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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에이지의 문학론과 오타쿠론 보충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북바이북, 2015년)는 오타쿠 문화의 변화, 순문학의 죽음과 이야기의 탄생, 창작과 프로파간다의 관계 등에 대한 견해를 담은 책으로 선정우와 오쓰카 에이지의 대담집입니다.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이라면 경향신문에 쓴 김봉석의 리뷰씨네21에 쓴 이다혜의 리뷰를 참고하는 것도 좋습니다. (편집자)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일본의 비평가 겸 스토리작가 오쓰카 에이지와의 인터뷰 책인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를 지난 2015년 4월 말에 출간했다. 나로서는 2002년 1월에 냈던 책 이후 13년 만의 저서(공저 형태이지만)였다. 아직 출간된 지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조금씩 이 책에 대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그 중 몇 가지 반응에 대해 답변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오쓰카 에이지와 순문학 논쟁

우선, 소설가 장정일 씨의 평가 중에서 ‘순문학’ 관련된 내용에 관해 설명을 하고 싶다((참고: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 블로그). 장정일 씨의 평 자체는, 혹시라도 직접 어떤 형태로든 발표하실지도 모르니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어차피 책의 제목에 ‘순문학’이라고 쓰여있는 것치고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많지 않다는 반응은 장정일 씨 외에도 또 있었으니, 그에 대한 전체적인 보충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미지 출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오쓰카 에이지 (이미지 출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간단히 말해, 오쓰카 에이지의 순문학론은 이 책에서 단순하게 다룰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그럴 것이 아니라 그냥 그가 쓴 ‘문학론’의 저서가 이미 있으니까, 그 한국어 번역판이 나오면 된다는 것이 내 답변이다. 애당초 이 인터뷰는, 책에서 이미 언급했듯 오쓰카 에이지의 ‘방한 기간 중의 남는 시간’에 진행했던 것이었다. 그나마도 절반 정도만 먼저 진행했다가,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추가로 더 묻고 싶은 내용이 떠올라서 급거 밤중에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추가 인터뷰 약속을 잡았던 것이었다.

그만큼 예정에 없이 진행되었다 보니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던 3가지 분야에 대해서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1. 오쓰카 에이지 본인의 작품(1993년 발표된 [JAPAN]이란 만화)을 통한, ‘픽션과 프로파간다’의 문제에 대한 질문
  2. 일본 출판계/만화계의 현실
  3. 당시 번역판 출간을 추진하고자 하고 있던 『스토리 메이커』를 비롯한 오쓰카 에이지 스토리텔링 작법론에 대한 질문

(더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 이것만 가지고도 이틀간 몇 시간 넘게 시간이 걸렸다.)

책에 실려 있는 “오쓰카 에이지는 누구인가”란 원고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오쓰카 에이지는 워낙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써온 인물이다.

오쓰카 에이지의 평론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다방면에 걸친 평론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중략) 그는 [서브컬처 문학론], 『갱신기의 문학』 등의 문예론, 『그녀들의 연합적군』과 같은 페미니즘론, 『전후 민주주의의 리허빌리테이션』, 『전후 민주주의의 황혼』과 같은 전후 민주주의론, 『전후 만화의 표현 공간』, 『아톰의 명제』 등의 만화론, 『소녀들의 ‘귀여운’ 천황』 등 전후 일본론, 『버려진 아이들의 민속학』, 『공민의 민속학』 등 민속학론, 『헌법력』, 『호헌파가 말하는 개헌론』 등의 헌법론, 『이야기 체조』, 『스토리 메이커』 등 창작 및 작법론 등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저서를 집필해왔다. 공저서로 『재패니메이션은 어째서 패배하는가』, 『자위대 이라크 파병 중단 소송 판결문을 읽다』, 『천황과 일본의 내셔널리즘(미야다이 신지, 진보 데쓰오와의 대담집)』, 『리얼의 행방―오타쿠는 어떻게 살 것인가(아즈마 히로키와의 대담집)』 등도 출간했다.

