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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슬로우뉴스가 연재하는 시리즈 ‘부엉이 날다’는 최근 학계에서 나온 흥미로운 연구를 독자에게 전해 드리려는 취지로 마련되었습니다. 시리즈 제목 ‘부엉이 날다’는 헤겔의 <법철학> 서설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현실에 뒤처져 가는 학문은 굼뜬 부엉이처럼 느린 존재라 할 수 있지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임은 틀림없습니다. 느리게 날아오른 부엉이가 어떤 지혜를 줄지 함께 따라가 봅니다. (편집자)[/box]

국적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게 된다. 귀화 등을 통해 국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세계인 대부분은 태어날 때 주어진 국적에 평생 종속된다. 한 개인이 어떤 나라에 태어날 것인가는, 어떤 부모에게 태어날 것인가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운이 좌우한다.

나뉘어진 세계: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빈부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계급간 이동이 더 어려워지며 각종 사회적 자원의 세습 현상이 강화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라는 레이스의 출발점 자체가 달라진다. 어떤 나라에서 태어나느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미국도 소득 불균형이 심해지면서 모든 것을 가진 1%와 그렇지 못한 99%의 갈등 구조가 존재하지만, 세계 차원에서 보자면, 1%의 독식을 규탄하는 99%의 미국인 중 상당수도 1%에 속하는 최상류층이다.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가 쓴 책 <가진 자와 못 가진 자(The Haves and the Have-Nots)>에 따르면, 세계인 중 상위 10%에 속하기 위해서는 연소득이 1만 2천 달러, 1%는 3만 4천 달러면 된다. 이 기준으로 보면 미국인의 80% 정도가 상위 10%에 속하며, 1%에 들어가는 사람은 40% 이상이다. 산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에서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세계적인 특권층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 된다. (물론 이와 같은 세계 차원의 비교는, 한 경제 단위 안에서 분배 구조의 왜곡과 불균형을 지적하는 의미로서의 1 대 99 격차와는 그 뜻이 좀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은, 미국이나 북유럽 국가와 같이 부유한 나라에 사는 개인들의 소득 중 90%가 사회경제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덕분에 나온다고 설명한다. 개인 소득 중 절대적인 부분이 국가 시스템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배경과 능력, 부지런함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떤 나라에 태어나 사느냐에 따라 소득이 천양지차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래서 사이먼은 “윤리적으로 말하자면, 90%에 이르는 소득세를 부과해도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어디에서 태어나느냐는 이렇게 중요하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는 없다. 목숨을 잃을 불안에 떨며 매일 몇 km를 맨발로 걸어 오가며 학교에 다녀야 하는 우간다나, 해적이 되는 것이 유일한 유망 직업으로 인식되는 소말리아 같은 나라에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불공평한 세상에 공평하게 태어난다.

(내전에 시달리는 콩고민주공화국 난민. CC by United Nations Photo)

살기 힘든 독재 국가에서도 어차피 사람이 태어나 살아야 한다면, 그 중에서 좀 나은 곳도 있지 않을까. 개인의 자유나 안녕을 챙겨주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살기가 좀 수월한 나라들이 있지 않을까. 스웨덴의 정치학자 두 사람은 이런 문제를 풀어 보았다.

권위주의 국가라고 다 같진 않다

이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권위주의 체제들에서 ‘정부의 품질(quality of government)’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를 조사했다. 정부 통치가 얼마나 효율적인가는 국민의 삶의 질이나 경제적 풍요함과 직결되는 요소다. 연구자들이 정부의 품질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은 것은 △부패의 정도 △공공 관료의 효율성 △법 체계의 공평성 △개인의 재산권에 대한 보장 정도 등이다. 분석 대상 국가는 1983~2003년 기간에 나타난 세계 70개 권위주의 체제다. 이를 △왕이 다스리는 군주국 △군인이나 군 출신이 독재하는 군사 정부 △한 정당만이 존재하며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국가 △개인에 권력이 집중된 개인독재 국가 등의 넷으로 구분했다.

분석 결과, 권위주의 체제 중에서 가장 나은 통치력을 보인 국가들은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일당 국가였다. 이 국가들에서는 경제 수준이 올라가면서 부패가 줄어들고 공공 서비스가 개선되는 등, 정부의 품질도 함께 향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당 국가에서 통치력이 상대적으로 나은 것으로 나온 이유는, 정부의 효율성을 요구하는 국민 목소리가 일정 정도 반영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왕이나 일인 독재자가 지배하는 체제에 비해 일당 국가는 통치 시스템이 국민에 근접해 있고,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으로부터 동의나 지지를 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 통치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개인독재 국가나, 내부 분파 간의 권력 투쟁에 더 관심이 있는 군사 정부는 국민에게서 나오는 요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모든 민주 국가가 같지 않듯이, 모든 권위주의 국가도 같지 않고, 그 중에는 비교적 상황이 나은 나라도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민주 국가 멕시코보다 바로 옆의 권위주의 국가 쿠바가 반부패 지수가 더 높다. 그렇다고 해서 쿠바의 국민이 되고 싶을까. 어쨌든 그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해당 연구의 대상이 된 70개 권위주의 국가에는 당연히 북한이 들어가 있는데, 한국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것은 분석 기간이 1983년부터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장군이 통치하는 군사 정부였다. 군사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누구보다도 감사해야 할 사람은 오늘날의 부자들인지도 모른다. 체제의 성격이 개인 소득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허버트 사이먼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물론 권위주의 체제의 비호 덕분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이들, 이를테면 재벌은 여기서 예외라고 하겠다.

(이번 기사의 부엉이: Charron, N., & Lapuente, V. (2011). Which dictators produce quality of government? Studies in Comparative International Development, 46(4), 397-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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