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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상장사 두 개를 거느리고 있는 중견기업 S사의 오너 일가는 2008년과 2010년 아들 명의로 회사 두 곳을 설립한다. 자본금 10억대에 불과한 이 신생 회사 두 곳은 불과 5~6년 만에 천억 원이 남는 자산을 쌓은 우량기업으로 변신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아버지 회사의 지분을 인수해서 아들들은 보란 듯이 S사의 오너가 된다.

30대 아들들이 세운 신생회사들이 초고속 성장한 것은 S사와 그 계열사들을 상대로 손쉬운 유통업과 용역업을 했기 때문이다. 매출의 거의 전부가 S사 계열사에서 나오는 아들 기업들의 영업이윤은 20%가 넘는다. 이들의 고성장과 고이윤은 S사와 계열사들이 가졌어야 할 이익을 편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편법 상속, 위법 아닌 이유는 단지 법이 없기 때문 

사실 이런 방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벌그룹들이 이미 한 번씩은 거쳐온 전통적인 편법 상속 방법이다.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상위 랭킹을 차지하고 있는 제일모직, 삼성SDS, 현대글로비스, SK C&C 등이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 회사들이다. 중소기업들이 대기업들이 정립한 표준적인 상속방법을 따라 한다고 해서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S사의 대주주 지분율이 높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들의 회사가 거둔 이익이 S사의 이익규모 대비 상당한 수준이라면 문제가 크다. S사의 소액주주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

명백한 편법상속과 소액주주 이익침해에 대해서 개인 투자자들과 외국계 주주들이 고발하고 소송을 걸었지만, 모두 기각되거나 무죄 처리되었다. 그러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행위가 위법이 아닌 것은 그 행위가 정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관련된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법체계가 개인 간의 권리 침해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하나 아직 기업 차원의 편법 행위에 대해서는 관련된 법이 미처 정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법적 책임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피케티 열풍 vs. 빌 게이츠 항변

2014년 한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저서가 전 세계를 뜨겁게 했다. 피케티의 핵심 논지는 자본에서 오는 이익이 근로소득을 늘 초과하기 때문에, 사회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부의 양극화는 영원히 증대된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피케티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대체로 동의를 표하면서, 한편으로는 자본가들이 초과이익을 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창의성과 도전 정신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본 이익 전부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토마 피케티(좌), 빌 게이츠(우) (출처: 피케티, 게이츠 각각 CC BY SA 2.0)  http://en.wikipedia.org/wiki/Capital_in_the_Twenty-First_Century#mediaviewer/File:Piketty_in_Cambridge_3_crop.jpg http://ko.wikipedia.org/wiki/%EB%B9%8C_%EA%B2%8C%EC%9D%B4%EC%B8%A0#mediaviewer/File:Bill_Gates_World_Economic_Forum_2007.jpg

토마 피케티(좌), 빌 게이츠(우) (출처: 피케티, 게이츠, CC BY SA 2.0)

빌 게이츠 말처럼 개인의 창의성과 도전을 통해 부를 창조하는 것은 경제 활력을 위해서 권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창조와 도전이 아닌 선대의 부를 세금 없이 물려받고 타인의 부를 침해하는 부자라면 피케티가 지적한 사회불안을 초래하는 부정적인 양극화와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된다.

단돈 10억 원으로 5년 만에 천억대 부자가 되고, 아버지 회사를 세금 없이 물려받은 S사의 아들들에게는 빌 게이츠의 변호가 절대로 적용될 수 없다.

‘잃어버린 10년’ 위기설과 돈의 사회적 책임 

요즘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위험하다고 한다. 저성장, 저물가에 부채 부담은 크니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이 땅에도 찾아올 것이라 경고한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돈이 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기업들에 쌓여 있는 현금이 투자와 임금소득으로 분배되어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이야기이다.

기업들이 돈을 번 건, 회장님의 뛰어난 식견뿐만 아니라 이 나라가 적합한 인프라를 제공하고 이 나라 국민이 염가에 양질의 노동력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번 돈에는 분명히 사회적 책임이 있다.

