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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상상 현실: 헬조선과 꿈꾸지 않는 청년들

4년 전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 멜버른에서 지낼 때 이런 일기를 쓴 적이 있다.

2011년 O월 OO일

난 그동안 한국에서 당위의 세계에서만 살아왔다.
현실은 현실의 세계이고, 당위는 현실과 다르다.
왜 약자가 뭉쳐서 강자에게 대항하지 못하는지 느끼다. 법이고 뭐고 일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
조PD 비밀일기 가사가 떠오름.

호주에 가기 전, 한국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의 4년제 사립대를 다니던 나는 책으로 역사와 사회를 공부하면서 ‘노동자의 권리’ 같은 개념을 책상에 앉아 고민했다.

그러다 백인 사장과 인도인 직원이 절대다수인 멜버른의 어느 패스트푸드점에서 동아시아 출신의 일손 느린 천덕꾸러기 직원이 됐다. 노골적인 무시와 비아냥을 받기 일쑤였지만, 그제야 ‘일자리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느낌을 알게 됐다. 책상머리 위 당위의 세계가 아니라, 힘과 힘이 충돌하는 현실의 세계를 맞닥뜨린 것이다.

현실, 상상 현실, 이중 현실 

시간이 흘러 2015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지금은 어느 기업에서 월급을 받으며 산다. 출근길에 영어를 공부할 정도로 여유도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아주 흥미로운 TED 강연을 보게 됐다. 지구에서 어째서 인간(사피엔스)이 지배자가 되었는지에 관한 이스라엘 학자 유발 하라리의 설명이었다.

 

다른 모든 동물은 의사소통으로 오로지 현실(reality)만 다룹니다. 반면, 인간은 단순한 현실뿐 아니라 의사소통을 거쳐 새로운 현실(new realities), 즉 상상 속 현실(fictional reality)을 창조합니다.

하라리는 이러한 ‘상상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상상 현실’에 대해 수백, 수천만 명이 동의한 덕분에 인간이 대규모 시스템을 세우고 그 속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을 예로 들어보자. 침팬지에게 1천 원, 5천 원, 아니 10만 원 수표를 주더라도 우리는 그 침팬지에게서 바나나를 양보받을 수 없을 것이다. 침팬지에게 지폐는 먹을 수 없는 종이 쪼가리일 뿐이니까. 하지만 인간 사이에는 ‘화폐’와 ‘경제 제도’에 대한 절대적 합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1천 원권 지폐와 바나나를 교환하는 행위가 가능해진다.

침팬지

가치에 관한 얘기를 해보자. 현대적 법률체계의 바탕을 이루는 ‘인권’이라는 가치가 있다. 이것도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고 하라리는 주장한다. 사람의 몸엔 심장, 신장, 두뇌, 호르몬, DNA까지 모두 들어 있지만, 그 어디에도 ‘인권’이라는 것은 들어있지 않다. 인권이 존재하는 곳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다시 말해 상상 현실(fictional realities)일 뿐이다.

이처럼 동물과 달리 상상력을 발휘해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을 두고 하라리는 우리 인간들이 ‘이중 현실'(dual reality)을 사는 것이라 말한다. 이중 현실에 살고 있어서 우리는 종교를 믿고, 도덕관념을 따르고, 법체계를 존중하고, 정치와 경제체제를 세워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가치를 추구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그 꿈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인간은 지금까지 문명을 발전시키고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됐다. 노예는 그저 말할 줄 아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이 상식이던 세상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권을 부여받는다는 것이 상식이 된 세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인권 자유 권리 인간

4년 전 일기와 2015년 현재의 삶 

유발 하라리의 강연을 보다가 불현듯 4년 전 일기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기억의 저편에 밀려나 있었지만, 뭔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그 일기를 굳이 찾아봤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보니 그 시절 내가 끄적였던 ‘당위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하라리가 설명한 ‘이중 현실’과 엇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고, 내 고민은 인류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성 개념들을 포함할 뿐이다. 그러자, 최근 몇 년간 내가 느끼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실망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진 느낌이 들었다.

삶이라는 게 참 미묘하다. 10대 초중반 자아가 형성된 뒤로 우리는 20대 초중반까지 ‘상상 현실'(fictional realities), 혹은 ‘당위의 세계’를 열렬히 추구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고, 인권의 가치를 믿고, 평등이나 복지처럼 사회 제도에 대해 열정을 품는다.

청춘 젊음 젊은이 소녀 석양 꿈 소망 희망

그런데 그 열정이 20대 후반만 되면 확 꺾인다. 88년생인 내가 지금 그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나만 그렇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년배 친구들이 하나둘씩 ‘해도 안 된다’를 체감하고, 하다가 지쳐서 관두고 있다. 심심풀이라고는 하지만 로또를 사는 친구들도 있다.

철저하게 ‘진짜 현실'(reality), 혹은 ‘현실의 세계’에 편입되는 것 같다. 하라리와 내 잡념이 달라지는 지점이 여기다. 그는 ‘화폐와 경제제도’를 인간 상상의 산물로서, 절대적 현실이 아니라 상상 속 현실로 설명한다.

하지만 2015년 한국에서 20대 후반을 맞이하고 있는 내가 느끼기로는 돈과 거기서 나오는 권력이야말로 진짜 현실(reality)이다. 노동자의 권리, 구성원 전체의 복지 따위를 고민하는 ‘당위의 세계’를 초월해 존재하는 ‘현실의 세계’인 것이다.

비밀일기와 짐승의 세계 

4년 전 일기의 마지막 줄엔 조PD의 ‘비밀일기’ 가사가 떠오른다고 적혀 있다. 어떤 가사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아래 가사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자기밖에 몰라 아니 뭘 그리 놀라 끝없이 이기적일 뿐인 나 하지만 우리 사장님의 눈에 띄게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한 단계 내 세계를 넓혀가는 게 내 출세에 발판이 되줄 것인데 주인을 무는 개처럼 때론 나도 은혜를 밟고 올라가야 할 텐데 그게 뭐 어때 다 냉정한 사회에 먹이사슬 속에 피 냄새를 쫓는 하이에나들일 뿐인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간의 세계에서 동물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가치와 당위보다는 돈과 권력이 먼저인 세상으로 말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최근 몇 년간 내가 느끼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실망’의 정체다. 갈수록 이 역행의 시기가 빨리 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뉴스를 보면 인간다움을 쫓아갈 시기인 10대~20대조차 동물, 아니 짐승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잡한 마음이다. 약자를 보듬고 동정하긴 커녕 그들에게 조롱과 패악질을 내뱉는 집단이 있다.

인터넷을 벗어나 그들이 광장에 나왔을 때, 대다수는 20대 청년이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1,000만 원을 사기 친 10대가 붙잡혔고, 10대 남녀 청소년이 합심해서 20대 남성에게 성을 팔고, 그 남성뿐 아니라 그의 부모에게까지 ‘300만 원’ 협박을 하다가 붙잡혔다.

헬조선과 꿈꾸지 않는 청년들 

이런 일이 더는 새로운 뉴스가 아닌 일상이 되면서 나온 말이 ‘헬조선’ 아닐까 싶다. 당위의 세계를 서서히 잊어가고 철저하게 돈과 권력만 좇는 사이, 누군가에게 한국은 지옥이 되어 버렸다.

다시 호주 얘기를 잠깐 하자면, 나는 결국 그 가게에서 해고당했다. 저 일기를 쓰고 딱 일주일 뒤에 당일 해고통보를 받고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는 말을 면전에서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호주는 내가 계속 살 곳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나는 한국에 있다. 점점 당위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 현실의 끝은 절망일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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