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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6. 강의실에 언제나 옳은 존재는 없다

나는 지난 글 몇 편에서 학생의 가능성을 무한히 존중해야 한다고 누차 역설했다. 나는 그들을 ‘지도교수’‘구원자’로까지 표현했다. 그러나 ‘학생이 언제나 옳다’는 감성적인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성장하는 관계에 있다. 교수와 학생 모두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부족함을 상대에게서 채워나가야 한다. 어느 한 편이 자신과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혹은 사유를 멈춰 버리면 그곳을 더는 강의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곳은 죽은 공간이 된다.

나는 학기마다 한 번 이상은 학생을 향해 ‘쓴소리’했다. 그것은 내가 더는 물러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어느 임계에서 이루어졌다. ‘꼰대 짓’이나 ‘훈장질’로 여기는 학생도 물론 있었겠지만,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S#1. “ㅈㄱㄴ”

얼마 전 현직에 계신 고등학교 은사님을 뵐 일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 계속해서 핸드폰 알림음이 울려 잠시 꺼 두려 했다. 학생들에게 이메일로 과제를 제출해 달라고 한 마감일이었다. 30개의 이메일이 마감 시간을 불과 몇 분 앞두고 밀려들었다. 선생님께서 궁금해하시기에 ‘학생들이 이메일로 과제를 제출하고 있다’고 답했다.

마침 방금 도착한 이메일의 미리보기가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몹시 민망했는데, 본문 내용이 ‘ㅈㄱㄴ’였다. “제목이 곧 내용이다”라는 줄임말 ‘제곧내’를 한 번 더 초성만으로 줄여 만든 신조어다. 선생님께 그 뜻을 말씀드리니 씁쓸하게 웃음 지으시며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에서 편지 쓰는 법도 가르쳐서 내보내야 하는 모양이구나.”

얄궂게도, 내게 ‘교학상장’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려 주신 분이었다.

제곧내

40개의 이메일 중 어떤 ‘내용’이 담긴 것은 서너 편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 이름과 학번만 적혀 있었다. 제목을 아예 지정하지 않고 본문도 없이 그저 첨부 파일만 담아 보낸 것도 많았다. 대단한 ‘아양’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교수님 수업을 잘 듣고 있어요’, ‘정말 좋은 수업이에요’, ‘열정적인 강의에 항상 감사합니다’, 이런 서로 민망한 수사는 필요 없다. 그저 우리가 관념적으로 ‘편지글’의 작문법으로 생각하는 최소한을 충족시켜 주면 충분하다.

제목을 쓰고, 적당한 안부를 묻고, 누가 무엇을 제출한다는 내용을 명시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그것이 편지글을 주고받는 서로에 대한 예의다. 그 예의가 교수와 학생 간이라면 형식적으로나마 지켜져야 함은 당연하다. ‘학생 → 교수’가 아니라 “교수 → 학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편지

[대학국어]는 글쓰기 양식을 가르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강의 시간에 나는 ‘ㅈㄱㄴ’의 부적합성에 대해 말했다.

“이메일로 과제를 제출한다는 것은 두 개의 글쓰기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과제라는 글쓰기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평가자에게 가장 먼저 노출되는 텍스트는 이메일이고, 당연히 여러분은 이메일 내용에도 신경을 써야 하죠.

새로운 글쓰기의 형성과 더불어 등장한 여러 ‘실용작문서’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서간문’, 즉 편지글 쓰기입니다. 굳이 편지라는 글쓰기 양식을 상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할 관계가 아닌가요. 대단한 아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제목 쓰고 누가 무엇을 제출한다는 정도를 본문에 남겨주기 바랍니다.”

다음 학기에도 아마 나는 ‘ㅈㄱㄴ’와 대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만한 일로 학생들에게 실망하면 안 된다. 반복되는 실수가 아니라면 그로 인해 감점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독성’만을 추구하는 ‘시대의 글쓰기’에 그들이 오랜 시간 노출되어 온 결과다.

약간 얼굴을 붉혔던 것 같은데, 다음에는 조금 더 즐겁게 ‘쓴소리’하고 싶다.

S#2. “정답이 중요한 게 아니야”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을 몇 차례 마련했다.

학생이 만들어 가는 집단지성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때때로 그것을 확장해 줄 수 있었기에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각자가 토론에 참여한 횟수와 그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했다. ‘상대평가’이기에 모두가 이해할 만한 객관적 데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어서 가끔은 토론이 격해지기도 했다. 반박과 재반박이 이어지며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책상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럴 때면 중재에 나섰다.

한 번은 자기 분을 못 이겨 울먹울먹하다가 모두가 눈치를 봐야 할 만큼 날을 세운 학생 J가 있었는데, 그는 시종일관 자신과 다른 의견에 무조건 냉소적이었다. 그는 훌륭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로 풀어내는 데는 서툴렀다.

토론 학생 수업

우리는 ‘정답’을 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나 역시 학부생 시절에는 정답을 말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나 ‘평가자’ 입장이 돼보니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특히 ‘면대면’ 발화, 즉 토론이나 면접에서 정답은 그다지 중요한 덕목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흔히 상대방을 ‘찍어 누른’ 이를 그 승자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예의 있게 수용하는 것 그리고 그를 반영해 더욱 합리적인 대안에 이르는 것이 ‘이상적인’ 토론자다.

