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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2. 30명의 지도교수

두려움과 준비부족을 이유로 강의 제의를 고사하고 나는 자존감이 무척 떨어져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선배 강사의 말에 나는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네가 10년 가까이 해온 공부다.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핑계다.

돌이켜 보니 연구실에서 보낸 내 지난 삶이 그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 강의실에서 도피하는 것은 나를 가르친 여러 은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무엇보다도 내 과거에 대한 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의 제의가 온다면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었다. 그에 더해 교수자로서 나에 대한 판단은 학생에게 모두 맡기기로 했다.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참여한 10점 만점의 강의평가 결과가 나온다. 8점 밑으로 점수를 받으면 어차피 강의 자격을 박탈당할 테지만, 평균 이하 점수가 나오면 떠나기로 스스로 약속했다. 강의하며 행복하지 않다면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나를 위한 선택일 것이다.

시간강사 빈 강의실 대학

또 한 번의 기회 

학기가 마무리될 무렵, 조교실장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내게 다음 학기의 ‘대학국어’ 강의를 맡아줄 수 있는가 물었다. 학부 1학년 수업이다. 제의를 고사한 괘씸죄로 당분간 강의와 인연이 없을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계속 있었으나 다시 한 번 운이 좋았다. 기쁨과 걱정이 교차했지만, 이번에는 담담히 용기를 냈다.

네, 할게요.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학과사무실로 올라갔다. 조교실장을 만나 강의시간표를 받고, 사번을 등록하고, 학기 일정표 같은 것을 확인했다. 강의 순번에 따라 막내인 내가 목요일과 금요일 시간표를 받았지만,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학과사무실에서 나와 지도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그동안 논문지도를 받을 때가 아니면 사적으로는 거의 찾아뵙지 않았는데, 꼭 드릴 말씀이 있었다. 강의하게 된 데는 지도교수의 후의가 반드시 있을 것이어서 그에 대한 인사를 먼저 드리고 싶었고, 논문에 대해서도 상의드릴 것이 있었다.

지도교수는 “이제 OO가 선생님이 되었구나” 하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나는 기회를 보아 ‘다음 학기는 강의 준비 때문에 논문을 쓰는 것이 많이 힘들 것 같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지도교수가 먼저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아마 다음 학기는 강의를 처음 시작했으니 논문 쓰기가 많이 힘들 거야, 괜찮으니 강의부터 열심히 준비하렴.

나를 잘 알아서였을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으레 해주는 말이었을까, 어느 쪽이었든 인사하고 연구실 문을 닫으며 무척 감사하고 홀가분했다.

기차 설렘 두려움 출발 시간강사

2013년 봄, 강의실에 서다 

두 달여의 시간이 흘러 2013년 봄, 나는 강의실 문 앞에 섰다. 문을 열면 30여 명의 첫 제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넥타이를 다시 정갈하게 고치고, 바지도 손을 내어 툭툭 털고, 아침에 새로 닦은 구두가 더럽지 않은 지 눈길을 주고, 심호흡을 한 번 얕게 한 후 문을 열었다. 단일 분반으로 구성된 1학년 학생들은 어느새 친해져 서로 시끌시끌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강단을 향해 가자 모두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그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 인사하고 출석부를 꺼내 출석을 불렀다. 학생들은 밝게 대답했고, 나는 이름을 천천히 힘주어 불러 나갔다. 그리고 소개를 하기 위해 전날 밤늦게까지 주저리주저리 쓴 A4 용지 두 장 가득한 내 자기소개를 꺼내다가 그만두었다. 그보다는 지금의 감정을 솔직하게 짧게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였다.

저는 이번 학기부터 처음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처음이겠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서로 서툰 것이 많겠지만 좋은 수업을 만들어 봅시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략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다행히 모두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몇몇은 작게 박수를 쳤다. 나는 수업계획표를 나누어 주었다.

시간강사 약속 스케줄 체크

여섯 가지 약속 

한 학기 가까이 강의 준비를 하며, 교재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에 더해 나름의 강의 ‘기준’을 세우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 그간 학부와 대학원의 여러 수업에서 느꼈던 아쉬운 부분들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학부생이었을 때 어떤 수업을 원했던가, 하고 돌이켜 보았다. 과제, 출결, 교수자의 태도나 강의 언어, 조별과제, 시험 문제 등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고민 끝에 스스로 약속한 바를 몇 가지 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학생들은 내 수업만 듣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의 수업을 준비하고 감당하면 되지만, 학생들은 18~21학점의 수업을 듣는다. 내가 욕심을 내면 모든 학생이 따라올 수 없다. 나도 학부생 시절 과제를 ‘폭격’하는 교수님께 ‘이 수업만 듣는 게 아니에요’ 혼잣말을 한 기억이 있다. 성실히 수업하되, 서로 즐겁게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만큼의 커리큘럼을 구성하고 그에 따르고자 했다. ‘글쓰기’는 부담이 되는 순간 재미없는 행위가 된다.

