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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에세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조우성 법률 에세이

“수길이? 수길이라… 수길이라… 야,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중학교 동창이라면서 30년 만에 전화 연락을 한 친구 수길이(가명).

반가운 마음 한편으로, 이렇게 갑자기 전화 온 친구들 대부분이 무언가 법률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음을 떠올리며 불안함이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수길이는 아들 문제로 상담하고 싶어 했다.

벌써 머리가 반이나 벗어진 친구. 예전 얼굴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매나 입꼬리를 보니 예전에 장난을 심하게 치던 녀석의 인상을 조금이나마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연락하면서 부탁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아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널 찾아왔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문을 연 수길은 내게 서류를 건넸다. 제목을 보니 ‘통보서’였다. 일단 통보서를 읽기 전에 수길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수길의 아들은 17세(고2).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연예인이 되겠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연예 매니지먼트 사에서 개최하는 오디션에도 참가했다. 그러다가 어떤 매니저를 알게 됐는데, 그 매니저로부터 체계적인 연습을 하려면 천만 원가량을 먼저 선금으로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은 그렇게 큰돈을 아버지에게 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는데 그 매니저는 A 캐피탈이라는 회사를 소개해주면서, 일단 그곳에서 돈을 빌려서 입금한 후 차근차근 행사 등을 뛰면서 돈을 갚아나갈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수길의 아들은 그 매니저를 따라 A 캐피탈에 가서 ‘차용증’에 자필서명을 했고, 틈틈이 그 매니지먼트 회사에 가서 연습했다.

그런데 최근 그 매니지먼트 회사가 문을 닫고 관계자들은 모두 종적을 감췄다. 그러자 A캐피털에서는 수길의 아들에게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다가 1주일 전 수길에게 통보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수길은 그 통보서를 받아본 후 너무나 화가 나서 아들을 앉혀놓고 전후 사정을 샅샅이 파악했는데, 아들은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곤경에 처한 것 같아서 몇일 전에 유서를 써넣고 목을 매고 자살하려다가 수길의 아내에게 발견되었다.

나는 수길이 건네준 통보서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수신 : 장 수 길 님
발신: A 캐피탈 (담당 : 길 OO 부장)
발신인 대리인: 채권 추심 국가공인 보좌관 최 O O

제목: 채권추심 법적 통보의 건

1. 귀하의 가정에 평안과 건강이 깃들길 기원합니다.

2. 귀하의 직계비속인 장OO 군(채무자)은 2011. 3. 4. 발신인 회사로부터 금 1,000만 원을 6개월 사용한다는 약속으로 차용했습니다(월 10% 이자, 변제기 이후 미지급 시에는 월30%의 지연이자).(별첨 – 차용증 참조)

3. 그런데 채무자는 약속한 2011. 9. 3.에 위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4. 채무자가 발신인에게 변제해야 할 금액은 원금 1,000만 원에 6개월간의 이자 600만 원( = 1,000만 원 x 10% x 6개월), 그리고 그 뒤로 6개월간의 지연이자 1,800만 원(=1,000만 원 x 30% x 6개월), 합계 3,400만 원에 이릅니다.

5. 민법상 미성년자의 법률행위에 대해서는 친권자인 아버지가 이에 대해 연대책임을 져야 합니다(민법 제755조). 따라서 발신인은 귀하에게 위 3,400만 원의 즉시 지급을 요청합니다. 발신인 계좌(신한은행 302-OO-OOOOOO)로 즉시 위 금액을 입금해 주시길 바랍니다.

6. 만약 귀하가 이 통보서를 받은 날로부터 7일 이내에 위 5.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발신인은 부득이 ① 귀하 급여에 대한 채권가압류 조치 ② 귀하 부동산에 대한 가압류 조치 ③ 귀하의 아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죄 고소 등의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은 발신인도 원하지 않는 바이므로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Pacta Sund Servanda(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 로마 법언(法諺) –

2012. 3. 10.
위 발신인 대리인
국가공인 보좌관 최 O O

법대 수업시간에 들었던 로마 법언까지 고색창연하게 인용해 놓은 통보서,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가 법을 잘 몰라서 그런데 내가 빠져나갈 구석이 거의 없어 보이더라. 그리고 국가공인 보좌관이라는 거 보니 공적인 기관이 나선 것 같던데, 휴…. 월급쟁이 형편에 3,400만 원을 당장 어떻게 구하나? 나 역시 사채를 빌려야 할 판이야. 어제는 그 부장이라는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왔었어. 아주 점잖게 생겼던데. 그 부장이 그러더구만. 내 회사 월급에 가압류를 하게 되면 회사 다니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사실 그것도 정말 겁이 나.”

