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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에세이: "댁에 혹시 법률적인 문제 없습니까?"

조우성 법률 에세이

살다 보면 여러 부탁을 받게 된다. 손쉽게 들어줄 수 있는 부탁도 있고 난처한 부탁도 있다. 사실 부탁받는 난처함보다 부탁하는 난처함이 더 큰 법인데, 상대방 입장을 잘 이해해주지 못하고 부탁받은 일에 짜증을 내기도 한다. 부탁을 받았을 때의 ‘남다른 대응’이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변호사님. 중학교 동창이라는데요?” 비서가 전화를 바꿔준다.

중학교 동창에게 걸려온 전화 

“조우성? 나……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영춘인데, 황영춘!”

영춘이, 영춘이…… 되뇌어봤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아, 돌아서면 까먹을 정도로 형편없는 내 기억력을 자책했다.

“아~ 영춘이. 기억나지! 야, 이게 얼마 만이냐?”

전화

설레발 치며 대화를 끌어가다 보면 뭔가 단서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중학교 동창이 25년 만에 연락을 해왔다. 뭔가 법적인 문제라도 있는 걸까. 빨리 법원에 제출해야 할 서류를 작업하던 중이라 마음이 급해 친구가 빨리 용건을 말해주길 바랐다.

“그래. 부모님들은 다 잘 계시나?”

“응. 서울에 같이 모시고 살고 있어. 영춘이 넌 어르신들 잘 지내시나?”(용건 빨리 말해주라. 친구야.)

“그래. 애들은 어떻게 되냐?”

“응, 난 딸만 둘이다. 영춘이 넌?”

“야, 공부 잘하는 우성이도 아들 낳는 기술은 없나 보네. 단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래, 용건이 대체 뭔데, 친구야?”

친구는 한참을 빙빙 돌리다 용건을 털어놓았다.

공기청정기?? 

영춘은 원래 건설 자재 쪽 사업을 하다 거래 업체가 부도나는 바람에 사업은 망하고 빚을 지게 되었다. 이일 저일 하다 지금은 공기청정기 대여 영업을 하면서 팀장직을 맡고 있었다.

“내 밑으로 팀원이 다섯 명 있어. 내가 팀장이긴 한데 나도 영업을 해야 해. 주위에 아는 사람 모두에게 영업하고 나니 더는 영업할 사람이 없네. 그래서……”

요컨대 아는 사람들에게 공기청정기 좀 소개해달라는 얘기였다.

“아무래도 넌 변호사니까 주위에 사무실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 우리 회사 제품이 괜찮은 편이야. 대여라 월 3~5만 원 정도 부담하면 되거든.”

공기청정기

영춘은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몇 달째 실적이 없어 이러다간 팀장 자리도 내놓아야 할 판이야. 팀장으로 있으면 월급 외에 수당도 나오는데. 지금은 한 푼도 아쉬운 때라 말이지. 팀장 자리 유지하려면 내가 기본 실적은 올려야 해서 그런다.”

공기청정기라…… 나는 영춘에게 제품의 특장점을 알아본 다음 모델명과 구체적인 대여 조건 등을 물어서 메모했다. 영춘은 오후에 기어이 내 사무실로 오겠단다. 나는 굳이 오지 않아도 알아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으나 영춘은 미안한 마음에 인사라도 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공기청정기 필요 없습니까?” 

영춘의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이름들을 넘겨보며 편하게 부탁할 만한 사람을 물색해보았다. 우선 무료로 법률 상담을 해줬던 사람들이 먼저 떠올랐다. 나도 예전에 도와줬으니 이럴 때 부탁 좀 해야지, 생각하며……

“김 사장님. 안녕하세요! 조 변호사입니다.”

“아, 조 변호사. 오랜만이네. 연락이 뜸했어요. 언제 골프나 한번 쳐야지?”

“공기청정기 필요 없습니까?”

“예? 공기청정기요?”

김 사장은 몇 달 전 처제 전세금 문제로 상담을 요청해서 해결책을 알려준 바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단도직입으로 용건을 얘기했다. 아울러 공기청정기가 왜 필요한지 인터넷으로 알아본 내용을 근거로 보충 설명도 했다.

전화

김 사장은 내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조 변호사 부탁이라면 해야죠. 우리 사무실에 두 대 놓겠습니다.”

나는 대 여섯 명에게 전화를 걸어 ‘단도직입 화법’으로 공기청정기를 추천했다. 부담감이 없지 않았으나 다들 선선히 부탁을 들어주어 30분 만에 열 대를 예약했다. 새삼 내가 그동안 헛살지 않았구나 싶어 마음 뿌듯했다.

