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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에는 죽음이 없다. 단지 죽어가는 페드라만 있을 뿐이다.” (루시앙 골드만)[footnote]Colloque international sur la sociologie de la litterature (Bruxelles: Institut de la Sociologie, 1974), p.40. 여기서  예술작품은 장 라신의 비극적 희곡 ‘페드르'(1677)를 가리키고, ‘페드르’는 이 희곡 속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페드르(혹은 페드라)는 로마 비극 시인들이 자주 다뤘던 비극적이고, 신화적인 인물이다. 이 신화는 줄스 다신에 의해 동명 영화인 [페드라](1962)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footnote]

가수 아이유와 아동성애 논란에 짧게 개인적인 생각을 적는다. 논란의 요체는 아이유의 노래 ‘제제’의 가사와 ‘스물셋’의 뮤직비디오가 소아성애를 암시(조장?)한다는 것인데, 일단 ‘제제’의 가사와 ‘스물셋’의 뮤직비디오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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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듯
씩 올라가는 입꼬리 좀 봐
그 웃음만 봐도 알아 분명히 너는 짓궂어
아아, 이름이 아주 예쁘구나 계속 부르고 싶어
말하지 못하는 나쁜 상상이 사랑스러워
조그만 손가락으로 소리를 만지네
간지러운 그 목소리로 색과 풍경을 노래 부르네

꽃을 피운 듯
발그레해진 저 두 뺨을 봐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당장에 머리 위엔 햇살을 띄우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너의 속은 먹구름과 닿아있네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잎사귀에 입을 맞춰
장난치면 못써
나무를 아프게 하면 못써 못써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잎을 가져가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
Climb up me

-아이유(작사), ‘제제’ 중에서

YouTube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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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소동들이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다. 그 익숙함과 낯섦에 관해 쓴다.

하나. 아이유와 롤리타 (컴플렉스)

아이유 (삼촌) 팬이 열광하는 건 아이유라는 뮤지션의 예술적 역량도 역량이지만, 아이유라는 대중문화 아이콘에게 느끼는 성적 애호, 특히 롤리타 컴플렉스에 바탕한 정서가 크다는 점은 많은 이들이 넉넉하게 인정하리라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 이건 아이유와 기획사 관련 산업 종사자도 잘 알고, (삼촌) 팬도 잘 아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갑자기 롤리타, 거기에 더해 소아성애라는 거대한 소동으로 이 문제(?)가 확산했는지는 알 길 없다. ‘제제’ 가사와 ‘스물셋’ 뮤직비디오는 명백히 성적 코드를 노골적으로 혹은 간접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내지만, 그것을 소아성애로 연결짓는 ‘고결한’ 상상력(분석력? 해석력?)에 대해선, 뭐 그렇게 생각하는 누구나의 자유고, 또 작품은 그런 다양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더 풍부해지지만, 그 해석이 법원의 판결을 대체해야 한다고 맹신하는 순간 그 해석은 독선과 폭력이 된다.

둘. 롤리타와 아동성애

아이유에 대해 떠드는 것도 좋고, 문학작품으로서 [롤리타](195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문학작품에서 파생하고, 형성한 문화적 상징이자 상업적 대중문화로서의 롤리타 아이콘과 그 현상에 관해 논평하고, 토론하는 것도 좋다. 물론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1968, 조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루스)를 이야기하는 것도 누구나의 자유다.

롤리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더불어 아동성애라는 범죄 성향 혹은 정신질환에 관한 사회적 관심과 경각심을 이번 기회에 한 단계 높여보는 것도 좋겠다. 그 연장에서 아이유의 ‘제제’ 가사에 대한 ‘동녘’의 논평은,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게 아니라면, 그야말로 반문화적이다. 그런 점에서 동녘의 사과는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이유 논란이 갖는 그 온갖 사회적 비용(이라고 쓰고 ‘뻘짓’이라고 읽는다)에 불구하고, 아이유 소동는 그런 점에서 다양한 이들에게 ‘공론의 소재’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만 더 바라면, 이번 기회에 롤리타를 아동성애라는 범죄의 예비형(준비형?)으로 취급하는, 더 나아가 이를 범죄로 간주하는 성급한 독단은 잠시만 미뤄주시면 좋겠다. 소아성애에 대한 분노와 염려는 십분 이해하고 남지만, 믿음이 독선이 되면 결과는 폭력이다.

아이유

롤리타는 아동성애가 아니고, 아동성애 역시 (그것이 우리 대부분에게 즉각적으로 역겹고, 불쾌하며 상상하기도 싫은 혐오의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만 품고 있다면, 표현되지 않았다면, 범죄가 아니다. 다만 아동성애는 표현되는 즉시 범죄고, 롤리타는 그렇지 않다. 아동성애는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어두운 욕망과 유전적 결함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가 결합해 만들어낸 ‘괴물’이다. 그 유전적이고, 사회적인 산물로서의 아동성애는 어떤 표현물로서도 인정할 수 없고, 인정되어서도 안 된다. 

