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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점점 더 지갑은 가벼워지지만, 쌓아놓은 물건은 많아집니다. 월급 타면 꼭 하나 사고 싶었던 ‘명품’과 각종 폭탄세일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모든 욕망과 유혹의 틈 속에서 ‘가볍게 살기’ 위한 노하우를 독자와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box]

대학 시절 인류학 수업시간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로 추정되는 인류가 뗏목을 만들어 물을 건너고 지구를 열심히 여행해서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는 다큐멘터리를 무척 흥미롭게 보았다. 여행이란 우리 유전자 안에 깊숙이 각인된 본능과도 같은 것.

인류가 정착생활을 한 지 수없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떠난다. 휴가가 생겨서, 일상이 지루해서, 휴식이 필요하거나 어떤 이유로든 떠난다. 떠나는 것은 설레는 것이고, 이왕이면 가볍게 떠나고 싶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곳보다는 익숙한 곳에서의 편안함이 좋아졌다. 모든 것이 낯선 여행지보다 마치 제2의 고향 같고, 내 영혼을 위한 곳(일명 ‘소울 시티’)에서의 느긋한 여유.

나만의 여행 방법 만들기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듯이 여행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그래서 가끔은 동행을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나 홀로 여행을 떠난다. 혼자일수록 떠나기 전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나만의 가이드북을 만드는데, 그날의 일정과 비용 등을 미리 책정해서 여행지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정리해둔다. 이렇게 만들어진 파일들은 나중에 같거나 비슷한 여행지로 떠날 때 참고용으로 활용할 수 있다.

두꺼운 가이드북을 책장에 빽빽하게 보관하거나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최신 가이드북이 인쇄되는 속도보다 더 빠른 온라인 여행자 커뮤니티에서 얻은 실시간 정보를 쉽게 추가할 수 있다. 덧붙여 해당 여행지의 여행 팁을 묻는 친구를 위해 파일을 공유해 주고, 혼자 떠나는 나를 걱정하는 가족을 위해 행선지와 숙소 및 전화번호를 별도로 적어서 남길 수고를 덜 수 있다.

깃털

내 영혼을 위해 짐은 깃털처럼 가볍게 

갈아입을 옷 단 한 벌만 배낭에 넣고 훌쩍 떠나는 것은 아직 해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로 생각지 않는다. 여행지의 습기 찬 기후에 제대로 갈아입을 옷 하나도 없는 상황에 부닥치는 것이 더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자 보험보다 더 안심되는 비상약도 꼭 필요하다. 낯선 곳에 가면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떠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1.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서도 짐을 가볍게 챙길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동안 해왔던 두 가지를 멈췄기 때문이다.

우선, 면세점에서 1년 치 화장품을 미리 사들이는 걸 멈췄다.
더불어, 관광지에서 싸구려 기념품을 더는 사지 않는다.

2. 내 여행 준비물 목록

  • 평소 필요한 절반 정도의 (속)옷
  • 여벌의 신발
  • 비상약
  • 소분해서 담은 화장품 약간
  • 작은 태블릿 PC  (여기엔 아래 준비물이 담긴다)
    • 내가 직접 계획한 여행 일정
    • 전자 항공권
    • 온갖 바우처
    • 휴가지에서 읽을 전자책

3. 지금 당장 버려도 좋을 헌 옷과 함께  

휴가지에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식 여행 가방을 좋아한다. 그는 에세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서 여행 준비의 핵심은 짐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버려도 아쉽지 않을 티셔츠, 양말, 속옷들을 모아 떠난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여행 중 빨래하는 수고도 덜고 짐도 줄일 수 있는데 그때마다 가벼워지는 느낌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빨래가 필요한 옷은 가볍게 손세탁해서 목욕 수건에 둘둘 말아 꾹꾹 눌러주며 물기를 제거하면 빨리 건조된다. 하루키가 알려주고 나도 실천해본 효과 만점의 방법이다.

4. 비누 하나면 족하다 

액체 또는 젤류인 화장품은 무거운 짐의 원흉이다. 중·고급 호텔에는 어메니티(Amenity; 호텔이 무료로 준비한 각종 소모품과 서비스용품)로 샴푸부터 보디워시, 비누까지 모두 제공해 주므로 그걸 활용하면 된다. 아무래도 품질에 신뢰가 안 간다면 현지에서 비누 하나만 사면 족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차피 비누의 목적은 뻔하다는 것을.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남은 비누는 다음 사람이나 혹은 누군가를 위해 기부하고 오면 된다.

5. ‘예레기’는 금물 

여행지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기분파’로 변신하는 것. 들뜬 마음에 아무 물건이나 사는 걸 그만두는 편이 가벼운 여행을 사수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모 여행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예레기(예쁜 쓰레기)’라며 자신이 여행지에서 사 온 물건들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아, 나도 8년 전에는 한 달 만에 고장 나 버린 싸구려 신발이나 장식 목적 외에는 아무런 기능도 없는 장식품 같은 것을 사오곤 했지.’

사실 그런 조잡한 물건들의 유효 기간은 너무 짧아 여행의 여운이 사라짐과 동시에 끝나버린다.

여행 짐이 가벼우면 이동하기 쉽고, 짐을 챙기기 쉬우며, 덜 피곤하다. 또 어쩌다 여행 가방을 잃어버려도 금방 훌훌 털어낼 수 있다.

여행이 특별해지는 순간 

여행지의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저장해 두려고 하는 것보다 어느 순간부터 사진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무언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여행 기록을 글로 남긴다. 그 순간에 많은 생각에 잠기거나 아무런 생각이 없어도 무언가를 끄적이며 여행한다. 그러다 어떤 장소가 특별해지는 것은 모두가 추천하는 엄청난 문화유산이나 자연경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장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생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면 몸이 시차에 적응하려 애쓰는 중에도 영혼이 아직 여행지에 있는 일이 생긴다. 그러다 여행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데 그건 어쩔 수 없다. 언젠가는 끝나겠지. 물론 우울한 마음을 붙잡고 새로운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도 방법이다.

떠날 수 있을 때, 다시 떠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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