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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강사다: 저에게 F 학점을 주세요

‘나는 시간강사다’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시즌2에서는 ‘시간강사’로서의 삶을 돌아보려 합니다. 4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오히려 제가 학생들에게 배운 것이 더 많습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필자)

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10. 저에게 F 학점을 주세요 

강의를 시작한 첫 학기 막바지, 1교시 수업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정각. 그러니까 1교시의 시작과 동시에 나는 일어난 것이다. 꿈인가 싶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세수하고, 면도하고, 옷 걸쳐 입고, 가방을 챙겨, 뛰어나갔다.

시계

차에 올라 시동을 거니 9시 5분이었다. 아마 얼굴에 물만 요란하게 묻히고 닦고, 10초 만에 면도를 끝내고, 늘 입는 옷을 후다닥 입고, 강의 자료가 들어 있는 가방을 기계적으로 들고, 그렇게 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9시 30분에나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반장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수업은 9시 30분에 시작할 테니 공지를 부탁해요.”

차선을 이리저리 바꿔 가며 급하게 차를 몰았다. 신호에 걸리면 백미러를 통해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강의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 학생들을 생각하니, 무척 죄스럽고 민망했다.

늦잠과 변명 궁리  

사실 늦잠을 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다. 예전에 쓴 글(‘사회인 리그‘)에서 나는 어떤 운동모임에 가입했다고 밝혔는데, 그곳에서 그날의 운동이 끝난 후 신입 회원 축하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얼떨결에 따라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말하자면 ‘술’ 때문이다. 1교시 강의 때문에 잠시 갈등했지만, 그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터라 거절하지 못했다.

 

학교가 가까워져 올수록 대체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하는 고민이 깊어졌다.

‘오다가 자동차 사고가 났다고 하면 어떨까?’

‘기름이 떨어져서 보험을 불렀다고 할까?’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석을 부르고 수업을 시작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났다. 그와 동시에 문득 깊은 부끄러움이 찾아 왔다. 나는 사과할 생각보다는 변명거리를 먼저 찾고 있었다. 지금을 수습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 이후 강의실에서 당당하게 학생들과 마주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지금의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자, 그러니까 ‘사과’하자고 마음먹었다.

솔직하게 사과하기로 마음먹다 

강의실 문을 여니, 이미 오랜 시간 기다렸을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교탁 앞에 선 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다들 궁금해했다. 나는 우선 사과했다.

“지각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여기 오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요. 그런데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요.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셨어요. 그리고 늦잠을 잤습니다.”

학생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뭐랄까, 평소에 그다지 갖춰 입고 다니지도 않지만, 뭔가 어수선한 행색을 보고 눈치를 이미 챘는지도 몰랐다. 나는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 성실함을 강요해 놓고, 오히려 제가 지각을 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오늘은 여러분 마음속으로 저에게 F 학점을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학생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과 절망 좌절 슬픔 미안

나로서는 무척 용기를 낸 행동이었는데, 이것이 어떤 화살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의 평점 하락으로 다음 학기 강의 배정을 못 받을 수도 있을 테고, 다른 선배 강사나 지도교수의 귀에 들어가 강의 배정에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나를 어떤 인간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걸렸다.

뜻밖의 반응 

그런데 곧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모두가 잔잔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여러 형태의 비난, 차가운 시선을 각오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의외의 반응에 무척 얼떨떨했다.

“괜찮아요. 교수님.”

“고맙습니다. 교수님.”

몇몇이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울컥해 눈물이 나려 했다.

“오늘 수업은 30분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 날의 주제를 칠판에 적었다.

칭찬 응원 사람들 협동

사과, 단 두 마디면 충분하다 

그동안 나는 사과를 할 때면 ‘그런데’라는 부사를 뒤에 붙여 내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고, 변호해 왔다. 결국 “그게 사과야?” 하는 반응을 끌어내고, “미안하다고 했으면 됐지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해?” 하고 적반하장으로 맞받아쳤다. 지금까지 나는 ‘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 ‘변명’을 했고, ‘핑계’를 대 온 것이다.

