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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강사다: "You are very hard teacher!"

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13. “You are very hard teacher!”

2013년 1학기부터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교양 강의를 계속해 오고 있다. 흔히 ‘대학국어’나 ‘글쓰기’로 불리는 과목이다. 그런데 2010년 즈음 박사 과정 중에 잠시 어학당에서 ‘한국어’ 강의를 했다. 내가 이십 대 후반이었던 때다. 대학 입학을 앞둔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나는 어학 전공이 아니었지만 몇 주간의 위탁 연수를 거쳐 해당 어학원에서만 활용 가능한 강사 자격을 받았다.

2010년을 전후해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가 성황이었다. 많은 학교가 급히 어학당을 설치해 각국 학생의 유치에 나섰고, 문학에서 어학으로 전향하는 주변 연구자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일본이나 카자흐스탄과 같은 나라로 일찌감치 떠난 이들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잠시 어학당의 강사가 되었다. 내 의지였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인가 보다, 했다.

개성 넘치는 외국인 학생들

어학당 학생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중국 학생들이었다. 가끔 일본이나, 러시아나, 미국 학생이 한두 명 있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유학 온 그들은 공부보다는 쇼핑, 연애, 서울 나들이에 관심이 많았다. “지난 주말에 무엇을 했습니까?”하고 물으면 명동, 홍대, 강남, 이러한 곳에 다녀왔다고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J는 한 달 쇼핑 금액만 3백만 원이 넘는다고 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초기 유학생 중엔 꽤 부유한 학생들이 많았다.

반면 T는 학교 앞 편의점에서 새벽까지 아르바이트하며 본국의 부모님께 돈을 보냈다. 그는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가끔 떠듬떠듬 중국과 미국의 국제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대부분 학생이 “중국 최고!”, “러시아 최고!”하고 열을 올렸지만, T는 “중국은 미국을 이길 수 없어요. 언제나 2등이에요.”하고 말해 다른 학생들에게 비난받곤 했다. 그의 꿈은 한국 IT 회사에 취업해 부모님께 집을 사 드리는 것이었다. 그밖에 수업 중 태극권을 시연해 준 C, 반한 시위에 참가하고 왔다고 당당히 말했던 U, 여자친구만 10명이 넘는다던 G, 모두 어린 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개성 넘치는 학생들이었다.

초급반 학생들과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했지만, 중급반부터는 부분적으로나마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한국의 ‘보물’에 관한 챕터를 다룰 때, 빅토르라는 러시아 학생이 러시아에는 4개의 황금이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무엇이냐 물으니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라 답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그들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나는 그가 무척 부러워졌다. 그런 빛나는 문학가들을 가진 것도 부러운 일이고, 무엇보다도 평범한 국민이 그들을 오래 기억한다는 것이 더욱 그랬다. 굳이 문학뿐 아니더라도 빅토르는 러시아에 대한 자부심이 항상 있었다. 종종 푸틴에 대해 말할 때는 눈이 반짝반짝했다. 점심시간이면 항상 ‘도시락 라면’을 사다가 정말 맛있게 먹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부끄러운 과거, 어학당

그런데, 어학당 강의는 나에게 무척 부끄러운 과거다. 특히 나에게 배운 첫 분반 학생들이 종종 떠오를 때면 지금도 그들에게 죄스럽다. 제대로 수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쳐 본 경험이 없었고, 특히 어학은 내 전공도 아니었다. 그저 교재를 충실히 가르치는 데만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가끔 학생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거나, 단어와 문법에 대한 추가 질문을 할 때면 난감했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에게 한국어의 문법을 설명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해당 문법을 가르칠 만큼 제대로 알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 스스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수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질문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그저 교재의 내용만 힘겹게 가르쳐 나갔다. 어린 학생들의 반응에 따라 나의 감정 기복 역시 쉽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가끔은 학생들의 호응이 좋아서 나도 덩달아 기쁘게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그저 터덜터덜 축 처져 걸어가는 일이 더 많았다.

“도저히 강의하지 못하겠어요” 

어느 날은 너무 힘들었다. 함께 자취하는 선배 둘에게 살려 달라 연락한 후에, 편의점에서 술과 안주를 적당히 샀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그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도저히 강의하지 못하겠어요. 아무래도 저는 강의 체질이 아닌가 봐요.”