– “오쓰카 에이지는 누구인가”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북바이북, 2015년)

따라서 어차피 한두 번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지금까지 활동해온 내용 전부를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쓰카 에이지의 순문학 논쟁 관련 글이라면 소설가 쇼노 요리코의 비판(사실상의 비난?)을 받고 그에 응답하여 쓴 [불량 채권으로서의 ‘문학’] (일본의 문예잡지 『군상(군조)』 2002년 6월호 게재)이란 글이 잘 알려졌지만, 이 글은 쇼노 요리코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 실린 것이라 단독으로서는 그다지 의미가 크지 않다고 본다.

그보다 오쓰카 에이지의 ‘문학론’이 하루빨리 한국에도 번역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은 것인데, 물론 일본의 비평서가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출판계와 독자들의 현실을 볼 때 쉽지 않은 일이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당사자가 열심히 책을 써서 다 만들어놓았는데 그걸 놔두고 단편적인 내용만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은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의 ‘문학론’은 다음 두 책이 대표적이 아닌가 한다. 각 서적의 목차와 출판사에서 만든 책 소개문을 번역해보았다.

서브컬처 문학론

[문학계] 1998년 4월호~2000년 8월호 연재/단행본 출간:아사히신문사 2004년

문학의 기준, 서브컬처의 윤리. 과거 에토 준이 나눈 ‘서브컬처/문학’의 경계선을 독자적인 구상 속에 이어받아, 문학사를 알아보기 힘들어진 현재의 문학에, 확실한 계보와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는 획기적 논고.

차례

  • 서문: “이것이 서브컬처다”라고 하는 것
  • 에토 준과 ‘서브컬처’로서의 전후(戰後)
  •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있어서의 ‘일본’과 ‘일본어’
  • 만화는 어떻게 하여 문학이 되고자 했으며, 문학은 어떻게 하여 만화가 되지 못했는가
  •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째서 ‘수수께끼 책’을 유발하는가
  • 요시모토 바나나와 기호적인 일본어에 의한 소설의 가능성
  • 겐토샤 문학론 (혹은 하늘에 침 뱉는 소설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
  • 야마다 에이미와 라이너스의 담요
  • ‘이야기’와 ‘나’의 어긋남을 ‘이야기한다’는 것
  • 쇼지 가오루는 데렉 하트필드인가
  • 캐릭터 소설의 기원, 기원의 캐릭터 소설
  • 고베 지진 문학론
  • 미시마 유키오와 디즈니랜드
  • 『태양의 계절』은 어째서 ‘서브컬처’ 문학이 아닌가
  • 이시하라 신타로와 ‘보지 말라는 금지’
  • 가구(假構)와 윤리─오에 겐자부로와 3명의 자살자에 관하여

갱신기의 문학

[와세다 문학] 2004년 5월호~2005년 5월호 연재/단행본 출간:슌주샤 2005년

‘문학’을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근대’를 어째서 옹호해야만 하는가. ‘갱신기의 문학’이란 현상 인식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처방전은 ‘새로운 말’의 소재를 밝히거나, 포스트모던적 태도의 시범을 보이거나, 2차 창작을 쉽게 행할 수 있는 ‘커먼즈(Commons)’ 만들기 등이 전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와 같은 ‘근대적 언설’의 잠정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재구축을 제언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문학’에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변화란 무엇인가. 인터넷상의 ‘와타시가타리(私語り)’(주1)는 물론이고 문학의 공공성에 대해서까지, 비평 정신으로 꿰뚫는 한 권.