한 노동자의 초상, 1942년 경 촬영. 출처 미상. (재인용 출처: Bill & Vicki T, CC BY)

한 노동자의 초상, 1942년 경 촬영. 출처 미상. (재인용 출처: Bill & Vicki T, CC BY)

그동안 기업들이 그 책임이 있는 돈을 기업 내에 유보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세금을 감면해줬던 것은 미래의 경제성장을 높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핑계로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그 핑계로 우리가 이제 와서 얻은 결론은 양극화로 인한 저성장이다. 그리고 기업들은 쌓아놓은 돈을 미래 성장에 투자하기보다는 오너 일가의 부를 지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 굳이 지하경제 양성화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일반 상식과 사회 정의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해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런 행위를 지탄하고, 법의 허점으로 허용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들만 규제해도 ‘잃어버린 10년’의 위기는 한결 경감될 수 있다.

특혜지만 특혜가 아니다?  

정부도 어쩔 수 없이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같은 것을 만들었지만, 이미 상속 이슈가 끝난 대기업들에만 적용되는 규제인지라 사후약방문이 되어버렸다. ‘사업 기회 편취’가 죄가 되는 경우는 특수관계인에게 특혜를 적용될 때만 적용되는데, 이 특혜라는 게 시장에서 100원짜리 물건을 특수관계인으로부터 200원에 사올 때에만 문제 삼을 수 있다.

시장에서 100원짜리 물건을 똑같이 100원에 사오긴 하는데 아무런 사업경험이 없는 20대 사장 아들이 세운 페이퍼컴퍼니에서 전량 사온다면 이게 어떻게 특혜가 아닌가? 지금 법으로는 특혜가 아니다.

두 얼굴의 삼성

한국 대표기업 삼성전자는 현재 시장에서 전년도 이익 대비 10배 수준에서 거래된다. 반면 제일모직과 삼성SDS는 모두 50배에서 거래된다. 계열사가 삼성전자 대비 5배나 높은 프리미엄을 받는 것은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높기 때문이며 그만큼 삼성그룹의 미래 사업기회가 이들 두 회사로 집중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투자로서의 가치는 뭐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제일모직이나 삼성SDS가 가지게 될 사업 기회가 삼성전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걸 삼성전자 소액주주나 삼성전자 주요주주인 국민연금이 나눠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법적으로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사회적인 관심도 이 문제 자체보다는 그저 재벌들의 상속과정에서 주식투자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에 대한 것뿐이다.

회계장부 열람을 신청하다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투자회사에서 상장사에 주총 안건을 제안하고 회계장부 열람을 신청한 상태이다. 해당 회사는 시가총액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현금으로 10년 넘게 어떠한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현금은 현 정부정책에 맞게 배당으로 환류되어 세상에 돈이 돌게 해주든지 아니면 현금이 효과적으로 투자되도록 지배구조와 경영효율을 개선하는 것이 맞다. 우리의 요구사항은 이것뿐이다. 자본시장 참여자가 이런 요구를 하는 건 자본시장 기능의 일부로 당연하고, 세계적으로 이런 일이 당연시되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우리가 첫 사례다.

앞서 재벌그룹이나 S사와 같은 수많은 사례가 그렇듯이 이런 노력도 큰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있다. 현행 법 체계나 자본시장 논리로는 이런 요구가 제대로 보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시간과 돈을 쓰는 것보다는 성장 가능성 높은 주식을 매매하는 게 투자자로서 해야 할 행동이고 오히려 시장의 결함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게 내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더 바람직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위해 정의를 포기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상황들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진 말자. 학교 교육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이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우지만, 정작 사회에 나와서는 정의는 이상적인 것이고 사회는 정의를 구현하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사가 펼쳐지는 현실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정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사회의 결함을 이용하는 사람이 성과를 거둔다고 느끼고 배운다.

하지만 정의라는 것이 그렇게 이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동안 현실적인 성장을 위해 이상적인 정의를 희생한 대가가 결국 현실에서의 양극화와 저성장이지 않은가. 정의는 모두의 평균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추구돼야 하는 선이다. 현실을 위해 정의를 포기하면 그 현실적인 먹고사는 상황이 나빠진다. 그게 피케티를 비롯한 요즘 나오는 최신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야기다.

대기업의 상속이나 S사와 같은 사례들에 막연한 적개심을 갖자는 게 아니다. 모든 일에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고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정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면 이런 일들에 관심을 두고 개선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는 있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앞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은 필자가 블로그에 올린 글(‘정의란 무엇인가’)을 슬로우뉴스 편집 원칙에 따라 퇴고한 글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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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대권
초대필자. 펀드매니저

펀드매니저로 일합니다. "KANG.DK" 블로그를 운영하고, 트위터(@kangdk)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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