‘부탁 쿠폰’ 대방출 

영춘은 미리 얘기한 대로 오후에 사무실을 방문했다. 아, 얼굴을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아무리 친구지간이라도 부탁을 하러 온 입장에서는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나는 학창 시절 얘기를 좀 하다 고객 명단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영춘아. 내가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들이거든. 혹여라도 마음 바뀔 수 있으니 오늘 오후에 전부 전화 걸어서 확정 지어라.”

영춘은 종이를 받아들고는 “아니, 이렇게나 많이……”라며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변호사 일 하다 보면 다른 사람 부탁 들어줘야 할 때가 있거든. 이럴 때 부탁 쿠폰 쓰는 거지 뭐.”

“내가 이렇게 친구에게 민폐만 끼치네.”

“아이고 무슨 말씀. 괜찮다. 돕고 사는 거지. 내가 이번 주까지 계속 부탁 쿠폰 발행해볼게. 내 사무실하고 집에도 하나씩 놔줘.”

도움 부탁 손 플리즈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너스레를 떨었다. 친구가 감당하는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25년 만에 중학교 동창에게 이런 부탁을 하려고 전화를 한 마음이 어땠을까. 행여라도 마음 다치지 않게 해야겠다고 언행에 유의했다.

친구를 돌려보내고 나서 이틀 동안 부탁 쿠폰을 신나게 발행해 열다섯 대 정도 더 예약할 수 있었다. 내 문제가 아니라 내 친구 일이라며 부탁하니 오히려 더 마음이 편했다. ‘친구를 위해 이렇게 발 벗고 나선다니 참 보기 좋군요’라는 칭찬까지 들었다.

법률사무장으로 변신한 영춘 

며칠 후 저녁에 퇴근 무렵 영춘이 전화를 걸어왔다.

“조 변호사. 자네가 지금 로펌에서 근무하잖아? 그럼 내가 주위 사람들 사건을 소개해주면 도움이 좀 되나?”

“그야 당연히 도움되지. 어차피 변호사도 고객을 발굴해야 하니까.”

“사건을 로펌에서 진행해도 자네 개인에게도 도움된다는 얘기지?”

“내 실적으로 잡히니까.”

“그런 거로군. 그래, 알았다!”

그 후 나는 영춘의 소개로 다양한 사건을 의뢰받게 되었다.

“조변호사님이시죠? 황영춘 팀장 소개로 전화드립니다. 저희 회사 직원이 경쟁사로 스카우트돼 갔는데요, 이런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요?”

“황영춘이가 제 후배인데, 조 변호사님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칭찬을 많이 하더라고요. 납품해놓고 못 받은 돈이 3억 원이라 이걸 소송으로 해결하고 싶은데 어떻게 상담하면 될까요?”

공기청정기 대 영업을 못 해서 쩔쩔매던 친구는 갑자기 유능한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 변신했다.

친구 소개 알선

“혹시 법률적인 문제 없습니까?” 

뒤에 들은 얘기지만 영춘은 만나는 사람마다 “혹시 법률적인 문제 없습니까? 제가 정말 잘 아는 유능한 변호사가 있는데……”라며 말을 꺼냈다 한다. 내가 ‘공기청정기 필요 없습니까?’라는 단도직입 화법을 썼듯이 말이다. 연말에 1년간 수임 실적을 정산해봤더니 영춘의 소개로 수임한 사건이 전체 사건 대비 건수로 30%, 금액으로 40%에 달했다.

공기청정기 대여를 조금 도와준 일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불공정 거래’를 한 셈이다.

영춘은 1년 후 공기청정기 일을 그만두고 원래 전공인 건설 자재 일에 다시 뛰어들었다. 선배가 하는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한다. 1년에 술을 열 번도 안 마시는 나와는 정반대로 1년에 300일 술을 마시는 영춘은 요즘도 계속 나 대신 밤에 술을 마시며 열심히 법률 영업을 하고 있다.

“혹시 집에 법률적인 문제 없습니까? 제가 정말 잘 아는 변호사가 있는데……”

헬프 도움 부탁 친구

나 역시 그 당시 변호사로서 영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따라서 영춘에게 공기청정기 영업을 도와주면서 ‘자, 내가 이렇게 도와줬으니 자네도 나의 변호사 영업을 좀 도와줘’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단 1%도 하지 않았다(못했다). 영춘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진심으로 고민했는데, 그 진심이 전해졌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은 평소보다 민감해진다. 작은 일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작은 배려에도 큰 위안을 받는다. 내 주위 힘든 사람이 어렵사리 도움을 청했을 때, 내 능력이 닿는 한 진심으로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연대(連帶)요, 인간다움이다. 진정한 고수는 냉정한 셈법 그 너머에서 따뜻함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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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우성
초대필자. 변호사.

기업분쟁연구소 소장, 20년차 변호사로서 분쟁의 사전예방에 관한 컨설팅과 교육을 담당합니다. 변호사 업무 외에 법 에세이, 협상, 인문학 관련 컬럼 작성도 하고 있습니다.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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