차례

  • 제1장 문제점은 전달됩니까
  • 제2장 체조로부터 엔진으로
  • 제3장 ‘잠정적인 문학’들에
  • 제4장 서브컬처 주의의 파시즘적 리스크
  • 제5장 근대적 언설(言說)의 패밀리 로망스적 편차
  • 제6장 ‘익명화하는 문학’과 ‘공공의 문학’
  • 제7장 다시 한 번 ‘불량채권으로서의 문학’을 향하여

특히 [서브컬처 문학론]은 하드커버 67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원래 일본의 대표적 문예잡지(소위 ‘5대 문예지’) 중 하나인 [문학계] (문예춘추사 발행)에 연재되었던 칼럼이었다. 오쓰카에 따르면, “[문학계] 지상에서 이시하라 신타로의 문학에 대해 다루려고 했더니만, 당시 편집장의 의향으로 해당 원고의 집필 이전에 게재를 거부당하는 바람에 연재가 중단된 채로 남아 있던 [서브컬처 문학론]”이라고 한다. (아마도 “[태양의 계절]은 어째서 ‘서브컬처’ 문학이 아닌가”와 “이시하라 신타로와 ‘보지 말라는 금지’” 파트가 그때 [문학계]로부터 거부당한 내용이 아닐까?)

그 밖에도 [전후 민주주의의 리허빌리테이션─논단에서 나는 무엇을 말했는가] (2001년)이나 [에토 준과 소녀 페미니즘적 전후(戰後)─서브컬처 문학론 서장] (2001년), [무라카미 하루키론─서브컬처와 윤리] (2006년),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구조밖에 없는 일본] (2009년) 등을 통해 오쓰카 에이지의 문학론의 일단을 살펴볼 수가 있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어째서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에 순문학 논쟁에 관련된 내용이 적은가 하면 오쓰카 에이지가 이미 다른 책에 그 내용을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썼기 때문’이다. 또 인터뷰어인 나 자신이 문학 연구자도 아니고, 문학 분야에 대해 그 이상 질문할 내용이 딱히 더 있진 않았다. 나로선 한정된 시간 안에 더 관심사인 오타쿠나 서브컬처 분야에 대한 질문을 더 묻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다른 책들’이 번역되지 못하는 현실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도 아즈마 히로키의 저서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문학동네, 2007년)만 나왔을 때(참고로 이 책도 내가 에이전트를 맡아 계약을 중개했다), “아즈마 히로키가 서브컬처(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만이 아니라 다른 내용에 대해서도 써주기를 바란다”는 식의 반응이 나왔던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정작 아즈마 히로키가 쓴 본격적인 서브컬처 관련 평론서는 오직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현실문화연구, 2012년) 두 권뿐이다. (다만, 다른 책에도 서브컬처 관련 내용이 일부 나오긴 한다.) 한국에 그의 서브컬처 평론서만이 번역되었을 뿐이지, 그의 다른 저서에는 [존재론적, 우편적─자크 데리다에 관하여] (1998년)라든지 [일반의지 2.0─루소, 프로이트, 구글] (2011년), [사이버스페이스는 어째서 그렇게 불리는가] (2011년) 등 철학이나 IT를 통한 미래 사회의 예견서가 더 많다.

일본의 다른 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해당 저자의 주된 저서가 번역되지 않은 경우나, 혹은 많은 저서 중 극히 일부만 번역된 사례는 얼마든지 더 들 수가 있다. 이처럼 일본의 비평, 평론에 대한 한국 국내의 관심도가 낮은 상황에서, 국내에 번역된 책을 한두 권 읽은 정도로 그 저자의 주장을 전부 접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한 경우는 많다. 이는 하나의 정보로서 염두에 둘 필요가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오타쿠론에 관하여

또 한 가지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이 책에 실려 있는 나와 오쓰카의 ‘오타쿠론’에 관한 내용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을 읽는 데에 있어 가장 기반에 두어야 할 사전 지식이라면, 저자 두 명, 즉 오쓰카 에이지와 나 모두가 ‘오타쿠’라는 계층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바탕에 두지 않고 책을 독해하면 영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게 될 우려가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먼저 오쓰카 에이지의 경우, ‘오타쿠’란 용어를 차별적으로 사용했던 맨 첫 번째 사례([만화 부릿코] 1983년 6월호)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던 것만 보더라도, 오타쿠에 대한 그의 태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편집장을 맡았던 『만화 부릿코』는 성인 대상 만화 잡지로, 만화 이외에 칼럼 기사도 싣고 있었다. (중략) 『만화 부릿코』에도 업계 평론적인 기사가 실렸는데, 그중에 나카모리 아키오라는 평론가가 현재와 같은 의미인 ‘오타쿠’라는 단어를 사용한 칼럼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그 칼럼에 대해 편집장 오쓰카 에이지는 “오타쿠 층에 대해 차별적”이라는 이유로 후속기고를 중단시켰는데, 이것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유포된 ‘오타쿠’라는 단어가 공적 매체에서 다루어진 첫 번째 사례였다.

