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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청년 에릴 안드레이드(30)는 빗물이 새는 어머니 집 천장 수리비를 벌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원양어선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7개월 후인 2011년 2월, 집으로 돌아온 에릴의 시신은 딱딱하게 냉동된 채 나무상자에 담겨 있었습니다. 온몸은 멍과 베인 상처로 가득했고 한쪽 눈과 췌장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에릴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미국령 서사모아에서 알바코어 다랑어를 하역하고 있는 선원들의 모습
미국령 서사모아에서 알바코어 다랑어를 하역하고 있는 선원들의 모습

세계 인권선언[footnote]매년 12월 10일은 유엔에서 지정한 ‘세계인권선언의 날’이다. 인권선언은 1948년 제3회 유엔총회에서 발의되어 이듬해 공표됐다. 모든 인간은 국가 간 존재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이를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기본적 자유와 침해받지 않아야 하는 보편적 권리에 대한 믿음을 확인했다. [/footnote]이 선포된 후, 지난 수십 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구상 곳곳에서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억압과 차별, 그리고 끔찍한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린피스는 오늘 여러분께 그들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망망대해에서 고통받고 있는 어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그린피스 세계인권선언의 날

에릴 안드레이드: 누가 이 청년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먼저 에릴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볼게요.

에릴은 대학에서 범죄학을 전공했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신체 조건 때문에 경찰이라는 꿈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는 바다가 또 다른 기회를 열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양어선에 사람을 알선해주는 불법 중개업자는 필리핀 대졸자의 평균 임금을 훌쩍 넘는 턱없이 부풀려진 조건을 약속했고, 에릴은 몇 년만 고생하면 더 나은 삶을 찾을 수 있을거라 믿으며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도착한 에릴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비참한 감금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허름한 방에 갇혔고, 에릴을 감시했던 사람들은 바다에서 일하고 싶다면 자신의 성 노리개가 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암본 항구에 마련된 임시 쉼터에서 쉬고 있는 미얀마 어부들. 인신매매로 끌려온 어부들도 있다. 
인도네시아 암본 항구에 마련된 임시 쉼터에서 쉬고 있는 미얀마 어부들. 인신매매로 끌려온 어부들도 있다.

이처럼 치욕적이고 비인간적인 감금생활을 견뎌내고 어렵게 대만 참치잡이 어선에 올랐지만, 에릴의 소박한 꿈은 모두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릴은 매질을 당하며 하루 20시간씩 일을 해야 했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담보로 잡혀있는 엄청난 금액의 중개 수수료와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입니다.

에릴이 갑작스레 죽었을 때, 배에 승선해 있던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조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2차 부검 결과, 그의 몸에서 지속적인 폭행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시신은 훼손 되어 있었죠. 하지만 에릴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법과 정의에서 멀어진 바다

21세기에 벌어졌다고는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원양어선에 탑승했던 수많은 동남아시아계 노동자들에게 에릴의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수산업계는 그 어느 산업분야보다도 개발도상국에 대한 노동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갈수록 늘어가는 수산물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가장 값싼 노동력을 찾다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인데요. 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어획에 종사하는 전 세계 2,700만명의 노동자 중 83%가 아시아인이며, 그중에서도 필리핀,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출신의 노동자들은 가장 열악한 조건으로 고용되고 있습니다.

태국 어선에 올랐던 600여 명의 동남아시아계 선원들을 상대로 한 국제노동기구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 이들 중 94%는 제대로 된 계약서 없이 일을 시작했고,
  • 42%가 이유 없는 임금삭감을 경험했으며,
  • 40%는 시간 제약 없는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고,
  • 17%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노역에 동원됐으며,
  • 10%는 무차별적 폭행에 시달렸습니다.
태국 어선에 승선한 일반 선원과 인신매매로 끌려온 선원들에 대한 연구 결과
태국 어선에 승선한 일반 선원과 인신매매로 끌려온 선원들에 대한 연구 결과

원양어선과 연승선에 오르는 선원 중 상당수는 인신매매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태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출신 선원 중 인신매매 피해자 천백여 명을 상대로 한 또 다른 연구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 선원의 68%는 성적 또는 신체적 폭력을 경험했고,
  • 46%는 노동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  23%는 선상에서 감금되었고,
  • 6%는 마약 성분 각성제가 든 물을 강제로 마시며 일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팔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맞았습니다.”

