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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당신의 평등’이 아니라 생존을 원한다

‘탈진영세대의 생존방식’을 기치로 내 건 잡지 [디스라이크](disslike) 유성호 편집장이 지난 3월 말에 있었던 장하성 교수의 강연(“청년들이여, 평등을 부르짖으세요”)에 대한 비판 의견을 슬로우뉴스에 기고했습니다. 모쪼록 이 글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활발한 대화와 토론의 가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청년들이여. 평등을 요구하십시오. 부르짖으세요. 여러분 탓이 아니라, 세상의 탓입니다.”

“최대 피해자는 20~30대.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돌리고 저항 대신 순응을 한다. 자기 계발, 자기암시, 자기 긍정에 매달린다. 원했던 게 아니다. 시대가 강요했다.”

2015년 3월 26일, 한국일보 주최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 릴레이 북 콘서트에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장하성 교수가 한 말이다. 장 교수가 북 콘서트에서 강연한 내용은 한국일보가 잘 정리했다. 장 교수의 주요 발언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한국은 모든 게 최악이다. 십 수년간 경제가 성장하면 기업은 돈을 벌어 노동자에게 주지 않고 계속 쌓기만 했다. 최대 피해자는 20~30대.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돌리고 저항 대신 순응을 한다.

원했던 게 아니다. 시대가 강요했다. 여러분 탓이 아니다. 40~70대가 만든 세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도, 기성세대도 아무도 바꿔주지 않는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라는 것도, 토익책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은 이미 방법을 가지고 있다. 페이스북에 맛집만 올리지 말고 ‘우리 시대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외치고 고용 평등, 임금 평등, 보육 평등을 말해보자.

찍을 정당이 없어도 상관없다. 누구에게든 매우 구체적으로 평등을 요구하고 계급투표를 해라. 20~30대의 시대정신은 ‘평등’이 돼야 한다. 20~30대는 불평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세대다. 이제 여러분이 자유와 함께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평등을 요구해야 할 때다.

나비의 고귀한 날갯짓이 파동을 만들고 폭풍을 일으키듯이.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미래를, 대한민국을 바꾸는 길이다.”

– 장하성, 2015년 3월 26일, 서울 중구 스페이스 노아 강연장

얼핏 듣기에 좋은 말이다. 안 그래도 청년세대 죽어나는데,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가 이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청년들에게 평등을 요구하라 말한다. 그러나 장하성 교수의 발언을 뜯어보면 그의 멋진 말도 기성의 ‘청년장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1. 청년세대에 대한 고민과 배려가 없다 

첫째, 장하성 교수의 발언은 이미 수없이 반복된,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의 담론 프레임을 짜주는 방식이다. 장하성 교수는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청년세대가 내는 평등의 목소리’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청년세대의 목소리가 평등으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공정한 경쟁을 원하는 청년이나 안정적인 계층사회를 원하는 청년은 청년의 자격이 없는가? 장하성 교수의 발언에는 ‘평등이 중요하다’는 말만 있지, ‘왜 평등이 중요한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물론 궁극적으로 청년이 평등을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하성 교수가 이미 ‘청년세대가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 이상, 청년의 ‘평등요구’는 ‘장하성식 청년-평등 프레임’에 매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장하성 교수가 정말 청년세대가 평등의 목소리를 내길 원했다면, 평등의 목소리를 내라고 하기보다 평등의 가치에 대해서 청년들에게 설파했어야 한다.

청년세대를 둘러싼 현재의 문제들은 다양하지만, 아직 청년의 목소리는 아직 뚜렷하게 나오지 않았다. 장하성 교수가 청년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면, 청년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길 기다렸어야 한다. 선후관계가 잘못된 것이다. 장하성 교수의 발언은 기존의 ‘3포 세대론’이나 조선일보의 ‘달관 세대론’ 등과 추구하는 가치만 다를 뿐, 마찬가지로 구태의연하고 청년세대에 대한 고민과 배려가 없다.

2. 순응 자기암시 자기계발 vs. 잉여 노답 평타 헬조선 

둘째, 장하성 교수의 발언은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청년세대의 편견-이미지에 기반해 청년세대를 꾸짖고 있다. 장하성 교수의 발언에는 ‘순응’, ‘자기암시’, ‘자기 계발’, ‘자기 긍정’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들이 과연 현재의 청년세대를 실제로 설명하는가? 청년세대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저렇게 규정한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기성세대의 눈으로 본 청년세대의 특징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인터넷 커뮤니티의 시궁창 근처에서 끌어올린 ‘잉여’, ‘자살’, ‘죽창’, ‘노답’, ‘평타’, ‘헬조선’ 등의 단어가 현재의 청년세대와 주변 상황을 잘 설명한다. 그렇다면 장하성 교수의 일갈이 향하는 대상은 저항하지 않고 ‘순응’을 위해 ‘자기 계발’, ‘자기암시’, ‘자기 긍정’을 하는 청년세대인가? 아니면 ‘헬조선’에서 ‘평타’를 원하지만 ‘노답’ ‘잉여’여서 ‘자살’ 아니면 ‘죽창’만이 답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청년세대인가? 애초에 둘은 구분될 수 있는가?