다만 세계시인선2_말도로르의-노래-500x741여기서 주의할 점은 영아를 소재로서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즉각적으로 범죄가 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술 작품은 그 전체를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가령,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1869)는 영아 살해 장면을 악마적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한다.[footnote]”활짝 열린 눈을 가진, 아직 윗입술 위에 아무것도 나지 않은 어린 아이를 침대에서 난폭하게 끌어내려, 그의 아름다운 머리털을 뒤로 쓸어주면서, 그의 이마에 그윽하게 손을 내미는 체하는 것, 아, 그것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다음,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긴 손톱을 그의 부드러운 가슴에 박아 넣는다. 아이가 죽지는 않도록. 만약 아이가 죽는다면, 후에 그의 비참함의 양상을 즐기지 못할 것이니까. 그런 다음 상처를 핥으면서 피를 마신다.”[/footnote] 극히 일부의 맹신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산문시를 ‘아동성애물’이라거 ‘아청물’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트레아몽은 현대 시문학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말도로르의 노래]는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넉넉하게 인정받는다. 

롤리타로 표현되는 (대중) 예술 형식 혹은 코드는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미 우리 사회가 공적으로 허용한 상징적 욕망(이라고 쓰고 ‘대중문화’라고 읽는다)의 이미지다. 이 문화적 상징, 예술적 상징으로서의 ‘롤리타’를 부정한다면, 이것은 대중문화 일반, 예술의 효용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롤리타를 금지하는 시선을 문화적 금욕론으로 읽어낼 여지도 없다. 이런 시각은 오히려 문화적 파시즘에 가깝다.

셋. 아이유 소동과 국정교과서 

왜 그런가. 왜 롤리타를 부정하는 것이 문화적 파시즘인가.

문화적 상징, 코드로서 롤리타는 그 자체로 악도 선도 아니다. 그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욕망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표현물과 그런 표현물들의 집적을 통해 형성한 대중문화 코드, 그 현상일 뿐이다. 모든 문화 현상은 당대에 비판과 옹호를 통해 스스로 자란다. 하지만 이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문화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롤리타는 아동성애의 전조(?)이거나 아동성애를 부추기는 반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본질에서 군부독재가 자행한 위선적인 금욕주의 혹은 사상적 검열에 맞닿는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이야기하는 “올바른 역사의식”이라는 ‘(국가의) 정답’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그 야만적 파시즘의 대중문화 버전이라고 말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으리라.

위험한 교과서

그리고 늘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이야기. 독재의 본질은 동어반복이다. 나는 옳다, 왜냐하면 나는 옳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나’는 항상 옳을 수 있나.

넷. 헬로! 아청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은 대한민국의 ‘(성적) 불온함’을 감시하고 처벌한다. 이 법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같은 국가기관, 그 통제적 검열 장치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위선적인 고결함을 강변한다.

특히 아청법 2조 5호 등은 헌법재판소의 보수적인 판사들조차도 그 위헌성을 긍정한 바 있다(해당 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사건에서 합헌 의견은 5명, 위헌 의견은 4명). 결과적으로 아청법 조항은 합헌으로 유지됐지만(위헌 선언을 위해선 6명의 위헌 의견이 필요), 다수에 근접하는 4명의 재판관이 이 조항을 위헌으로 판단했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소 상징문양

아청법 2조 (정의)

5.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이란 아동·청소년 또는 아동·청소년으로 명백하게 인식될 수 있는 사람이나 표현물이 등장하여 제4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거나 그 밖의 성적 행위를 하는 내용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필름·비디오물·게임물 또는 컴퓨터나 그 밖의 통신매체를 통한 화상·영상 등의 형태로 된 것을 말한다.

아이유는 성년의 가수다. ‘제제’의 가사과 ‘스물셋’의 뮤직비디오는 성적 도발성과 성년과 아동의 이미지를 중첩하는 상징적 설정을 담고 있다. 이것은 명백하다. 이 작품들은 소녀(혹은 아동)을 연상하는 ‘상징 장치’를 통해 앳된 소녀 이미지를 가진 대중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아이유라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판타지를 증폭한다. 이것도 명백하다. 하지만 이 명백성은 문화적 해석을 통해 비평·비판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지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문화적 표현물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성을 지닌 불법이 아니라면, 그 문화 상품을 거부하고, 불매하자고 운동하며, 또 스스로 불태우는 ‘분서갱유’식 처단을 개인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별론으로, 이것을 공히 금지할 권리, 이것을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할 마법은 누구에게도 없다.

자명하지 않은가. 누군가가 싫다고, 무언가가 혐오스럽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마법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적도 없다. 이 마법을 역사적으로 가장 진지하게, 결국 실패했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실현한 게 나치다. 우리나라로 치면,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야만의 권력이 자행한 검열과 탄압은 그런 시도에 가장 가깝다.

