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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앵커는 왜 억지로 웃음을 참아야 하는가

강창래는 [책의 정신]에서 포르노그래피의 통제 즉, 욕망의 통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정당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대중의 욕망을 통제하는 도덕주의는 통치권력의 기반 유지와 관련이 있을 뿐 실제 도덕과는 연관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성이 부정되기 시작한 것은 쾌락의 가치를 부정하고 노동의 가치만을 존중하던 시기, 즉 다분히 근대에 가까운 시기부터다. (…중략…) 현대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포르노그래피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범죄를 일으킨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 강창래, [책의 정신] 중에서

진정한 도덕은 도덕을 싫어한다고 파스칼도 그러지 않았던가.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가? 

아주 추상적인 질문부터 던져보자.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가? 혹시 우리는 성찰해본 적 없는 명분이나 도덕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배반하고 있지는 않은가? 억압적인 명분이나 도덕주의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한 것이 아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거나 혹은 그에 준할만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는 신념을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것인가?

물론 지금 같은 세상에서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은 드물기에, 평소 지닌 신념이 억압적인지 아닌지 명확하게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상당한 정도의 성찰적 사유와 그를 위한 지식이 없다면 파헤치기 어려운 신념도 있게 마련이다.

반면 꼭 그와 같은 지식이나 치열한 사유가 없이 간단한 질문과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깨버릴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대개 이런 것들은 도덕관이나 신념 같은 말을 붙이기엔 사소하지만 억압적인 생각에 균열을 일으킬 정도로는 충분할 것이다.

도라지 광고 속 유머 코드로 쓰인 엄숙주의 

이를테면 뉴스에서 앵커들은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와 같은 데 속할 것이다. 최근 나는 어느 도라지음료 광고를 뉴스로 착각한 적 있다. 해당 도라지 광고는 뉴스 진행상황에서 앵커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것이 광고에 쓰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앵커의 태도에 관한 선입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앵커가 뉴스 진행도중 웃음을 터뜨리거나 눈물을 흘리는 등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행위가 당연한 세상에선 인상적인 장면이 되는 것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엄숙주의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선입견은 저널리즘의 공정성에 대한 환상과도 결부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참치캔 하나를 통째로 넣은 김치찌개보다 돼지비계를 썰어 넣은 김치찌개가 느끼하다는 걸 예상할 정도의 지능만 있다면 간단히 논파할 수 있는 이러한 환상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관념 속에 뿌리깊이 자리해 있다.

무표정한 뉴스 전달자로서의 엄숙주의를 깨고, 뉴스 앵커로서 개성있는 멘트를 시도했던 최일구 앵커 (사진: MBC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 참고 화면 캡처)

무표정한 뉴스 전달자로서의 엄숙주의를 깨고, 뉴스 앵커로서 개성있는 멘트를 시도했던 최일구 앵커 (사진: MBC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 참고 화면 캡처)

표정 없는 저널리즘이 공정하다는 ‘환상’ 

저널리즘이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시각이란 점은 이미 상식이다. 물론 사실관계가 정확해야 함은 기본이지만, 지금 우리사회 언론의 작태는 사실은 쏙 빼고 시각만 제공하는 것도 같다. 저널리즘이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정보 전달 태도에서부터 그것이 드러나는 일이 부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2014년 9월 23일에 있었던 미국의 시리아 2차 공습소식을 전달할 때, 만일 뉴스의 방향이 공습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앵커는 그 정당성을 따져묻듯 하며 의아해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는 편이 한결 자연스러울 것이다.

반대로 동조하는 매체의 앵커는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비장한 눈빛을 띤 채 지지를 호소하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태도의 개입”은 매체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할 것이며 시청자의 주체적인 판단을 돕는다.

우리는 좀 더 솔직해도 된다 

우리는 속내를 감추는 데 너무 익숙한 나머지 벌거벗듯 솔직한 사람들에게는 외려 속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가면을 쓸 필요성은 있으나, 가면을 쓰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여 우리는 솔직해야 할 지점을 분별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 앞에선 당혹스러워지기도 한다.

가면을 쓰는 전략적 선택으로 인해 벌어지는 이 기묘한 역설은 어쩌면 전략적 가식이 어느새 우리 의식을 필요 이상으로 통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증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비록 개인적 영역이나마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은, 다시금 사회적 차원에서의 담론으로 확장할 필요성을 야기한다.

‘소통’이란 말이 철지난 유행어가 된 것은 우리가 진정 소통을 이루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통에 필요한 태도를 결여한, 껍질뿐인 소통의 현기증 때문은 아닐까? 수만 개의 문장으로도 설명이 어려운 복잡한 사회에서 우리는 소통보다는 섣부른 판단과 협애한 시각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 간다. 자기보호를 위해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우리 자신과 타인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대답은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적어도 불필요한 통제가 결국은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솔직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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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윤
초대필자. 대중예술인

전산과 전산수학을 공부했다. 만화로 전향한 뒤 카툰과 웹 일러스트레이션, 게임 원화 등을 하며 여러 분야에 촉수를 두고 독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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