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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 법률 에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는 환자를 살피고 문진(問診)을 한 후 약을 처방한다. 같은 증상이라도 환자에 따라 다른 약을 처방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약에 거부반응을 보이진 않는지 살펴보고 처방의 적정성을 판단한다. 같은 증상이라고 같은 치료법만을 고수하는 의사는 무책임하거나 실력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 변호사는 어떤가? 상황이 같다면 대응책도 하나만 있는 걸까?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의뢰인에게는 당연히 갈등을 빚는 상대가 있다. 의뢰인과 상대방의 성향에 따라 여러 조합이 나올 수 있기에 대응책도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변호사는 그런 미세한 결을 읽어내는 날카로움과 섬세함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어려운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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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일이다. 대학 친구가 전화로 여동생 일을 부탁했다. 그녀는 의정부시에 있는 건물 2층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는데 남편이 대전으로 발령이 나 이사를 해야 했다. 마침 임대차계약(2년)도 만료되어 건물주에게 나가겠다는 점을 알리고 짐을 뺀 뒤 새로이 삶의 터전이 될 대전 집도 계약을 마쳤다. 원래대로라면 건물주가 전세 보증금을 내줘야 하는데 ‘들어오는 사람한테 보증금 받아가라’며 협조를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보증금 빼주지 않는 집주인 

친구 여동생 김유승 씨(가명)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돌려받아야 할 보증금이 4,000만 원이에요. 이 보증금과 은행 대출금을 합해서 대전 집의 중도금과 잔금을 내야 하거든요. 건물주가 보증금을 안 내주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2주 내에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계약 위반으로 계약금 2,000만 원을 날릴 판이에요. 몇 번 항의했는데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아요. 변호사님 명의로 강력한 경고장을 써서 건물주에게 보내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

복잡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임대차계약 기간이 지났고 세입자가 집을 비워줬는데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임대인을 상대로 경고장을 작성하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경고장 작성해서 저희 사무실 명의로 내용증명 발송하겠습니다.”

집

나는 상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20분 만에 경고장을 작성한 뒤 비서에게 내용증명 발송을 지시했다. 그러고는 함께 일하는 동료 변호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

“경고장 잘못 보냈다가 문제가 완전히 꼬여버렸네요. 아휴……”

부동산팀 정 변호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의뢰인 요청으로 손해배상 및 형사고소를 하겠다는 변호사 명의 경고장을 보냈는데, 상대방 자존심을 건드리는 바람에 감정싸움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의뢰인 입장에서는 이제 부지하세월이라 더 막막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경고장 보내면 겁먹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어요.”

듣고 있던 선배 박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경고장도 사람 봐가며 보내야 해. 경고장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안 통하는 사람도 있으니. 의뢰인 하자는 대로 했는데도 일이 꼬여도 욕먹는 쪽은 변호사라고.”

집주인은 어떤 분인가요? 

아차, 싶어 나는 급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민 씨! 아까 얘기한 내용증명, 우체국에서 발송했을까요?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가서 발송 보류한다고 말하고 찾아오세요.”

집주인의 성향을 전혀 파악하지 않고 경고장을 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김유승 씨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에 다시 사무실로 와달라고 했다.

“아까는 너무 간략하게 말씀을 들었는데요. 이 사건 처음부터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건물주는 어떤 사람인가요?”

김유승 씨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건물주는 피아노 학원 건물 1층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50대 후반 남성으로 동네 반장이라 무슨 문제든 나서서 적극 중재하는 스타일이라 한다. 술을 특히 좋아하고 조기축구회도 열심히 나간다. 검소한 성격에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고, 지방에는 땅도 꽤 갖고 있다. 한마디로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Michael-kay Park, "동네 슈퍼마켓", CC BY ND https://flic.kr/p/4zBR3x
Michael-kay Park, “동네 슈퍼마켓”, CC BY ND

나는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물었다.

“처음 입주했을 때 건물주와 관계는 어땠나요?”

