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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상대적이다

5년 전, 암 판정을 받았다.

이름도 희귀했다. 골육종. 뼈암이었다. 위치는 꼬리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통원하던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내 질병을 설명했다. 정형외과 생활 20년 만에 이런 질병은 처음이라고, 미안하다고 했다. 생존율은 20%. 빨리 큰 병원으로 가 보라 했다. 병원에서 나와 바로 대형 병원에 예약을 잡았다. 가장 빠른 날로 잡았는데도 한 달이나 기다려야 했다. 회사를 정리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못 만난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내 몸이 심각한 상태라는 건 이르지 않았다.

다행히 암은 오진이었다.

한 달 뒤 시술한 조직검사 결과 경계성 종양으로 판명 났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했다. MRI상 악성종양으로 판단할 만큼 내 경계성 종양은 지독한 놈이었다. 8시간, 13시간. 두 번에 걸쳐 전신마취 수술을 받았다. 후유증은 심각했다. 허벅지 일부에 감각이 없었고 대소변 조절 기능도 90% 이상 소실됐다. 꼬리뼈 신경 대부분이 잘려나간 탓이었다. 얼마나 회복될지는 미지수였다. 몇 달 동안 침상에서 먹고 자고 싸는 일을 반복했다. 내 나이가 아직 젊다는 게 애석했다.

누가 와서 죽여주면 얼마나 편할까 생각했다.

내가 쓴 병실은 2인실이었다. 하루 입원비만 30만 원 남짓한 돈이 나갔다. 더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때쯤 나는 6인실로 옮겼다. 6인실은 하루 만 원도 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뒤섞이는 게 끔찍이도 싫었지만, 별수 없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6인실 풍경은 이채로웠다. 내 왼쪽 병상엔 대장암 4기로 투병 중인 한 아저씨가 있었고 오른쪽엔 교통사고로 뇌 손상을 입은 식물인간이 누워 있었다. 맞은편도 이에 못지않았다. 치료를 포기한 혈액암 환자가 매일 사경을 헤맸고 그 좌우로 이제 막 입원해 대수술을 기다리는 이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당장 죽을 날만 기다렸던 내게 그 풍경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 주었다. 스스로 죄스럽기도 했다. 헌데 솔직한 내 마음이 그랬다. 그래도 저 사람보다야 낫지 않겠느냐며 매일 내 망가진 몸뚱어리를 위로했다. 저녁 시간마다 대장암에 걸린 아저씨의 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안도했다.

결국, 나는 나보다 불행한 이들의 절망을 자양분 삼아 견뎠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옮긴 6인실에 평범한 환자들로만 가득했으면 어땠을까. 단언컨대 당시의 괴로움도 또 통증도 나는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희망은 상대적이다.

마이너리티를 극복하는 방법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Jane Eyre)를 본다. 최초의 여성 성장 소설로 주인공 제인 에어가 희생과 순종만을 강요하는 사회에 살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며 살아나가는 내용이다. 주인공 제인 에어는 키도 작고 못 생기고 성격이 괴팍하기까지 한,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물이다. 게다가 고아다. 한 마디로 당대 가장 최하위에 자리한 마이너리티다.

그런 그녀가 온갖 풍파를 헤쳐나가며 사회의 편견을 떨쳐내고 귀족 신분의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된다. 참 볼품없는 이야기지만, 당시로선 가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치자면 슬럼가 출신의 흑인 노예가 대기업 회장인 백인 여성과 결혼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널리 읽힌다. 특히 여성의 타자화를 거론할 때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다. 작품 의의와 한계에 관한 논문 역시 수두룩하다. 헌데 아쉬운 건 산더미 같은 논문들의 내용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같은 내용은 조금 다른 식으로 풀어내는 데 그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작품 의의는 억압받는 여성의 진취적 모습을 잘 그려냈다는 것. 그리고 작품 한계는 결국 우월한 메이저 영역에 발을 들이기 위해 결혼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제인 에어] 첫 판의 타이틀 페이지 (

[제인 에어] 첫 판의 타이틀 페이지 (1847년)

내가 전문 학자는 아니기에 이런 평가들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헌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적어도 작품 한계에 관해선 더 그렇다. 어린 시절 제인 에어는 노예에게도 하대를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템플 선생님과 조우하며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그 자격으로 후에 남편이 될 로체스터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된다. 저택엔 오래전 그녀를 하대하던 노예들과 같은 위치의 하녀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곳에서 제인 에어는 가정교사 자격으로 저택 하녀를 하대한다. 그제야 비로소 제인 에어는 미약하게나마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음을 깨닫는다.