여러 학회에서 발표와 토론을 거듭해 본 좋은 연구자(교수자)라면 자기 실책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또 훌륭한 행위인지 잘 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 싶으면 자기 한계를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그에 더해 상대방 의견을 수용해 관련 공부를 충실히 해 나가겠다고 덧붙이면, 그 어떤 평가자라도 감격할 수밖에 없다. 면접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는 것을 어떻게 안다고 하는지, 모르는 것을 어떻게 모른다고 하는지가 당락을 결정한다. 서류만으로 해도 될 일을 굳이 불러 만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악수 협력 협동 손 퍼즐

나는 토론을 잠시 중단시켰다.

그리고 모두에게, 무엇보다도 J에게 ‘토론’의 덕목이 어디에 있는지를 일러 주었다. 아마 그리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정답을 말하고 점수를 획득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정답이든 오답이든, 그에 대처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함을 모두가 언젠가 체험하게 될 것이다.

J는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진 학생 중 한 명이다. 그가 ‘정답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나보다 어린 나이에 성찰할 수 있길 바란다.

S#3. “저희 MT갑니다” 

학기 초마다 학과 MT를 이유로 휴강을 요청받는 때가 종종 있다.

동일 분반 위주로 학생이 구성된 경우에는 수업을 강행해도 학생 대부분이 출석하지 않는다. 애초에 수업이 불가능하기에 웬만하면 휴강을 승인해 주고 보강을 한다. 그런데 작년에 담당한 어느 특정 분반의 경우 금요일 오전 9시에 모여 1박 2일의 MT를 떠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MT에 참여한 학과 구성원 모두가 하루 치 수업을 반납한 것이다.

나는 금요일 1~2교시 수업이었는데, 휴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학부 시절에 나 역시 학생회를 했지만, 금요일에 MT를 잡으면 대개 점심 이후에 출발하거나 전공 마지막 수업에 맞춰 후발대를 구성하는 것으로 일정을 꾸렸다. 수업이 있는 평일 오전부터 MT를 떠난다는 건, 명백히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행위였다.

엠티 여자 자유 여행 환희

그런데 이번 학기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같은 분반의 수업을 지난해에 이어 맡게 되었는데, 역시나 금요일 오전 9시부터 MT 일정이 시작된다며 휴강을 요청했다. 나는 해당 학과 학생회와 면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나는 학부생 시절 거의 모든 MT에 참여했다. 첫 MT에서 어느 여학생과 함께 강가에 앉아 말없이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좁은 방에 둘러앉아 즐겁게 했던 여러 게임의 분위기와 질감이 아직 생생하다. 그 여학생은 불과 며칠 후 어느 동기의 팔짱을 끼고 나타나 내가 자연스레 중간고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줬다. 내가 첫 학기부터 장학금을 받은 가장 직접적인 이유다.

MT는 내 인생 어느 한 켠의 소중한 추억이다. 나는 모두에게 참여를 권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그 무엇도 학생의 ‘수업권’을 빼앗을 수는 없다. 어느 집단이든 자신의 존재가치를 위해 최후까지 지켜내야 할 보루가 있는데, 대학생인 경우에는 ‘수업’이다.

학생회라는 학생자치기구가 스스로 수업권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나는 몹시 실망스러웠다. 그런 의사 결정에 따라 1학년 학생들은 수업과 MT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학생회는 1학년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했다.

시간강사 빈 강의실 대학

나는 이번 학기 역시 휴강했다.

즐거워하는 제자들에게 재미있게 다녀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들이 MT에서 돌아오면 다음과 같은 말을 꼭 해주려 한다.

“학생의 수업권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으며 끝까지 사수해야 하는 소중한 권리입니다. 만일 학교가 그 어떠한 이유로든 여러분의 수업권을 훼손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참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스로 그 가치를 훼손한다?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온전히 피해자이지만, 1년이나 2년 후에는 학생자치기구의 의사 결정권자가 됩니다. 그때 다시 지금과 같은 결정을 내린다면 저는 무척 실망할 것입니다.”

내가 내년에도 다시 같은 반을 맡을 확률은 희박하지만, 작은 변화를 기대하며 관심 두고 지켜보려 한다.

학생이 항상 옳진 않다 교수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가 지방의 거의 모든 학교를 ‘지잡대’로 통칭한다.

그곳은 좌절과 자기 검열, 무력감의 재생산이 일상화한 공간이다. 그런데 그 구성원이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대상은 지방이라는 좌표점 그 자체가 아니다. 명문대에서든 지방대에서든, 누구나 실수를 한다. 다만 얼마나 스스로의 가치와 권리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가 진짜 문제다.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다면, 비로소 ‘명문/지잡’의 분류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제자들이 그러한 성찰에 다다를 수 있길 바란다. 그저 수많은 인문학 교양 수업 중 하나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에게 건강하게 사유하고 성찰할 가능성을 열어 주고 싶다.

얼마 전 내 연재를 읽고 있는 어느 연구자께서 연락해 왔다.

“나는 학생들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나 역시 그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교수 역시 항상 옳은 존재는 아니다.

강의실에서는 언제나 옳은 존재도, 언제나 그른 존재도 없다. 교수와 학생은 서로에게 ‘을’이 아니다. 상대방을 ‘갑’으로 존중하며 지식과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자유롭게 펼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러한 성숙한 인간으로 강의실에 서고 있는가는 스스로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야 한다고 믿으며 오늘도 강의실의 문을 연다.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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