“처음에는 잘 지냈죠. 자기 건물에 피아노 학원이 들어와서 건물의 격이 높아졌다면서. 학원에도 한 번씩 들러서 필요한 게 없나 둘러보기도 하고……”

집주인과 틀어진 이유 

김유승 씨가 그 건물을 계약한 이유는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건물주의 부지런한 성격이 한몫했다. 김유승 씨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건물주와 사이에 틀어진 계기가 있었네요. 자주 학원에 내려와서 살펴보는 것은 좋은데, 잠바 걸치고 와서 피아노를 띵똥거리는 일이 몇 번 있었어요. 뭐 나쁜 뜻은 없었지만, 학생들 보기에 좀 그랬죠. 전 나름 학원 분위기를 최고급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인테리어도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어느 날 제가 정색을 하고 ‘앞으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여기 출입을 삼가면 좋겠다’고 단호하게 말했죠. 음…… 그 후로 서로 인사도 안 하고 지냈던 것 같긴 합니다.”

“건물주가 왜 그랬을까요?”

“자기처럼 음악을 모르는 사람도 피아노를 배울 수 있냐, 뭐 그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피아노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건물주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김유승 씨에게 말했다.

“경고장 발송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 어떨까요? 경고장을 보내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호사 명의의 경고장을 받으면 태도가 바뀌지 않을까요?”

“김유승 씨 말대로 건물주가 돈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차피 줄 돈, 좀 늦게 준다고 생각하고 버티는 거죠. 그래 봐야 이자 정도 더 붙을 테니까요. 하지만 김유승 씨는 당장 2주 내에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아주 곤란해지잖아요?”

“하기야 돈 있는 사람이니 이자에 겁을 먹진 않겠네요.”

“아마도 건물주가 김유승 씨에게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그래? 날 무시했어. 좋아’, 이렇게 억하심정을 품었는데 유승 씨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 되니 협조하기 싫어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경고장보다 강한 감사 편지 

내가 고민 끝에 내린 처방은 감사 편지를 전하자는 것이었다.

“건물주가 건물을 잘 관리해준 덕분에 그동안 학원도 잘 운영했잖아요. 또 남편이 좋은 데 발령 났고요. 건물주도 나쁜 의도로 학원을 들락거린 것도 아닐 테니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하나 써보시죠.”

“그러다가 오히려 약점을 잡히지 않을까요?”

“만약 그래도 안 되면 경고장 보내고 소송하죠. 어차피 소송 시작하면 최소 6개월 이상 걸립니다. 김유승 씨는 당장 2주 내에 돈이 필요하잖아요.”

김유승 씨는 그날 저녁 집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담긴 손편지를 썼다. 막상 쓰다 보니 건물주에게 고마운 점도 생각이 나더란다. 편지만 전하기가 좀 그래서 학원생 어머니에게 받은 상품권 세 장을 같이 포장해서 다음 날 건물주를 찾아갔다.

본인 슈퍼마켓을 지키고 있던 건물주는 김유승 씨를 보고 흠칫 놀라며 경계를 했지만, 그녀는 편지와 상품권을 건네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유유히 슈퍼마켓을 빠져나왔다.

감사 편지

과연 어떻게 됐을까? 김유승 씨 못지않게 초조한 쪽은 바로 나였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사나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라는 이솝 우화 식의 처방이 실제로 통할지 궁금했다. 김유승 씨가 감사 편지를 전하고 사흘이 지나 건물주는 유승 씨에게 보증금 4,000만 원에 이사비로 50만 원을 더 얹어 입금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건물주는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집주인에게 고마워하던 유승 씨는 내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나는 그날 이후 동료들에게 거드름 피우면서 자랑할 레퍼토리가 하나 늘었다.

“다들 들어는 봤어? 경고장보다 강력한 감사 편지라고. 변호사라면 말이야~~~”

법이 분쟁을 해결하는 효율적인 수단은 맞지만, ‘강제적’인 수단이기에 이를 남용할 경우 상대방과의 갈등이 더 증폭할 위험성도 분명히 있다.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분쟁의 ‘상대방’이다.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해서 여러 수단 중 가장 적합한 수단을 선택하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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