다섯. 마법의 시대 

이 모든 소동은 이미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마법, 내가 믿는 것이 유일하게 옳고, 그 절대적인 진실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의견과 해석은 짓밟아도 좋다는 독단과 무지, 그리고 그 독단과 무지를 숙주 삼아 무럭무럭 자라는 폭력, 그 어두운 기억을 불러온다. 이 마법의 세계에서 박정희는 ‘유신’으로 신(神)이 되고, 국민은 매일매일 5시가 되면 국기에 경례하며 국가의 노예로 사육당한다.

아이유 소동은 시끄럽고, 어수선하며, 제발 이제 좀 그만하라고 또 이 ‘떡밥’에 뛰어들게 하는 말들의 잔치다. 아이유 소동은 온갖 다양한 이야기들, 말들, 소란들마저 그것이 불법이 아니라면, 범죄가 아니라면 포용해야 한다는 ‘상식’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확인하는 기회일까.

그렇게 아무리 상대방의 의견이 같잖더라도 토론과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이견을 확인하고, 사유의 재료로만 여기는 것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멈출 수 있을까. 아니면 ‘이교도’의 이견을 끝끝내 교정하고, 검열해 폐기하고 금지해야 한다는 오래된 권력의 욕망을 다시 우리 안에서 되살리는 사건일까.

아이유 소동은 ‘나 빼놓고 모두 오답’이라는 ‘반인반신’ 박정희 각하의 무결성과 절대성을 떠올리게 한다. 국정화의 시대, 권력의 욕망이 이미 절대적 무결성으로 모든 진리와 진실을 스스로 판단하며, 어떤 이견도 다양성도 인정할 수 없다는 오만을 토해내는 모습, 그래, 국정교과서 사태를 우리는 실시간으로 목격한다.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나는 옳다,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그런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아이유 소동은 묻는다. 대중문화도 국정화하는 게 어떨까? 결국, 돌고 돌아 우리는 다시 박근혜 시대에 박정희라는 유령을 데리고 온 것은 아닐까. 모든 진리를 독점하고, 판단하는 누군가의 독재와 검열을 스스로 원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당신의 대답을 모른다.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하다.

‘제제’를 ‘금지’해야 한다는 당신은 이미 그 질문에 ‘예’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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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1. 네.
    예술은 법 위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인식, 사회가 허용하는 도덕성과 그 궤도를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유가 한 것이 예술의 범주, 즉 민주주의에서 보장받은 개인의 자유라면 제제라는 곡을 써낸것에 아무런 문제점은 없습니다.
    비난할게 있다면 제제라는 아동폭력의 대상에 성적코드를 입혔다는 수준일뿐입니다.

    한편으로 이번 소동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인터넷 여론 수준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냄비와 같은, 중심 없는 흑백논리에 너무나도 쉽게 휩쓸리는 그 모습이요. 누군가 잘못됐다고 프레임을 씌우면 너무나도 쉽게 넘어갑니다.
    멈춰서서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웹의 개발자가 말한 다양성의 발전창구로써 인터넷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능하는 때가 언제일지..

  2. 우선 선생님께서 롤리타 콤플렉스가 아이유에게 국한된 것처럼 말하는 거 같은데, 하지만 레드벨벳, 러블리즈, 오마이걸, 여자친구 등등의 콘셉트와 아이유의 콘셉트 비교할 때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걸을 지적하고 싶었다. 또한 사진들을 비교해도 똑같이 미성숙한 모습으로 매력어필 하고 있다. (아래 사진 참조)

    롤리타 콤플렉스와 가요계에서 사용하는 큐트 콘셉트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큐트 콘셉트로 활동하는 여가수나 걸그룹 모두다 롤리타 콤플렉스에 기초한 정서를 겨냥한다는 뜻인가요. 롤리타 콤플렉스의 뜻은 청소년기의 미성년자에게 향한 성적 욕망인데, 삼촌팬이 큐트 콘셉트의 걸그룹을 좋아한다고 그 사람이 롤리타 콤플렉스 성향이 있다고 단정 짓는 거가 무리인 것 같고. 그냥 취향이 아담하고 귀여운 여자일 수 있는 거니까. 두 개념 사이에 구분 방법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스물셋” 뮤직비디오가 롤리타 코드 암시 한다고 하는데 꼭 그런 건지? 아이유가 젖병을 먹고 있는 장면 보여주는 사진 많지만 젖병과 인형을 집어던지는 장면은 안보입니다. 젖병과 인형을 집어던진 이유는 이제 어린 소녀의 모습이 지겹다는 뜻 같아 보이는데, 그녀에게 귀여운 모습을 강요하는 대중에 대한 반발심 표출 같다. 하지만 단순히 아이유가 젖병을 먹고 있는 장면만 보여주면 롤리타 코드처럼 보입니다.
    .

  3.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튀는 못이 먼저 얻어맞는다. 이런 교육이 아예 유전자에 심어진 듯합니다. 젊은 사람, 여자 할 것 없이 사상의 오와 열을 맞추려는 모습이 놀랍더군요. 난 가만히 있는데 넌 왜 가만히 있지 않느냐. 넌 왜 나랑 다르냐. 나서지 말고 내 옆에 정렬해라.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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