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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세월호 참사가 불과 반년 전입니다. 또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2014년 10월 17일 오후 판교테크노밸리 야외광장에서 ‘제1회 판교테크노밸리축제’ 축하공연을 관람하던 시민 16명이 목숨을 잃고, 11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환풍구 덮개가 꺼지면서 관람하던 시민들이 추락해 벌어진 참사였습니다.

판교 환풍구 참사, 어떻게 봐야할까요? 더는 안타까운 죽음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허망한 죽음을 멈출 수 있는 여러분의 지혜를 기다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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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30일은 내게 특별한 하루였다.

그날은 처가에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웠다. 지하철을 탔는데, 지하철 안에서 소매치기 사건이 일어났고, 잠복 중인 경찰에게 범인이 잡히는 걸 봤다. 범인은 커터칼을 꺼내 위협하다가 잘못해서 자기 손을 베었는지 경찰을 베었는지 모르겠지만 피가 튀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인, 장모될 분에게 인사를 드렸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한 뒤 결혼 승낙을 얻었다. 날아갈 듯 기뻤을지도 모르겠고,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심신이 많이 피곤했던 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지하철 대신 신촌에서 인천 직행인 삼화고속 동인천행을 이용했다. 꾸벅꾸벅 졸았는지 책을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종점을 몇 정거장 앞둔 동인천역 앞 정거장에 KBS, MBC, SBS까지 방송차들이 줄지어 서있고, 소방차들이 출동해 있었다.

어린 학생의 어리석음과 국가의 책임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집에 가서 뉴스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이른바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건’이었다. 훗날 경찰조사에 따르면 호프집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신나와 석유 중 어느 것이 더 불이 잘 붙나 싸우다가 실수로 불을 낸 것이었다. 그날 따라 2층의 라이브 호프 집에는 축제를 마친 인근 학교의 동아리 모임 학생들과 생일 잔치를 위해 모인 120명 가량 되는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10100329101001&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9-11-01&officeId=00032&pageNo=1&printNo=16893&publishType=00010
경향신문 1999년 11월 1일 자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불길은 순식간에 옮겨 붙었고, 우레탄폼과 단열재로 쓰인 스티로폼 등이 불에 타면서 내뿜는 유독가스로 인해 55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숨지고 7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이후 방송과 신문, 그리고 사고 처리를 책임진 시 당국의 일각에서는 학부모들을 비롯한 유가족들에게 어째서 학교가 금지한 장소에 가서 숨진 것까지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가를 따지듯 물었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당시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10대 청소년들이 교칙을 어긴 것은 맞는지 모르겠으나 교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들이 죽어도 괜찮다는 것인지, 그와 같은 이유로 정부와 이 사회가 책임을 모면하거나 책임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논리는 과연 상식적인 것인가.’

마키아벨리가 말한 ‘국가’의 본질   

군주론(1550년 편집본 표지)
군주론(1550년판 표지)

서구에서 국가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멀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보편적인 자연법 체계를 벗어나 국가가 존립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주장되기 시작한 ‘국가 이성’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으로부터였다.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부도덕한 정치이론가로 비난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상찬하는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책략”을 갖춘 지도자란 기본적으로 사적인 이익이 아닌 국가공익, 다시 말해 국가란 경계 안에 자리잡은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서라면 국가 지도자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국가공동체의 시민들이란 저밖에 모르는 존재(이기주의)’란 전제 아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가 지도자는 국가와 국민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판교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세상의 어느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으랴.

국가란 왜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1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일에 대비하기 위해 과연 우리 사회는 환풍구의 안전에까지 신경써야 하는가? 그렇다. 국가란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3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쓰나미 사태에 원전이 멈추는 일에 대비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며, 50년 아니 60년 동안 일어나지 않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유지시키는 것이 국가라면 말이다.

압축 성장, 압축적 근대. 대한민국 사회를 말할 때, 그런 이야기 참 많이들 한다. 나는 인생에 생략이란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 논리는 국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압축할 수는 있어도 생략할 수는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국가의 존재이유다. 국민은 국가를 버릴 수 있어도, 국가가 국민을 생략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국가가 국민 없이 존재하는 길을 향해 가고 있다.

판교 참사 현장 (사진: 최미니 제공)
판교 참사 현장 (사진 제공: 최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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