B는 그런 나를 다독여 주며 내일부터는 뭔가 달라질 거야, 라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나도 강의를 처음 시작하고 너무 힘들어서 선배 앞에서 울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음 날부터 다 잘 되더라고 답했다. 옆에 있던 L은 난 처음부터 잘했는데, 하고 혼잣말을 하다가 B에게 넌 다 나쁜데 그게 제일 나빠, 하는 핀잔을 들었다.

두 선배의 아웅다웅에 울고 웃으며 한껏 위로받았다. 그렇게 새벽까지 조촐한 술자리가 끝나고, 조금은 후련해졌다. 하긴, 어학당 강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대학 어디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여전히 강의실에 들어가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더 ‘열심히’ 하고자 마음먹었다.

논문을 읽고 쓰는 시간을 줄이고, 한국어 교재를 더 가까이 두었다. 예문을 다양하게 만들고, 어떻게 하면 단어와 문법을 쉽게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동시에 학생들을 다그쳐 나갔다. 정해진 강의 시간은 50분씩이었는데, 나는 자주 똑똑, 하고 강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수업을 마쳤다. 가르치는 데 정신이 팔려 시간이 가는 것을 잘 느끼지 못했다. 다음 강의를 맡은 선생님은 창문 틈을 통해 기웃기웃 나를 쳐다보며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번은 선배 강사가 나를 보고는 다음 수업을 위해 강의를 제시간에 끝내면 좋겠다, 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나의 성실함이 학생과 선배들에게 잘 전달될 것이라 여겼다. 실제로 선배 강사들은 그것을 초임 강사의 열정으로 생각해 주었는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Feb 1: A Very Modern Lecture", John Keane (CC BY-SA 2.0)

“Feb 1: A Very Modern Lecture”, John Keane (CC BY-SA 2.0)

“You are very hard teacher”

어느 날도 나는 정해진 수업 시간을 훌쩍 넘기며 계속 강의했다. 똑똑, 소리에도 할 건 해야지, 하는 생각에 급히 마무리 수업까지 하고서는 죄송합니다 선생님, 하고 강의실 문을 열었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려는데, 미카라는 예쁘장한 여학생이 나에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어떤 말을 했다.

“You are very hard teacher”

미카는 옅은 한숨과 웃음을 함께 내뱉었는데, 나는 그에게 고마워요, 하고 답했다.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에 ‘hard’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며 나는 무척 기뻤다. 나의 노력이 학생들에게 인정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편의점에 들러서 다시 한 번 적당한 술과 안주를 사서 B와 L을 만났다.

그리고는 학생이 저에게 ‘하드 티처’라는데 제가 열심히 하긴 했나 봐요, 형님들과 술자리 가진 이후에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어요, 고마워요, 하고 말했다. B는 거봐 나도 그랬다니까, 하며 웃었고 L은 나는 뭐 그런 소리 너무 자주 들어서 지겨운데, 하다가 B에게 다시 한 번 성토를 당했다. 뭐랄까, 비로소 아카데미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학회지에 서투른 첫 논문을 게재했을 때만큼이나 마음이 뿌듯했다. 그 날의 술자리는 B와 L의 아웅다웅과 함께 일찌감치 즐겁게 마무리되었다.

선배들과 미카 덕분에 어떤 여유가 생겼는지, 나는 그날부터 학생들의 표정이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고, 시계를 확인하는 버릇도 들였다. 하지만 55분~60분을 쉬지 않고 진행해야 그 날의 과정을 마무리할 수 있을 만큼, 수업은 그렇게 정형화되어 있었다. 어느 날도 오늘도 5분 정도는 추가 수업을 해야겠구나, 하고 진도를 나가는데 학생들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특히 미카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속으로 ‘미카, 너는 그러면 안 되잖아!’ 하고 생각하며 수업을 마쳤다.

그 후로 ‘hard teacher’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뜻을 딱히 검색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열정’이 있다거나 그런 의미였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열정 있는 교수님”이라는 조합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언젠가 그러한 조합과 대면했던 것 같았다.