– “오쓰카 에이지는 누구인가”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오타쿠 세대’에 스스로 속해 있다는 것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시시콜콜해 보이지만 굳이 첨언해본다면, 다만 나의 경우 스스로 ‘오타쿠’로 자칭하는 일은 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는 개인을 어떤 특정한 용어로서 정의하는 것 자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일 뿐, 오타쿠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직함을 ‘평론가’로 자칭하는 일은 없는데(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므로 ‘칼럼니스트’라고는 하지만 내가 쓰는 글이 내 기준에선 평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평론가를 자칭하진 않는다), 이 역시도 평론가란 직책명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자칭하지 않을 뿐 남이 나를 오타쿠나 평론가로 지칭하는 것에는 굳이 반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에서 오타쿠 계층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잘못된 독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나는 일본의 ‘넷우익’의 상당수가 오타쿠 층에 속해 있다거나, 주류의 ‘평범한 아이들’ 사이에 섞이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오타쿠 층에 속하게 되는 경향이 현대에 와서 강해진 것 같다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문장 그 자체의 의미일 뿐이지, 오타쿠 층을 부정적으로 설명한 글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쓴 서문의 이런 부분을 읽어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제 폭탄 테러를 일으킨 한국의 학생도 일본 애니메이션 팬이었고,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도 ‘오타쿠의 범죄’라고 하여 일본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고, 옴진리교도 〈기동전사 건담〉에 나오는 ‘뉴타입’이란 개념을 차용했던 것이 매스컴을 통해 크게 보도되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자아실현에 관련된 사건을 마치 오타쿠들이 오타쿠들이기 때문에 일으키는 것처럼 보는 사회의 시선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은 오타쿠가 오타쿠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연스레 주류 안에 섞이기 힘들어하는 이들이 오타쿠적인 취미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동시에 범죄나 사건에 관련되기도 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서문”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이 내용을 사회 부적응자나 피해 의식을 가진 사람이 오타쿠가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정반대의 독해라는 말이다. 내가 한 말은 오히려 그 반대로서, “매스컴이나 사회에서는 오타쿠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범죄를 일으킨다고 보도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게 아니라 주류에 섞이기 힘들어하는 이들이 오타쿠적인 취미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동시에 범죄나 사건에 관련되는 것 아니겠느냐”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오쓰카 에이지가 유럽에서 일본만화의 작법을 가리킬 때에 모여드는 학생 중에, 주류층보다는 이민자 출신의 청소년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말을 저 문단 바로 다음에 기술했던 것이다.

과거로부터 내가 쭉 지적해왔던 바이지만, 오타쿠를 비판하는 이가 오타쿠인 경우는 드물지 않은 일이다. 일반인이라면 오타쿠가 정확히 어떤 인물상(像)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피하거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볼 수는 있어도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나나 오쓰카 에이지가 오타쿠론(論)을 말하고 있는 것도 스스로 오타쿠 층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이미지 출처: 신정우 홈페이지

이미지 출처: 신정우 홈페이지

심지어 오쓰카 에이지는 많은 오타쿠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고 거리를 두려고 기를 썼던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주2)에 대해서도, ‘특별 변호인’으로서 피의자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나섰다. 또 이번 인터뷰 책에서도 오쓰카가 여러 방향에서 언급했고 나 역시도 많이 공감했던 부분이 바로 ‘피해자 의식’에 관한 내용이었다.

