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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 같은 비를 뚫고 밴쿠버 박물관에 갔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지만 규모가 크지도 않고 그리 볼 것도 많지 않다. 하지만 나처럼 보는 것보다는 내용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빼곡하게 나열된 밴쿠버의 역사가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

안티 네온 운동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안티-네온 운동’ 관련 전시물과 자료였다. 밴쿠버 시내를 돌다 보면 간판이나 광고물이 거의 없거나 잘 정돈된 것을 볼 수 있다.

Guilhem Vellut, Downtown Vancouver, CC BY https://flic.kr/p/aaSwv1
Guilhem Vellut, “Downtown Vancouver”, CC BY (2011.8.)

유럽 분위기에 가까운데 사실 유럽의 도시들에서 이런 풍경에 익숙했던 터라 당연히 오래된 도시이니 그러려니 하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밴쿠버는 북미, 같은 대륙의 미국 도시들의 형편과 비교하면 너무나 다른 풍경이다.

아래 사진이 바로 예전 밴쿠버 시내의 모습이다.

벤쿠버

각종 간판과 광고들로 눈이 어지럽다. 지역 사회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던 밴쿠버 사람들은 밴쿠버의 아름다운 거리, 특히 자연환경이 이런 간판들로 인해 오염되고 있다는 생각에 CAC(The Community Arts Council)를 만든다.

광고물, 특히 네온사인을 규제하자는 시민운동단체인데 처음 문제 제기가 된 것이 50년대 초, 단체가 만들어진 것은 1958년 이후다. 시장에게 편지쓰기 운동, 좋은 간판 나쁜 간판 평가보고서 정기발간, 상인 의식 계몽 운동 등 수많은 활동을 펼치지만, 자본의 견고한 벽은 요지부동이었다.

5년간의 활동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와해 수순까지 밟았던 이 운동은 1964년 민권운동의 흐름과 함께 다시 부활하여 입법청원운동으로 발전, 드디어 법안을 만든다. 하지만 이번엔 ‘간판 제작자 연합회’가 결성되어 저지, 또 한 번 좌절을 겪는다.

밴쿠버

1968년 불사조처럼 부활한 안티 네온 운동은 ‘네온의 악몽에서 깨어나자!’는 슬로건 하에 당시 미 서부해안을 중심으로 퍼지던 히피 운동 공동체의 지원과 함께 법안 상정에까지 이르지만, 또 환경영향평가 및 경제 악영향 등등의 이유로 입법이 지연됐다.

1974년 드디어 네온사인 광고를 포괄적으로 제한하는 법이 통과되지만, 기존 상인들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네온사인 신규제작만 제한하고 기존 네온사인의 사용권은 그대로 인정됐다. 기존 네온사인이 수명을 다하고 하나씩 철거되어 나간 1980년대 말에 와서야 비로소 서서히 거리가 제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일단 입법례가 만들어지고 그 결과 거리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것을 목격하자 광역 밴쿠버, 즉 밴쿠버 인근의 버나비, 코퀴틀람, 써리와 랭리 등의 지역에서도 주민들이 차례로 같은 입법을 해줄 것을 정치인과 행정기관들에 요구하게 되어 네온사인 금지는 금세 밴쿠버 전역에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올바름은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쉽게 얻어진 권리는 쉽게 퇴색되는 것, 반대로 저렇게 단단한 돌을 하나씩 깔아 만들어진 길은 쉬이 닳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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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참정권 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women’s suffrage)의 지난한 역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인내와 의지의 행군이었다. 밴쿠버 박물관의 한쪽 벽면에는 진홍색 비로드 천이 드리워진 곳이 있다. 그 고운 천을 들쳐 올리면 이 담쟁이 잎이 오롯이 담긴 액자가 나타난다.

밴쿠버 여성들은 참정권을 주장하며 흔한 피켓이나 배지 대신 희망의 담쟁이잎, 진짜 살아있는 담쟁이 잎에 ‘여성에게도 투표권을'(Votes for Women)이라는 문구를 금박으로 새겨 모자에, 가슴에 달고 다녔다.

캐나다 여성 참정권

백 년이 넘는 노력 끝에 1917년 밴쿠버 여성들의 참정권이 인정되던 날 플로렌스 로스(Florence Roth) 부인은 비로소 늘 달고 다니던 이 담쟁이 잎을 조심스레 떼어 보관했고, 다시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잎을 보관하기 위해 박물관 측에서는 빛이 들지 않도록 비로드 천을 드리워 둔 것.

늘 시작이 어려울 뿐이다. 밴쿠버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인정된 바로 이듬해 1918년 캐나다 전역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는 법이 통과되었다. 너무 성급하게 기대하지도 말고, 너무 쉽게 좌절하지도 말아야 한다.

올바름은 그렇게 느리게 얻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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