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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서울비 님이 학교에서 느낀 하루하루의 깨달음, 학생들과 함께 배워가는 그 시간과 풍경을 ‘학교 이야기’에 담습니다. (편집자)[/box]

아이들이 심었던 해바라기, 서울, 2007년 4월 (사진: 서울비)
아이들이 심었던 해바라기 (사진: 서울비, 서울: 2007년 4월)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정원이 참 아름답습니다. 새들도 놀러 오고, 예쁜 꽃들도 많고, 잔디도 싱그럽게 깔렸지요. 하지만 저는 이 아름다운 정원을 ‘정비’하여 다시 ‘설치’하려고 착공하기 전의 모습이 가끔 그리워요. 좀 더 흙이 드러나 있었고, 가지치기가 덜 된 은행나무가 청소를 힘들게 했죠.

수풀이 이발소 못 간 머리카락처럼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자라나서 그 뒤에 앉아 속닥거리는 여자애들을 잘 감춰주었습니다. 소리와 냄새와 온도가 오래도록 켜켜이 섞이면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웃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오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영화관람이 오락이라면 아마 그때 숲에 앉아 친구랑 앉아있는 시간을 휴식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요.

정원 노닐던 해바라기 소녀들 

4월을 앞두고 그 정원에서 놀던 해바라기 소녀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애들은 선생님 몰래 해바라기를 교정에 심어버렸어요. 200개 이상의 씨가 여기저기에 도포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고생들이 참 예쁘고 낭만적이어서 예쁜 꽃을 보고 싶어서 심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틀렸습니다. 사실 그녀들은 ‘야자'(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간식이 필요하여 해바라기 씨를 자급하자는 학급회의 의결에 따랐을 뿐이었죠.

여고생의 정체성에 대해서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겠으나, 일단 그들이 이 지구의 먹을 것을 해치워버리기 위해 지구에 온 게 분명합니다.

Crinklecrankle.com, "Green girl in Chelsea garden", CC BY https://flic.kr/p/629Vq6
Crinklecrankle.com, “Green girl in Chelsea garden”, CC BY

그녀들의 도전, ‘해바라기야 피어라’  

어쨌든, 그녀들의 도전을 전해 듣고 이 해바라기가 꽃 피기를 그날부터 응원했지요.

시련은 있었어요. 학교 전면으로 들어오는 길에 심었던 녀석들은 결국 정원사 아저씨에 의해 제거되었던 거로 기억해요. 아저씨가 심어놓은 특제 장미 사이에 올라오는 새싹은 그저 잡초처럼 보였거든요.

아이들이 졸라댔지만, 이미 정원에 적합한 수목을 선정하여 치밀하게 배치한 정원사 아저씨 입장에서도 줄 맞춰서 심어놓은 장미 사이에 정배열을 어그러뜨리며 해바라기가 올라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드셨을 거에요.

katieblench, CC BY https://flic.kr/p/6MxA5c
katieblench, CC BY

비 먹고 바람 맞아 자란 해바라기

그런데 말입니다. 결국, 해바라기 새싹 몇 개는 잘 보이지 않는 터에서 올라와 꽃을 피웠습니다. 빨리 건물로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구석에서 말이에요. 꽃피운 해바라기는 당당했습니다. 미치도록 빨갛고 짙은 정원사 아저씨의 장미와 다른 매력이 있었어요.

장미는 환경에 적합하고, 병충해에 강하며, 꽃이 피면 오래가는 품종을 선별하여 구입한 뒤에 비닐하우스에서 비료를 듬뿍 먹고 소중하게 육성된 뒤에 꽃 피기 직전에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학교 초입에 ‘상장’되는 것이었다면, 아아, 저는 그 해바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단지 좀 먹어보자는 더욱 원초적 이유로 뿌려졌으며, 아무도 그것이 더 예뻐야 한다거나 도태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다그치며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비닐하우스의 형성 평가를 통과한 후 출하하는 과정 대신 스스로 비를 먹고 바람을 맞아 성장했습니다.

△ 교정의 해바라기, 서울, 2007년 7월 (사진 제공: 서울비)
△ 교정의 해바라기 (사진: 서울비, 서울: 2007년 7월)

그저 해바라기 바라보던 아이들 

학생들은 ‘공부 안 하면 인생이 쫑난다’는 삶의 리스크에 대비하려고 열심히 수업 들으며 아마 가끔 창밖을 보았겠지요. 흙에서 스스로 그다음 목적 없이, 이를테면 자라나서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봄이 되었기에 자라나서 결국 쑥쑥 올라와 꽃잎을 품는 해바라기를 내려다보았던 것이겠죠.

미친 장미는 하룻밤 사이에 온실에서 옮겨 심어져도 우리는 처음부터 거기서 자란 줄 알고, 해바라기는 처음부터 열심히 자랐는데 천천히 관찰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올해 봄이 찾아오는 교정을 보며 스쳐 갔던 1년생 해바라기의 얼굴이 그립습니다. 너른 휴식의 공간에 스스로 자라나는 공간도 그립습니다.

정원은 3개월만에 다 큰 닭을 키워내는 ‘닭공장’과는 달라야 할 텐데,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교정의 해바라기, 서울, 2007년 7월 (사진 제공: 서울비)
△ 교정의 해바라기 (사진: 서울비, 서울: 2007년 7월)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햇살을 보았죠.
그리고 노란 머리를 흔들며,
이웃에게 속삭였습니다.

“겨울은 죽었다.”

– A. A. Milne, “Daffodowndilly”, [When We Were Very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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