이후 제인 에어는 저택의 주인인 로체스터와 결혼에 이르게 된다. 헌데 그 과정이 참 황당하다. 로체스터에겐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의 아내 버사 메이슨이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여성의 존재 때문에 둘의 결혼은 난항을 겪는다. 그러다 특정 사건을 계기로 로체스터가 아내 버사 메이슨을 감금하기에 이르고 결국 버사 메이슨은 미치광이로 돌변해 불을 지른 후 자결하고 만다.

참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우리 주인공 제인 에어에겐 이 사건만한 기회가 없다. 로체스터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접한 제인 에어는 곧장 그를 찾아가 결혼을 치른다. 이것이 노예보다 못한 ‘여자’가 대저택 안주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여성의 주체적 삶’을 잘 그려냈다는 이 작품에서 나는 도무지 그 주체적 삶의 실체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주인공의 삶이 해피엔딩일 수 있던 것은 그녀가 신분 상승을 이룰 때 여전히 마이너리티로 존재하는 하녀가 있기에 가능했고 메이저에서 마이너리티 나락으로 떨어진 버사 메이슨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내가 보는 이 작품의 한계는 이렇다. [제인 에어]는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나보다 못한 마이너리티가 없어도 내 마이너리티를 극복해 낼 수 있는가.

이 한계가 현실이라고 다르게 적용될까.

내가 그리고 우리가 위로받는 방법

아홉 살 무렵, 어머니는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보곤 했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 최빈곤층들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어머니는 매번 그 방송을 시청할 때마다 눈물을 쏟아 냈다. 가난한 와중에도 종종 모금 활동에 힘을 보태기도 했으니 어머니가 당시 받은 감동은 적잖았을 것이다. 그때 천 원 남짓의 후원을 하고 어머니가 습관적으로 꺼내던 말을 나는 기억한다.

“저런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따르릉 1,000원입니다."

“따르릉 1,000원입니다.”

그 후 20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당시 어머니가 되뇌던 말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매일 사회 기사 1면을 장식하는 가슴 쓰린 사건들을 보며, 나는 힘을 얻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삼풍백화점이 박살 났을 때, 대구지하철이 녹아내렸을 때, 그리고 세월호가 무참히 침몰했을 때마다 나는 오래 전 어머니가 독백하던 말을 떠올렸다.

지나친 걸까. 하지만 내가 남들보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라 치부하고 싶진 않다. 해서 누군들 다를까 싶다. 어쩌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슬픔과 분노 뒤에 자위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깨닫지 못했을지언정… 이미 안다 

수술 후 퇴원까지 한 달 반이 걸렸다. 짧다면 짧지만 내겐 영겁 같은 시간이었다. 재활치료를 따로 받진 않았다. 한다고 한들 존재 않는 신경이 기능할 일은 없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뒤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환자를 배려한 병원 구조조차도 내겐 불편 일색이었는데 낡은 집에서 생활하려니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종일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제대로 처치도 못 하고 죽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망상에 시달렸다. 불안에 떠는 것 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남아도는 시간을 커뮤니티 활동에 쏟아 부었다. 나와 같은 질병을 앓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다. 되지도 않는 영어로 20여 년 전 논문을 번역해 가며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보다 심각한 증상을 앓는 수많은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6인실 병실에서 느끼던 안도감이 그제야 찾아왔다. 아직 나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그래도 아직 신체를 절단하지는 않았다고. 그나마 움직일 수는 있지 않느냐고. 저런 사람들도 희망을 품고 사는데 내가 뭐가 부족해서 절망하느냐고.

최근 들어 야근이 잦아졌다. 일이 일로만 느껴지지 않던 때가 그립다. 해를 거듭할수록 연봉이 오르지만 그만큼 내 삶의 중요한 무언가를 빼앗기는 기분이다. 행여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돼 바람 쐬는 시간이 잦아지기도 했다.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여서라도 머리를 식히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독이 될 것만 같다. 마치 회사와 권태기를 겪는 중인 듯싶어 실소가 일기도 한다.

해서 오늘은 오랜만에 소주를 마셔야겠다. 안주는 따지지 않으니 상관없다. 다만, 술자리 상대는 나보다 연봉이 적은 녀석을 불러야겠다. 또 나보다 작은 회사에 다니는 녀석이었으면 한다. 내가 최근 상사와 짧은 마찰이 있었던 만큼 팀원과의 관계가 소원한 녀석이기도 하면 좋겠다. 그래야 다음 주도 보람찬 회사 생활, 견딜 수 있을 테니까.

깨닫지 못했을지언정 우리는, 적어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스스로가 위로받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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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러비
초대필자

그냥 살아만 있고 싶지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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