"Flames", William Warby (CC BY 2.0)

“Flames”, William Warby (CC BY 2.0)

‘혼자’ 열정적이었던 나

나는 어학당 학생들과 같은 이십 대 초반이던 시절, ‘열정적인 교수님’과 이미 수차례 만났다. 그들은 대개 쉬는 시간을 고려치 않고 연이어 수업하다가 아아 힘드네, 좀 쉬었다가 하자, 하고 말했다. 학생들의 집중력이 이미 눈에 띄게 떨어졌더라도 수업은 강행되었다.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수업의 맺고 끊음은 교수자의 컨디션에 따라 조절되었다. 또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나는 아아, 너무나 열정적이시다, 하고 옆의 학생들과 함께 자조를 내뱉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열정적인 교수자들은 대부분 ‘혼자’ 열정적이었다. 비로소 미카가 말했던 ‘hard teacher’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알았다. 나는 나 혼자 취해 있었다.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학당의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는 그들에게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웠다. 마지막 분반을 맡았을 때는 조금이나마 나 스스로 여유를 다잡고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예문을 더 만들고 단어 시험을 한 번 더 보는 대신, 천천히 말하기, 가장 쉬운 단어로만 말하기, 모든 것을 가르치려 하는 대신 하나라도 제대로 가르치기,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기, 무엇보다 쉬는 시간 지키기, 같은 것에 집중했다.

그때부터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교재 연구에만 매진하거나 쉬는 시간을 잡아먹는 대신, 그들의 입장에 서서 교수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옳았다. 마지막 분반의 몇몇 학생들은 종강 날 나를 찾아와 눈물을 보였고, 나는 그들을 안아주었다. 몇 년 후, T에게 한국의 회사에 취업했다고 울며 전화가 왔을 때는, 나도 울먹울먹했다.

어학당 강의는 내게 너무나도 부끄럽고, 그리고 감사한 경험으로 남았다. 특히 미카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열정적인 교수라며 홀로 취해있었을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언젠가 언급했는데, 덕분에 나는 쉬는 시간을 반드시 지키는 것을 강의의 원칙으로 삼았다. 반장에게는 강의 시간을 넘겨 강의하고 있으면 반드시 손을 들어 쉬는 시간입니다 선생님, 하고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6학기를 강의하는 도중 두 번, 반장에게 지적을 받았다. 반장에게는 감사함을 전하며 플러스 점수를 주었고, 한 번은 그가 시간을 잘못 체크한 것이어서 웃고 지나갔다. 강의하고 싶은 내용이 더 있거나, 혹은 스스로 취하는 때 역시 있지만, 그때마다 You are hard teacher, 라던 미카의 말을 예전의 질감 그대로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미카는 강의실에서 만난, 나의 첫 번째 지도교수다.

"time", uditha wickramanayaka (CC BY-NC 2.0)

“time”, uditha wickramanayaka (CC BY-NC 2.0)

뜨겁게 하지만 동시에 가장 차갑게

미카는 내게 ‘열정’은 교수자보다 학생과 어울릴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강단에서 언제나 뜨거워야 하지만, 동시에 가장 차갑게 사유해야 하는 존재다. 학생들에게 열정을 전하고, 그것으로 그들을 고양하는 역할을 맡고 싶다. 나의 욕심이나 부족함을 열정으로 미화시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얼마 전에는 어느 후배 강사가 나에게 강의평가가 잘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일단 제시간에 수업을 끝내, 하고 답해 주었다. 그는 그게 잘 안 된다며 울상을 지었는데, 왠지 편의점에서 적당한 술과 안주를 사서 자취방으로 울며 들어가던 내가 떠올랐다. 잠시였지만, 그때의 B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다 잘 될 거야, 하고 그를 다독였다.

그러고 보면 미카와 선배 강사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러한 시행착오를 대학의 정규강의에서 겪었을지 모른다. 누군가 교수님은 ‘너무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십니다, 하고 말해 줄 때까지 나를 뒤돌아볼 계기를 쉽게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에선가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히 살아가고 있을 미카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주하게 될 또 다른 미카들을 겸허히 기다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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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309동 1201호
초대필자. 대학강사

지방대 시간강사,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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