내 잘못된 말에 상처받았을 이들이 점점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사과하는 데는 ‘미안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하는 두 마디면 충분한 것이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온전히 사과하는 법에 대해 배웠다.

그러고 보면, 지금 시대에 ‘사과’라는 것은 참 흔한 행위가 되어 버렸다. SNS를 통해 어느 연예인의 사과문이 항상 올라오고, 여러 정치인이 대중매체를 통해 사과 담화를 발표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미안’과 ‘죄송’의 수사를 듣기란 좀처럼 힘든 일이다. 특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는 구절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참 비겁한 표현이다.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하게 생각한다”라고 해서 사과하는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니까 자신을 행위의 주체가 아닌 제3자로 묘사해 뒤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자기 정당화의 과정을 반드시 거치고, 공익과 국익을 위한 결단이었다거나 하는 갖은 핑계를 더해, 당위성까지 스스로 끌어낸다. 우리는 ‘사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사과에 목말라 있다. 나 역시 ‘미안’과 ‘죄송’의 수사가 없는 자기 보호를 위한 사과만 해 온 인간이었다.

‘작심’한 학생 

지난 학기에도 모든 학생에게 사과한 일이 하나 있다. 학생들이 ‘강의실의 실태 조사’라는 제목으로 조별발표를 수행했는데, 강의실에 보드마카가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강의실마다 몇 개의 보드마카가 대개 ‘굴러다니는’데, 가끔 없을 때도 있고, 거의 닳아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중 상태가 좋은 것을 습관처럼 골라 사용해 왔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토론 시간에 손을 들고는 보드마카의 구비 여부는 강의실의 실태 조사에 적합한 항목이 아니라고 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계속 발언을 부탁했는데 그는 물의를 빚을 수 있는 내용이라 그만두겠다고 했다. 한 번 더 부탁하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저는 강의를 위한 필기구를 지참하는 것은 교수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필기구도 없이 강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지금껏 누군가 쓰던 펜이 있을 테니까 하는 생각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한 번은 보드마카가 없어서 반장에게 빈 강의실에서 하나 가져다주기를 부탁하기도 했다. 나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지만, 옅은 미소를 띠고 그 학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고맙습니다.”

협력 우정 퍼즐 퍼블릭 도메인

플러스 점수 드리겠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어떤 선생님들은 칠판 밑에 분필이 없으면 주번을 불러 화를 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좋은 선생님들은 속주머니에서 정갈한 분필 클립을 꺼냈고, 오래 닳아 쓰기 힘든 분필에 보조구까지 달아 판서를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참 보기 좋은 멋스러움이었다. 교수자로서 가르칠 필기구를 직접 준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자세다.

나는 그러한 자세의 당연함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보드마카는 단과대 사무실에서 얼마든지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반드시 제일 좋은 보드마카를 구비해 들어오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M 학생께는 플러스 1점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농담 삼아 말했다.

“지금 책상 위에 필기도구를 꺼내 놓지 않은 학생들께는 F를 드릴 거니까, 혹시 없으시면 빨리 꺼내세요.”

모두가 긴장을 풀고 밝게 웃었고, 나는 그 날의 수업을 마무리했다.

학생 시간강사

진심으로 사과하기 최선을 다해 고치기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에, M 학생을 따로 만나 감사를 전했다. 그가 바로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조금 더 오랫동안 같은 실수를 반복했을 것이다. 학점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용기를 쉽게 낼 수 없었을 텐데, 무척 대견하기도 했다.

나는 이제 강의 전날에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리고 두 가지 색 이상의 보드마카를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닌다. ‘앞으로 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태만에서 비롯된 일이 된다.

물론 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닌 이상, 앞으로도 학생들에게 사과할 일은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겸허히 나의 잘못을 성찰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최선을 다해 고쳐 나가려 한다. 그렇게 조금씩 어제보다 나은 인간으로 강의실에서, 연구실에서,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의 제자들이 ‘죄송’과 ‘미안’이라는 말로 사과할 수 있는 존재로 함께 성장해 준다면, 참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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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309동 1201호
초대필자. 대학강사

지방대 시간강사,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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