“법을 상당히 좋아하는 친구들 같은데?”

“응, 자기들을 일반 사채업자 취급하지 말라더군. 자기들은 모든 것을 계약과 법에 따라서 처리한다고 하더라고.”

“그래? 그럼 우리도 법으로 처리해야겠네?”

“혹시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나는 자살까지 시도했다는 수길이 아들을 떠올렸다.

이런 썩을 XX들. 바로 컴퓨터를 켜고 답변서를 썼다.

수신 : A 캐피탈 (담당 : 길 OO 부장)
발신: 장 수 길
발신인 대리인: 조우성 변호사

제목: 채권추심 법적 통보에 대한 회신의 건

1. 본 통보서는 귀하의 2012. 3. 10.자 통보서에 대한 회신입니다.

2. 귀하는 발신인의 아들인 장OO 군에게 금 1,000만 원을 빌려주었음을 전제로 그 상환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법적 청구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3. 미성년자에 의한 법률행위의 취소
장OO 군은 민법상 미성년자입니다. 미성년자에 의한 법률행위는 법정대리인(발신인)의 동의를 얻어야만 유효하게 성립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법정대리인은 미성년자에 의해 이루어진 법률행위는 이를 취소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5조 2항). 발신인은 이 통보서를 발송함으로써 장OO 군과 귀사 간의 금전소비대차 계약은 이를 취소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귀사가 이 통보서를 받은 그 즉시 장OO 군과 귀사 간의 금전소비대차 계약은 소급적으로 취소되는 것이므로, 더는 장OO 군이나 발신인에게 청구를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4. 귀사의 이자제한법 위반
이자제한법에 따르면 돈을 빌려주고 이에 대해 부과하는 이자는 연 30%를 넘지 못합니다. 만약 이를 위반하여 이자를 약정하면 이는 무효이며, 만약 이를 초과하는 이자를 받은 경우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됩니다(이자제한법 제8조 1항).

아마도 귀사는 장OO 군 이외에 상당히 많은 채무자에게 이자제한법을 초과한 이자를 징수했을 것으로 사료되는 바, 발신인으로서는 사법당국에 이 사실을 알려 부당한 피해자들의 권리를 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5. 귀사 담당자의 공갈죄
귀사는 적법하지도 않은 이자까지 합한 금액을 발신인에게 요구하며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급여에 대한 가압류, 아들 장OO 군에 대한 사기죄 고소 운운하며 발신인을 협박했습니다. 이는 형법상 공갈죄(형법 제350조; 10년 이하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 역시 발신인은 수사기관에 귀사 담당자를 고소해서 책임소재를 가릴 것입니다.

6. 귀사의 공무원 자격사칭죄
귀사가 보내온 통보서에 따르면 “채권 추심 국가공인 보좌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바, 이는 마치 귀사를 위해 공무원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업무를 대행해 주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형법상 공무원 자격사칭죄(형법 제118조; 3년 이하의 징역)에 해당할 수 있어 이에 대한 고발 역시 고려 중에 있습니다.

7. 요청사항
발신인으로서는 위에서 밝히다시피 귀사에게 아무런 금전지급의무를 부담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사는 다양한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귀사는 이 통보서를 받은 날로부터 5일 내에 ‘장OO 군에 대한 금전채무가 없으며 더는 이에 대한 청구를 하지 않겠다’는 확약서를 발신인 대리인에게 송부해 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귀하가 위 기간 내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발신인은 부득이 위 4.5.6.항에 따른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작성한 내용을 보여주었더니 수길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쟤네들도 잘못한 게 있다는 거지?”

“잘못한 게 있다는 정도를 넘어선 거지.”

나는 바로 비서를 시켜 위 답변서를 우체국을 통해 내용증명으로 A 캐피탈에 발송했다.

그로부터 3일 후 나는 A 캐피탈로부터 장OO 군은 A 캐피탈에 대해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채무부존재확인서’를 받았다. A 캐피탈의 약점을 낱낱이 공격했으니 A 캐피탈로서도 다른 방안이 없었으리라.

어쭙잖은 법 지식을 앞세워 서민들을 공격하는 업체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서민들은 법적인 내용이 잔뜩 포함된 문서를 받으면 일단 겁부터 날 테고. 지금 이 시각에도 얼마나 많은 ‘공갈’들이 오가고 있을지 심히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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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우성
초대필자. 변호사.

기업분쟁연구소 소장, 20년차 변호사로서 분쟁의 사전예방에 관한 컨설팅과 교육을 담당합니다. 변호사 업무 외에 법 에세이, 협상, 인문학 관련 컬럼 작성도 하고 있습니다.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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