10년 동안 단 한푼도 받지 못하고 일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저를 학대했어요. 잠조차도 충분히 잘 수 없었습니다.”

인신매매로 끌려온 미얀마 선원 인터뷰 중에서 (인도네시아 암본, 2015년 10월)

바다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비참한 상황은, 국제노동기구에서 발행한 강제노동(forced labour)지표에 포함된 모든 항목을 아우릅니다.

국제노동기구의 강제노동 지표
국제노동기구의 강제노동 지표

타이유니온: 어부의 눈물 뒤에 감춰진 탐욕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무참히 짓밟는 바다 위 악행 뒤에는,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과 이를 묵과하고 방조하는 정치권의 긴밀한 결탁관계가 있습니다. 감시체계가 허술한 바다의 지리적 특성이 이들의 탐욕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 되어 준 셈이죠.

세계 3위의 수산물 유통업체이자, 전 세계 최대 참치캔 제조 회사인 타이유니온(Thai Union Group)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타이유니온은 태국을 비롯해 미국,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중국 등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수십 여 개의 자회사와 수산물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데요. 타이유니온의 영향력은 수산물의 어획부터, 가공, 포장, 유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있습니다. 업계 전체에 이들의 힘이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뻗어있는 상황이죠.

타이유니온과 같은 글로벌 수산기업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업 경쟁력을 가집니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수산물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조업활동을 합니다. 마치 공장에서 옷을 찍어내듯 바다에서 끊임없이 수산물을 건져 올립니다. 무분별하고 파괴적인 조업 방식으로 바다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는 이들에게 선원 노동착취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는 물론 타이유니온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선상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학대는 수산업계 전반에 걸쳐 편의적인 관행이자 일종의 노동자 통제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규제와 감시는 미비하고, 법과는 동떨어진 망망대해. 무법지대라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입니다.

태국 어선에 승선했던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 피해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밥상 위에 오른 ‘짓밟힌 인권’ 

최근 들어 미국과 유럽 선진국 소비자들을 필두로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어획된 수산물을 먹지 않겠다는 움직임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해외 주요 언론들타이유니온을 비롯한 거대 수산물 업체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변화를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반가운 움직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 투명한 정보 공개와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거대 기업들을 움직이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수산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은 우리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개개인의 소비자가 망망대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연대하고, 함께 더 큰 목소리로 물어야 합니다. 내가 먹는 해산물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바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요.

그린피스가 소비자와 함께 선원들의 노예 노동이 담긴 해산물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계 최대 참치캔 제조사 타이유니온의 ‘선원 인권 유린’과 ‘해양 환경 파괴’를 알리고 타이유니온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그 첫 시작입니다.

그린피스

2016년을 맞아 신년 모임이 많아집니다. 따뜻한 말과 마음을 나누는 밥상 위, 해산물로 요리한 음식이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 주세요.

이 해산물에 누군가의 피와 눈물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 부당한 대우와 매질을 견디고 지친 몸으로 잡아올린 해산물이 여기 내 식탁 위에 올라온 것은 아닐까.

다음 편에서 그린피스는 바다 위 인권문제가 왜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지, 어떻게 바다 위 인권유린이 우리의 일상, 그리고 더불어 환경파괴와 연결되어 있는지 좀 더 깊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어느 곳의 불의는 모든 곳의 정의에 대한 위협이다.

– 마틴 루터 킹

타이유니온에 항의 서명하기  https://act.greenpeace.org/ea-action/action?ea.client.id=1844&ea.campaign.id=42721&utm_source=internal&utm_medium=post&utm_term=GPI,not%20just%20tuna&utm_campaign=Oceans&__surl__=Ig2jt&__ots__=1452065786824&__step__=1
타이유니온에 항의 서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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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그린피스(서울사무소)가 스토리펀딩에 올린 글을 필자와 협의해 슬로우뉴스 원칙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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