아마 장하성 교수는 익명의 쓰레기통에서 유통되는 청년세대의 부정적 담론이 저런 양상임을 모를 것이다. 설령 저런 장하성 교수가 제시한 키워드 자체로 의의가 존재하고, 나아가 현재의 청년세대를 설명할 수 있어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 청년세대 스스로 성찰과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성세대의 눈으로 청년세대를 규정지어 꾸짖는 것이 청년세대의 생존에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1955년~63년에 태어난 세대)는 자신을 ‘산업화세대’라 규정하고, 386세대는 스스로 ‘민주화 세대’라고 규정했지만, 포스트 386은 IMF의 여파로 인해 표류했다. 그리고 포스트 386세대는 386의 연장테제인 동시에 안티테제로 규정되었다. 그 결과 ‘X세대’, ‘응답하라 세대’, ‘토토가 세대’ 등으로 불리지만 세대의 동력은 전 세대들에 비해 미미하다. 그리고 현재의 청년세대는 스스로 규정하지 못한 채 ‘3포 세대’, ‘달관 세대’ 따위로 불리고 있다. 기성세대가 지어준 ‘OO세대’라는 명칭은 세대의 생명력에 약보다는 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세대가 공유할만한 성공 서사도 없는 상황이다.

3. 어른이 만든 세계가 잘못이라면 당신이 먼저 바꿔라 

셋째, 장하성 교수의 발언은 기성 ‘멘토’들의 발언과 본질에서 같다. 청년세대는 지금까지 멘토들에게 수도 없이 속아왔고, 지금도 속고 있다. 실현 가능성이 불분명한 성공을 파는 자기계발서, 세상이 원래 힘드니 위로밖에 해줄 게 없다는 힐링 멘토, 세상이 원래 힘든 것이지만 네가 잘못되었다는 독설 멘토들이 쏟아내는 얘기의 종착지는 바로 ‘너(괴로운 사람)의 책임’이다. 장하성 교수도 이 지점에 대해서 인지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이 청년세대의 탓이 아니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장하성 교수라고 자신이 원한 시대에 태어나 살았겠는가? ‘어른’들이 청년세대에게 주로 하는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는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다. 청년을 위한 시대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는, 청년세대가 사회의 주인공인 ‘어른’이 되는 과정에 문제가 많다. 청년을 위한 어른의 자리가 새로 생기지 않고 어른이 청년의 주머니를 털어먹는 구조가 형성됐다. 그래서 청년세대는 자신들을 둘러싼 현재 상황에 대한 성찰과 분석이 필요하고, 현재의 구조적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야 한다.

장하성 교수는 ‘괴로운 사람인 청년세대가 평등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를 위해 쓴 단어인 ‘평등’은 청년세대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것처럼 달콤하다. 그렇다면 어른이 되는 과정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은 청년세대가 내는 평등의 목소리로 극복 가능한 것일까? 만약 장하성 교수의 주장에 따라 청년세대가 평등을 요구했는데 변하는 것이 없으면 장하성 교수는 책임질 수 있는가?

장하성 교수는 멘토 흉내를 내며 ‘평등’이라는 두 글자를 던지기만 할 뿐, 그 외의 것에 관해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어른들이 만든 세계가 잘못되었다면, 그 사실을 아는 어른이 책임지고 바꾸자면 될 일이다.

외로운 피해자

4. 청년세대는 변화가 아니라 생존을 원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현재의 청년세대는 세상을 바꾸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생존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청년세대의 죽어가는 목소리는 평등에 대한 목소리가 아니라 생존에 대한 목소리다. 물론 이 생존이 궁극적으로 혹은 단면적으로 평등의 요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청년세대의 생존이 평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생존요구의 목소리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청년세대의 ‘생존’과 ‘평등’을 묶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질적인 관계가 없다.

이런 이유로 장하성 교수의 발언도 결국 과거의 청년 장사치들의 멘토 장사와 별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장하성 교수는 본인이 기성세대임에도 다른 기성세대와 일종의 ‘선 긋기’한다. 그러나 장하성 교수가 청년세대의 평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 청년세대의 문화지출비를 털어먹어 수십억 원을 번 멘토들은 청년세대를 위해 인세를 얼마나 기부했는가? 청년세대는 이미 멘토의 탈을 쓴 청년 대상 장사치들에게 신물이 나 있다. 기성 매체가 지정한 멘토의 책을 사고, 강연을 듣고, 사상을 따라 하는 것은 청년세대의 생존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멘토가 청년세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멘토 범람의 시대에 청년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어야 한다.

청년세대의 문제는 청년세대가 알아서 한다. 사실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 이래도 저래도 안 되면 그때 가서 기성세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무엇을 요구할 것이다. 청년세대를 정말 걱정한다면 잘 알지도 못하는 청년세대를 이끌려 하지 말고, 청년세대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해달라.

청년세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차라리 청년세대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위해 일해달라. 만약 그래도 청년세대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시대가 지나간다면, 그때 청년세대의 영정 사진에 대고 절해라. 그게 아니라면 청년세대의 목소리가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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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유성호
초대필자. 디스라이크 편집장

탈진영세대 생존방식, 잡지 디스라이크(disslike) 편집장. → 개인 페북디스라이크 페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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