선정우: 상식적으로 ‘특권’이라면 오히려 일반 대중이 ‘마이너리티’보다 더 많이 갖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어려운 이유가 상류층이나 특권 계급이 아닌 여성이나 외국 이민자와 같은 마이너리티 탓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이너리티에 대한 보호정책조차 ‘특권’이라 비판하고, 자신들이 혜택받을 수도 있는 복지정책을 부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계층을 ‘놀고먹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남의 큰 고통보다 자신의 작은 고통을 더 아프게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피해자’로 보다 보면 쉽게 눈에 띄는 사람들, 특히 마이너리티가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을 가해자로 몰아붙이게 됩니다. 이는 부모들이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을 ‘나쁜 것’으로 보는 자세와도 일맥상통하고, 오타쿠에 대한 탄압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죠. 일본에서 넷우익의 상당수는 오타쿠 층으로서, 오타쿠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부당한 비난에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마이너리티 계층에 부당한 비난을 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이것은 비단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 6장 “피해자 의식과 정치적 보수화”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는 수용자의 피해자 의식을 다루는 것만이 아니고 작가의 ‘제조자 책임’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 언급하였다.

오쓰카 에이지: 일본 작가들 중에도 작품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은 작가의 것이니 당연히 작가의 책임 하에 있는 것이죠. 다른 누군가를 위해 프로파간다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의 약한 마음을 커밍아웃 하는 작품은 적어도 엔터테인먼트나 서브컬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서전이나 일기 형태라면 몰라도요. 하지만 서브컬처는 상품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책임이 따릅니다. 소위 ‘제조자 책임’이라는 것이죠.

만약 생수가 제조되는 과정에서 어떤 유해 물질이 들어갔다고 칩시다. 누가 이 제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까요? 당연히 만든 기업이 책임져야겠지요. 만드는 이에게 악의가 없었다고 해도 제조자 책임은 분명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서브컬처나 팝컬처 제작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상품이니까요.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외에도 모든 정치적 입장에 대해 프로파간다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책임이 따릅니다.

– 4장 “스튜디오 지브리의 힘”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

따라서 오타쿠에 대한 이 책의 비판은, 자성(自省)과 자계(自戒)를 포함한 의미로 받아들여야지 오쓰카나 내가 오타쿠를 타자(他者)로서 한 발 떨어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특히나 기본적으로 나의 경우, 모든 비판적 발언이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포함하고 있다. 오타쿠에 대한 비판, 서브컬처 필자에 대한 비판, 만화 연구에 대한 비판, 출판계에 대한 비판, 만화 독자에 대한 비판 등 지금까지 이런저런 비판을 해왔는데(별 영향력은 없었으나), 그 비판의 대상에는 전부 다 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오쓰카 에이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무튼 2012년 당시 오쓰카에게 내가 주로 질문했던 부분은 이런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이 계신다면, 오는 2015년 7월 말에 오쓰카 에이지가 다시 한 번 방한하여 강연할 예정이니 그때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예정으로는 7월 24일 금요일과 25일 토요일에 진행할 듯한데, 강연 중의 한 번은 사회적인 내용(스토리텔링 작법론과 자아실현 등)에 대한 내용, 또 한 번은 2012년에 청강대에서 진행했던 “세계 만화 학원” 강연의 최신판(일본만화와 콘티의 작법)이 될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추후 북바이북(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웹사이트트위터(@e_kpm21)를 통해 공지가 나올 테니 참고하기 바란다.

2012년 당시 이틀 동안 모두 거의 10시간 가까이 대화하면서 짜내고 짜낸 내용이었기에 그런지, 출간 전의 예상보다는 그래도 꽤 반향을 얻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다른 일정으로 외국에 나와서 긴 시간 동안 질문을 받아준 오쓰카 에이지 씨에게 감사드리고 싶고, 또 오쓰카 씨 역시도 한국에서 나름대로 반응이 있다고 전하자 “정말 감사한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책에 대해 반응이 좋다면 그만큼 또 다음번 도전이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오쓰카의 문학계에 관한 비평을 좀 더 자세히 읽고 싶다는 분들이 이번 책에 관심을 보여준다면, 나중에 [서브컬처 문학론]과 [갱신기의 문학]이 번역·출간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오쓰카 에이지의 문학론 이외에도 [오타쿠의 정신사]나 [이야기 소비론], [이야기 소비론 개(改)] 등도 번역·출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뭐라도 좋으니 오쓰카를 비롯하여 참고할 만한 부분이 많은 저자의 저술이라면 국내에 좀 더 많이 번역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주석

