지도 다른 상황 논리를 대입한 핑계로 폭력이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은근히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은 수영대회가 끝나고 까불거리며 놀고 있는 어린이 수영선수들을 그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영화에는 무언가를 먹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심각한 주제에 관한 야이기임에도 등장인물들을 장면별로 보면 꽤 즐겁게 잘 놀고들 있어 재미있습니다. 도덕적 문제가 단순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사회가 살아 펄떡이는, 아주 다양한 개체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장면들은 이러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상황들이 간명한 도덕적 서사에 쉽게 포섭될 수 없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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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은 여러모로 균형이 잘 잡힌 훌륭한 작품입니다. 상업영화로 보더라도 예상을 벗어나는 크고 작은 반전들이 있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장면마다 드러나는 유머 감각 역시 생명력 있게 빛나고 있습니다. 수영하는 장면들에서는 물결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는 유려한 연출을 보여줍니다. [은교]나 [해피엔드] 등의 영화에서 보여주듯 상업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그려내는 감독의 역량이 빛나고 있습니다.

감독의 전작들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도덕률이나 이야기의 틀에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것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뒤집으면 불편해질 만도 한데 그것을 불편하지 않고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아마도 감독이 당연하지 않은 삶의 아이러니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이야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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