둘째, 강의 시간과 쉬는 시간 지키기 

내가 집중력이 좋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그 어떤 좋은 수업도 50분이 넘어가면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3시간의 연강을 강행하거나, 쉬는 시간을 무시하는 교수자들이 많다. 자신의 강의에 도취되거나 맥을 끊기 힘든 부분이 있겠지만, 그것을 조절하는 것 역시 중요한 능력이다.

열정으로 미화시키면 안 된다. 교안을 철저히 준비해 50분 강의, 10분 쉬는 시간, 다시 50분 강의를 엄수하고자 했다. 반장을 선출하고 그에게 역할을 주었는데, 내가 혹시 1분 이상 넘겨 강의를 계속하고 있으면, 손을 들고 쉬는 시간이라고 말해달라고 했다. 예의없는 행동으로 생각해 그러지 못할 것을 걱정해 나는 그러면 플러스 점수를 주겠노라고 했다.

셋째, 내 언어가 아닌 그들 언어로 이야기하기

‘연구자의 언어’가 있다. 논문이나 학회에서 사용되는 단어와 표현, 학생들은 그런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듣기만 해도 눈이 감기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화법을 가진 교수자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언어로만 이야기하거나, 혹은 1차 텍스트의 언어로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쉬운 강의’를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실 어떤 텍스트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가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3시간의 수업을 위해 내가 준비한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넷째, 내 말을 줄이고 학생들 말 듣기

강의에 필요한 최소한의 말을 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주로 들었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노력했고, 어떤 의견이더라도 의미를 찾아 확장해 주고자 했다.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사유할 것을 부탁했고, 좋은 의견이나 해석을 제시한 학생에게는 언제나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다섯째, 결석계 받지 않기

결석을 하면 보통 결석계를 제출하게 되는데, 발행 주체가 필요하다. 학과사무실, 단과대학생회, 동아리연합회, 혹은 병원과 같은 공식 기관에서 발행받아야 한다. 하지만 가벼운 통증이라든가, 말할 수 없는 개인 사정 등으로 인해 결석계를 발행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결석계를 받지 않는 대신 한 학기에 두 번의 결석은 감점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결석계를 발행하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거나 교수자에게 이유를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없도록, 두 번의 결석에 자기선택권을 주었다. 학기 내내 성실히 수업을 듣던 여학생이 결석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 생신이어서 서울에 가서 함께 하느라 결석 프리패스를 썼어요. 고맙습니다.”

“그래 잘했다.”

자유로운 출결제도를 운영하는 대신 세 번째 결석부터는 많은 감점을 부여했다.

여섯째,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기

나는 고등학교 시절 번호로 불리는 것이 무척 싫었다. 1년이 마무리될 때까지 반장과 부반장의 이름만 기억하는 교사들이 참 많았다. 대학에 와서도 출석부가 없으면 누구도 호명하지 못하는 교수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100명 이상의 대형 강의에서는 학생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50명 이하의 중형 강의만 되어도 어렵지 않다.

나는 2주 안에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외워 출석부가 필요 없도록 하려 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작은 예의이자, 모두가 참여하는 수업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내 강의 기준은 여섯 가지 다짐과 약속

이 여섯 개의 약속을 내 강의 기준으로 삼았다. 내가 내 방식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일 뿐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강의하며 학생들의 반응에 따라 계속해서 수정해 나갈 것이고, 누군가 더 좋은 방안을 제시해 준다면 언제든 반영할 것이다.

한 시간 정도 함께 수업계획서를 살펴보고, 나는 학생들과의 첫 대면을 마무리했다. 강의실을 나서면서는 한결 감정이 차분해 져 있었다. 걱정한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린다거나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목소리가 갈라지진 않았다. 적당한 설렘과 긴장 그리고 두려움이 함께 했다. 그래도 역시 가장 큰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단순히 내 ‘부족함’에서 왔다고 생각했는데 강의 3년 차가 된 지금도 강단에 서면 여전히 두렵다.

학생 시간강사

학생은 가장 두려운 30명의 지도교수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은 언제나 두려운 존재다. 30명의 지도교수 앞에 서는 기분으로 오늘도 강의실에 들어간다. 그 두려움의 실체는 강의를 잘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나의 연약함 때문일 수 있다. 그 두려움과 부담감은 학생을 ‘을’이 아닌 ‘갑’으로 보는 데서 온다.

나는 내 전공분야에서 조금 더 알고 가르치고 있을 뿐, 학생들은 나보다 더 독특한 시각으로 여러 문제를 대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줄 안다. 그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자 다양함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모든 인문학은 어느 개인의 성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집단 지성 속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강의 2주차에 일어난 어떤 사건 이후, 나는 학생들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무척 값진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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