  1. ‘와타시가타리(私語り)’는 ‘나[私]’를 화자로 하여 쓰인 문장을 뜻하는 일본어. 자기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글, 예를 들어 일기나 자서전은 물론 일본문학의 사소설도 포함된다. 근래에는 블로그나 SNS(트위터 등)와 같은 인터넷 서비스가 대표적인 와타시가타리의 예로 제시되기도 한다. ([스토리 메이커] (북바이북, 2013년) 서문 역주에서 인용) (원문으로)
  2. 1988~1989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사건’. 어린 소녀를 대상으로 한 범죄로서 용의자로 체포된 미야자키 쓰토무의 이름을 따서 불리기도 했으며, 특히 2006년 사형이 확정되고 2008년 집행된 미야자키 피고인이 6천 편 가까운 드라마 등의 비디오테이프를 방안에 갖고 있었는데, 해당 비디오테이프 중에 극히 일부를 차지한 애니메이션이 마치 사건의 원인인 양 보도되어 ‘오타쿠의 범죄’로서 일본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1980년대까지는 일부에서 단순히 마니아일 뿐이었던 오타쿠 계층이 사회적 주목을 받으며 마치 ‘범죄 예비군’처럼 다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나 평론가 오카다 도시오가 『오타쿠학 입문』 등의 저서를 통해 오타쿠를 특별한 능력을 갖춘 미래의 진화된 인간의 모습인 것처럼 지나칠 정도로 찬미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즉 일본에서 1990년대에 사회적으로 오타쿠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마이너스로 치우쳐졌기에, 그에 대한 반론으로 과장될 만큼 플러스 이미지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 중후반에 와서야 1989~1990년 일본의 오타쿠 비난 분위기가 전해지면서 그 영향을 받아 오타쿠에 대한 마이너스 이미지가 강화되었는데, 정작 일본에서 오타쿠에 대한 매스컴의 비난이 강하던 1990년대 초중반에는 마니아들 사이에서조차도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오타쿠란 단어 그 자체에 대한 비하 분위기에 동조했다는 과거가 존재한다.
    그런데 2000년대에 와서, 오타쿠에 대해 한일 양국에서 비하와 비난 분위기를 가져왔던 이 사건에서의 ‘6천 편의 비디오’가, 실제로는 성인물 등은 40여 편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단순히 TV에서 녹화한 평범한 내용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일본 매스컴이 센세이셔널한 ‘특종’ 보도를 위해 사실상의 조작 방송을 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TV 매체에서 대량의 잡지 중에 있던 에로틱 잡지를 꺼내어 위에 올려놓고 촬영하여 마치 방 안의 잡지와 비디오가 전부 성인물인 것처럼 편향 보도했다고, 당시 보도에 동참했던 다른 기자가 발언) 물의를 일으켰다. ([캐릭터 메이커] (북바이북, 2014년) 보강 역주를 참조) (원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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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선정우
초대필자.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1995년부터 국내매체에 기고를 시작했고, 2002년부터는 요미우리신문 등 일본매체에서 한국문화를 소개해왔습니다. 200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본관 「오타쿠:인격=공간=도시」전에서 전시작품 발표했습니다. (이 일본관 전시가 2005년 일본SF대회에서 제36회 성운상 자유부문 수상.) → 쓴 책: 『슈퍼 로봇의 혼』 ㅣ 옮긴 책: 『스토리 메이커』(오쓰카 에이지), 『캐릭터 메이커』(오쓰카 에이지) 등. → mirugi.com블로그트위터 @mirugi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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